글/러브라이브!2018. 10. 21. 01:26

특별히 기대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검토를 마친 서류를 옆으로 옮기고 처리해야 할 새 서류를 끌어다 앞으로 놓는다. 턱을 괸 채 툭툭 괜히 볼펜의 뒤 축을 괴롭히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에리는 차분하게 자신의 추론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았다.


첫째. 오늘은 1021일이다. 둘째. 며칠 전 린이 뭔가 갖고 싶은 것이 없냐며 넌지시 물어왔다. , 뮤즈 멤버들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 학생회에서 만났을 때 노조미가 어딘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린 것과 묘하게 평소와 다른 톤의 목소리까지 더해보면 이것은 분명-


에리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향해가던 와중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우미’. 언제나처럼 <안녕하세요, 에리.>로 시작한 한껏 격식을 차린 메시지는 한참 이어져 <그럼 이만.>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장장 서른 줄에 걸친 메시지는 요약하자면 지금, 부실로 와주세요.’였다. 드디어-인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에리는 앞에 있던 서류를 들어다 책상에 툭툭 쳐 정리해 뒤집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리는 부실의 문고리를 붙들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두 번,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고 또 표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나서야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에서 들려온 우당탕 뭔가 무너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부실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예상컨대, 의자와 함께 넘어져 앞으로 고꾸라진 호노카와 눈이 마주쳤다.


-헤헤헤. 생일 축하해, 에리쨩.”


잠시의 정적은 머쓱하게 내뱉은 호노카의 목소리가 깨뜨렸다.


--!”


바로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기세로 달려드는 우미와 그런 우미를 말리는 코토리의 모습에 그제야 에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부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직접 써서 붙인 것이 분명한 ‘happy birthday!’는 두세 명이 함께 준비한 것인지 글자마다 꾸민 모양이 달랐다. 테이프가 단단히 붙질 않아 바닥에 떨어진 풍선을 보아하니 급하게 준비한 티가 역력했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부터 에리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까지 준비를 마쳐야했으니 시간이 꽤 빠듯했던 셈이었다.


이제 노래할까?”


에리를 중심으로 전원이 둘러 모이니, 코토리가 구석에서 케이크를 꺼내오며 이야기 했다. 진한 초코 케이크의 자태에 맛을 상상하며 에리의 입에서 언제나의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하라쇼!”


케이크에 시선이 집중되어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다보니 코토리의 등 너머로 부실 창문에 비친 그림자가 보였다. 에리는 인영으로 보이는 실루엣만으로도 바로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림자는 금방 모습을 감췄다.


잠시만.”


에리는 곧장 코토리의 옆으로 돌아 나와 모두를 부실에 남겨두고 혼자 빠져나왔다. 부실을 나서자마자 그림자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돌 연구부의 팻말이 적힌 문, 그 바로 옆의 벽에 팔짱을 낀 채로 기대있는 모습은 에리에겐 너무나도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어딘지 낯설었다.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상대방은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이 썩 맘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먼저 입을 열며 뱉은 목소리는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시끌벅적하네.”

그래도 좋아하잖아, 저런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에리는 팔짱을 풀었다.


저게 정답이야?”


몸을 틀어 마주보며 물어오는 그녀의 표정 찌푸려져 있었다. 그 모습에 에리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저런 표정이었구나.


괜찮아. 그리고-”


가볍게 그녀의 미간사이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생일축하해.”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에리가 돌아보니 발레복 차림의 어린 아이가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에리는 쪼그려 앉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지금 행복해?”

.”


에리는 아이의 질문에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리고 아이는 그런 에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야기했다.


생일축하해!”


부실에서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에리가 두사람을 문 밖에 남겨두고 다시 부실로 들어서는 순간 펑 폭죽 소리가, 그리고 바로 이어 호노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못 터뜨려서...”


호노카도 참. 웃으며 다시 모두의 사이로 들어가니 진동소리가 들렸다. 책상 위에 있는건가. 소리가 꽤 크네. 금방 꺼지겠지. 에리쨩 핸드폰 울리는데? 괜찮아 지금은-


-깨고 싶지 않으니까. . 지금. . 이겠구나. 꿈은 자각하고 나면 깨진다. 아직 눈은 뜨지 않았지만 에리가 있는 곳은 이제 오토노키가카 고교의 아이돌 연구부 부실이 아닌 자신의 방 침대였다. 눈치 없는 진동소리는 계속 울렸다. 에리는 엎드린 채로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다시 풀썩 배게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 싫다. 와중에도 진동소리는 울리고 있었다. 에리는 꾸물꾸물 이불에서 오른손만 꺼내다 침대 위쪽을 더듬거렸다. -- 울리고 있는 핸드폰의 앞면, 알람 끄기가 있을 익숙한 위치를 눌렀다. 하지만 계속 울리는 진동은 점점 커지는 것 같은 착각까지 일으켰다.


대체! 왜 안꺼지는거야!”


결국 폭발해 상체를 훅 일으킨 에리를 맞아준 것은 알람 화면이 아닌 전화 수신 화면, 그리고 화면에 찍힌 니코라는 이름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미안!’이라고 외친 후 10분 새 에리는 상당히 말끔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니코의 노성은 당연히 에리가 온전히 감당해야했다.


실컷 화내놓고 이제 와서 차분한 척 해봐도 늦었는데요, 니코니씨.”


핸드백에 지갑을 넣으며 궁시렁거려 봤다가, 에리는 고함소리에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핸드폰을 귀에서 멀찍이 떼어 내야했다.


. 미안해. ... 그러니까... 늦잠을 좀....”


다시 한번 핸드폰이 에리의 귀에서 멀어졌다.


. . 금방 갈테니까.”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와이셔츠 깃을 만지고 핸드백을 들어다 어깨에 걸쳤다. 그렇게 바로 밖으로 나서려 움직이던 에리는 다시 뒤로 걸어갔다. 책장 위에 놓여있던 액자가 살짝 삐뚤어져 있어 바로 하고, 아홉명이 모여 학교 강당에서 ‘start dash!’ 공연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그 사진 속의 그녀에게 슬쩍 인사를 건넸다.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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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8. 8. 19. 21:55

좋아해요.”

 

음절 하나 그리고 또 하나에 힘을 실어 토해내는 목소리에도 그것을 듣는 에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

 

우미가 내뱉은 짧은 문장은 에리의 귓가 어디에 걸려있을 뿐이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은 의식 없이 입가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보다 한 박자 느리게 고개가 따라 돌아갔다. 그렇게 에리의 시선이 우미에게 닿았을 때 우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절해, 에리는 채 몸을 다 돌리지 못한 그대로 멈춰 서버렸다. 슬픈 것인지 혹은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이었지만 그래도 우미는 에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가 작게 떨렸다. 그리고 이내 우미의 미간이 구겨졌다. 에리의 표정이 달라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우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던가, 에리는 확실하게 보지 못했다. 우미가 한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리더니 고개를 푹 숙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모습 그대로 쥐어짜 내듯 한 번 더 목소리를 밀어냈다.

 

좋아해요, 선배.”

 

작게 오르내리며 떨리는 어깨에, 후배의 그런 약한 모습에 에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에리는 뻗은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기 직전에 이해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그녀는 그제야 이해했다. 손이 작게 떨렸다. 뻗을 때보다 느리게 팔을 다시 물렸다. 그와 같이 걸음도 두어 걸음 물러나 우미와 거리를 두었다. 표정도 바뀌었다. 우미는 계속 무너진 그대로였다. 에리는 가만히 우미의 숙인 뒷머리를 내려보다 오른손을 제 등 뒤로 감췄다. 손에 힘이 빠지고,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아무 말 없는 두 사람 사이를 찢었다. 그 때 순간 렌즈에 스친 것은 경멸이 섞인 표정이었다. 조금 내려간 화면은 에리의 눈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마디 뭐라고 입을 움직였지만 모양뿐이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수고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조금 후에야 에리와 우미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지막이라며 전부 끝내자는 감독의 욕심에 꽤나 길어진 촬영이었다. 우미와 에리 뿐만 아니라 현장 모두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에리씨. 곁에 다가온 스태프의 부름에 에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화를 이어갔다. 대부분은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간단하게 부탁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우미는 두 사람 쪽을 잠시 바라보다 마무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선은 다시 그 가운데를 향했다. 가만히 온갖 생각과 함께 눈동자만 움직이는 와중에도 몸에 밴 습관으로 허리는 꼿꼿했다.

 

, 우미.”

 

에리는 어느새 뒤로 다가와 일어날 생각을 못 하는 우미에게 수건을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우미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바로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왜 아무것도 없는 쪽을 바라보고 있나 하고 에리가 우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 끝에 바닥에 부서진 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 아까 소리가 저. 한참 버티더니 결국 마지막에 부서졌네. 아쉬워라. 예뻤는데.”

에리! , 감사합니다.”

 

놀란 반응으로 보아 주변에 에리가 다가온 것을 정말로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화들짝 에리쪽을 돌아보며 우미 멍하니 한쪽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그제야 에리가 건네는 수건을 눈치채곤 받아들였다. 에리는 땀을 닦아내는 우미를 바라보다 새삼스레 머쓱해져 여기저기로 눈을 돌렸다.

 

두 사람 다 이쪽. 확인해 보겠어?”

 

때 맞춰 둘을 부르는 감독의 목소리에 에리와 우미는 !’ 동시에 대답하고 슬쩍 서로를 향해 돌아보다 눈이 마주쳤다. 에리가 생긋 웃어 보이니 우미 쪽에서 먼저 시선을 돌려버렸다. 도망친 것 같다. 에리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기분 탓이라며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평소보다 눈을 조금 낮게 뜬 채로 만들어진 동작을 한다. 화면에 비친 본인의 모습은 어딘지 낯설었다. 거울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구나. 에리는 새삼 신기해하며 모니터링을 계속했다. 화면 속의 그녀가 몸을 한 바퀴 돌리더니 유리 너머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저기 서있는 나는 춤을 추고 있는 것과 비슷할지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니까.”

 

감독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시선은 계속 모니터를 향했다. 그 때 화면이 바뀌었다. 웃고 있는 우미의 표정이 화면을 한가득 매워 어딘지 부끄러운 기분이 돼버렸다. 감독이 계속 무어라 자기 감상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에리는 힐끗 우미를 돌아봤다. 우미의 눈은 계속 화면에  고정돼있었다. 역시 우미. 대단한 집중력이네. 화면을 따라 움직이는 우미의 눈동자를, 다시 에리가 따라간다. 작게 오물거리는 입은 아마도 했던 대사를 안으로 따라 반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일순 우미의 표정이 변했다. 많이 티를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가라앉은 눈으로 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럴까하고 에리가 화면을 돌아보니, 때맞춰 보이는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내비친 표정이었다. 연기라지만 본인을 향한 것이니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화면이 검게 변했다.

 

이걸로 끝이네. 그동안 수고했어요, 두 사람 다.”

 

. 악수를 건네는 손을 맞잡으며 에리는 그제야 그 단어를 실감했다. 길다기에도 짧다기에도 미묘한 삼 주간의 시간이 끝이 났다고 한다. 어떤 기분인지 정리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에리에 이어 우미에게 악수를 건네는 감독 뒤로는 설치해둔 기구들의 정리가 한창이었다. 분주하게 뒷정리를 하는 스텝들을 보며 에리를 문득 삼 주전, 일의 시작을 떠올렸다.

 

 

***

 

 

-3학년 아야세 에리 학생은 이사장실로 와주세요.

 

방송을 듣곤 의아한 표정이 되어 에리는 부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마침 멀지 않은 복도에 있었다. 노크를 두번.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익숙한 이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하곤 에리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익숙한 하나가 아니었다. 이미 안에는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 부원도, 학교 관계자도 아니었다. 여대생일까. 정장 차림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다. 일단 꾸벅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하며 누구일까 고민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서와요, 아야세양.”

이야기 중이시면 밖에서 기다릴까요?”

 

에리의 물음에 답하기 전에 이사장과 그 손님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요. 아야세양과 관련된 분이니 들어오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에리는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장실의 문은 언제나 꽤나 큰 소리와 함께 닫혔다.

 

 

***

 

 

"영화출연?“

 

여덟 명 분의 놀란 목소리가 겹쳐 부실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가장 먼저 눈빛이 변해서는 이야기를 이어간 것은 니코였다.

 

"과연! 조금 늦기는 했지만 드디어 이 니코니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나타난 거구나!“

 

당황한 기색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니코의 한마디를 시작으로 모두 조금씩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두셋씩 서로 눈을 맞추어 가며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부실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적극적인 것은 단연 니코였다.

 

"그래서 장르는? 내 배역은?"

"잠시만. 잠시만. 하나씩 설명해줄게.“

 

에리가 두 손을 내저으며 니코를 진정시키는 사이, 그런 그녀의 뒤에 가만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가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부턴 내가 설명할게.“

 

처음 보는 얼굴에 다들 어렴풋이 짐작은 하면서도 누구인가 궁금해 하던 참이었다. 말을 꺼내자마자 소란은 가라앉았다. 부실을 한 바퀴 둘러보아 모두의 집중이 자신에서 쏠린 것을 확인하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우선 나는 이번에 일을 제안한 사람명함은 학생회장님 통해서 전해뒀으니 나중에 확인해봐. 우선 이것부터 확실히 할게. 내가 영화 출연을 부탁하고 싶은 건 저쪽의 두 사람이야.”

 

그녀가 두 손을 들어 가리킨 손의 끝에는 각각 에리와 우미가 있었다. 모두, 특히나 에리와 우미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은 채로 굳어버린 와중에 니코만 냉정해진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장르가 어떻게 되는데요? 본격적인 얘기 전에 대본은 확인해 볼 수 있는 건가요?"

"자자, 하나씩 설명해 줄 테니까. , 우선 하나씩 받아줘요.“

 

그녀는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한 뭉치의 종이 다발을 꺼내 들었다. 하나씩 하나씩 옆으로 전달해 부실의 모두가 전달 받고 보니 니코가 언급했던 대본이었다. 모두 받아들고 바로 읽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참 사륵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리더니 어느 순간 비슷한 때에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대본을 내려놓는 이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조금씩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들을 감독은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괜찮은기가?”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노조미였다.

 

신중히 결정해야 하긴 하겠지만 나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정작 당사자인 에리는 대본을 덮어 내려놓으며 비교적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를 받았다.

 

괜찮을까, 정말?”

뮤즈의 이미지에 문제는 없는 거야?”

당사자인 에리와 우미만 괜찮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각자 한마디 씩 보태는 와중에 감독이 나서며 설명을 시작했다.

 

다들 봤겠지만, 주인공인 여자아이와 그녀가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의 얘기야. 각각의 역할을 아야세양와 소노다양이 맡아줬으면 하는 거고. 이 후의 얘기는 이 점을 확실히 알아둔 채로 진행해줘. 일단 기획사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리려나. 작은 독립영화를 찍-”

 

파렴치합니다!”

 

갑자기 감독의 말을 끊으며 외친 것은 우미였다. 한순간에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옮겨갔다. 우미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대본에 얼굴을 묻을 듯이 있었다. 이제는 모두 내려놓은 대본을 마지막 까지 정독한 모양이었다. 이내 그 마지막 페이지를 쫙 펼쳐 테이블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확고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는, 절대! 절대 못해요!”

 

 

***

 

 

곤란한걸.”

 

감독이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이야기에도 단호한 표정의 우미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미의 이야기에 뮤즈의 모두 다시 대본을 펼쳐 들었다. 문제는 마지막 장면에 있었다.

 

, 키 키스라니! 그런 파렴치한! 저는, 절대로, 못 합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있는 힘껏 고개를 휘두르는 우미의 표정은 단호했다. 입을 꾹 다물고 조심스럽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전부 눈을 감아 차단해버린 지금도 생각에는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런 우미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리가 나서 대표로 해야 할 이야기를 꺼냈다.

 

죄송하지만 저희 멤버의 입장이 저렇다면 저희 쪽에서는 무리하게 진행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 감독은 금방 답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제 턱 주변을 감싸 쥐고 눈을 감더니 생각에 잠겨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는 감독은 조금 후련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하지. 개인적으로 놓치고 싶지 않아. 대본을 수정한다면 괜찮겠어?”

 

 

***

 

 

그렇게 키스하는 장면을 지우고 대대적으로 대본을 수정하고도, 긴 설득 끝에 시작할 수 있었던 촬영은 의외로 순탄하게 끝이 났다. 삼 주간 매일 같이 에리와 우미 둘이 함께 돌아가던 길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귀갓길은 한산했다. 보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드문드문 옆으로 차가 한 대씩 지나갈 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자니 두 발소리가 겹쳐 들리다 쌩 지나가는 차 소리에 묻힌다.

 

어떻게 무사히 끝났네.”

그러게요.”

 

우미는 웃으며 에리의 이야기에 답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며 동시에 웃음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우미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계속 신경이 쓰이던 그 표정이었다. 슬쩍 곁눈질로 그런 우미를 살피던 에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어쩐지 아쉬운걸.”

?”

 

우미는 에리가 멈추어 선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혼자 두어 걸음 앞 서 나가다 에리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에리는 손목의 시계를 내려 보았다. 여섯시를 조금 넘긴 시각. 이르진 않지만 해가 꽤나 길어져 아직 주변은 밝은 편이었다.

 

아직 시간은 괜찮은 것 같은데.”

 

에리는 일단 우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통보했다.

 

, 가자.”

? 저기 에리? 무슨-“

자자, 그러지 말고.”

 

억지로 이끄는 손길이었지만 우미는 저항하지 않았다.

 

 

***

 

 

정말이지. 지쳤습니다.”

그렇게 말은 해도 말이지. 우미가 나보다 훨씬 즐긴 거 아니야?”

 

실제로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앞으로 쭉 기지개를 켜는 에리의 표정은 우미에 비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에 발갛게 볼이 상기되어 있던 우미는 후다닥 표정을 감추며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런 우미를 향해 에리는 제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덧붙였다.

 

마지막에 게임센터에서 우미, 무서웠다니까.”

아니, 그런, 그건! 에리야말로 쇼핑할 때는 갑자기 사라지기까지 했잖습니까?”

, 그건-“

 

에리는 반사적으로 대꾸를 하려다 말고 슬쩍 자신의 교복 치마 주머니 안쪽을 뒤적였다. 그리곤 잡히는 것을 손 안에서 조금 굴리다 놓아주곤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미안, 미안.”

정말이지. 말 없이 사라지면 걱정되잖아요.”

그치만 그렇게 따지면 우미도 별로 할 말은 없잖아.”

 

늦은 밤 귀갓길은 그 저녁의 이야기로 한 가득이었다. 저녁으로 한참의 고민 끝에 결정한 카레집. 이후의 장소들은 왜인지 에리의 독단으로 결정되었다. 옷가게, 악세사리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에는 들어선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한 우미였다. 그곳을 빠져나올 때 즈음엔 이미 기운을 거의 다 탈진한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향한 게임센터에서도 역시 처음에는 별로 달갑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승부욕에 불타올라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에리 쪽에서도 물러 설 용의가 없어 결국은 게임센터를 나서면서 까지도 최종적으로 누구의 승리인지 날을 세웠다. 그렇게 뛰고, 웃고, 떠들고 저녁시간은 금방도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새 귀갓길의 갈림길이었다. 한적한 골목길에 가로등이 하나. 이전까지의 귀가시간에는 꺼져있던 가로등이 오늘은 밝게 길을 밝히고 있었다.

 

여기서 우미는 저쪽이었지?”

? , . 그렇네요. 오늘은 에리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 잠시만.”

 

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에리는 조그마한 머리핀을 하나 꺼내들었다. 단순한 검은 몸체에 꽃모양으로 올라간 푸른 보석. 익숙한 모양이었다.

 

이거 우미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 깨져서 아쉬웠거든.”

 

직접 머리에 핀을 꼽아주는 것을 가까이에서 올려보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린다. 한계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쉽게. 우미의 표정이 무너져버렸다. 다됐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한걸음 물러나고서야 에리는 우미의 표정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우미?”

에리는치사해요.”

우미? 우는 거야?”

 

우미는 대답은 않고 고개를 똑바로 들며 에리를 향했다. 눈을 바로 마주치는 우미의 모습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마주했던 그 표정이었다.

 

좋아해요.”

 

. 먹먹한 목을 간신히 비집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우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우미의 뒤로는 가로등 불빛에 뿌옇게 먼지가 끼어있었다. 손을 가볍게 말아 쥐고 있었다. 핀은 머리색과 잘 어울렸다. 그제야 에리는 우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에리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우미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리고 왜 그녀 자신이 그렇게나 우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는지.

 

좋아해요, 에리.”

 

말이 더 필요하지는 않았다. 에리는 우미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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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7. 2. 23. 20:55

옥상으로. 에리는 계단을 오르며 제 치마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쪽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쓴 사람의 이름도 없이 그 네 글자뿐인 쪽지. 하지만 그것을 보자마자 에리에게 생긴 의문은 그 쪽지를 누가 썼는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눈에 익은 글씨에 한눈에도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있어 더 의아했다. 왜 굳이 쪽지를 남긴 것일까. 그것이 에리에게 떠오른 의문이었다. 두사람은 이미 교문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또한 직전까지 함께 있었으니 약속을 바꾸고 싶었다면 말로 전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의문들이 있었지만 사소한 것들이었다. 어깨를 들어올렸다 떨어뜨리더니 다시 계단을 올랐다. 궁금한 것들은 그녀에게 직접 물으면 될 일이었다. 옥상 문이 오늘따라 유독 무거워 몸을 힘껏 실어 열어제꼈다.


시야를 방해하는 햇빛이 사그라들며 바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난간 가까이에 서서 운동장 쪽을 내려보고 잇는 호노카에게 에리는 가볍게 다가가며 이름을 불렀다.


“호노카.”


때맞추어 불어온 바람이 하필이면 맞불어와 돌아 보는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놓았다. 눈을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발이 땅에 붙어버렸다. 무언가 다르다? 아니. 그건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에도 보았던 호노카, 본인이었다.


“에리쨩.”


웃는 모습 역시 언제나의 호노카와 같았다. 호노카의 뒤로 흘러가는 구름이 반이 뚝 짤린 마냥 어긋나 있었다. 에리는 저도 모르게 눈으로 짝이 맞지 않는 구름의 끝을 쫓아 그 멀찍이에서 방황했다. 


“나. 지금 꼭 해야할 말이 있어.”


그녀의 말 끄트머리를 붙잡고 다시 그 입꼬리를 거쳐 눈으로 올라온다.


“에리쨩."


눈을 마주치고 호노카는 다시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 지금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


알 수 없는 위화감이었다. 나 지금 누구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지. 에리는 멍한 기분이 좀처럼 가시질 않아 머뭇거리며 물었다.


"호노카…지?"


그에 대한 답으로 호노카는 슬며시 웃어보였다.


"있지 에리쨩. 나는 에리쨩이 좋아. 에리쨩은 내가 좋아?"


어려울 것은 없는 질문이었다. 


"응."

"그럼 지금은 그걸로 좋아."




***



이상한 기분이 걸음을 늘어지게 해, 호노카가 먼저 내려가라며 등을 떠밀고도 한참 후에야 에리는 교문에 다다를 수 있었다.


"왜 이제야 나온거야!"


그리고 교문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것 또한 호노카였다.


"어? 호노카? 호노카야?"


왜 이제야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을까. 옥상의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이렇게 늦기까지하고 오늘 에리쨩 이상한데?"

"있지 호노카. 호노카는 내가 좋아?"

"응."


조금의 지체도 없이 호노카는 대답했다.


"그럼 지금은 그걸로 괜찮은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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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7. 1. 14. 23:01

1. 매일 아침

 

창은 머리맡 왼편에 조금 높이 나 있는 편이었다. 커튼도 쳐있지 않으니 햇살은 쉽게 창을 넘어 이미 작은 방에 한가득이었다. 노조미는 아직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방 주인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곤 슬쩍 창을 올려보았다. 빛이 내려앉는 사이로 먼지가 희뿌옇게 흐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동안, 백귀들이 재잘대는 마냥, 그렇게 저들밖에 없는 양. 노조미는 잠시 표정 없이 하얀 점들이 노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슬쩍 입꼬리만 올리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에리치, 일어나.”


그 잠시 사이에 소리 없이 일어나있는 상대방의 모습에 순간 노조미의 말문이 막혔다.


났구나.”

..”


잠이 덜 깬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에리는 상체만 일으킨 채로 침대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씩 내려가는 에리의 고개에 노조미는 쿡쿡 웃으며 그녀의 오른쪽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왼팔을 침대에 디디고 슬쩍 에리 쪽으로 기대오며 말했다.


그래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나?”

..”


이미 에리의 머리는 노조미의 어깨 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에리치이?”


더 가까이 다가가며 이름을 불러보니 색색 숨소리만 돌아왔다. 이제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와 끝이 흐려지던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몸을 슬쩍 틀어 아슬아슬, 닿지만 않을 위치에서 에리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꼭 닫은 눈꺼풀에 슬쩍 벌어진 입. 아무래도 에리가 저 혼자 일어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여기선 일단 한 발 물러서는게 좋겠지. 노조미는 여러 번의 경험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살짝 찡그리며 웃어 보이더니 우선은 몸을 뺐다.


에리는 눈은 감고 있었지만 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조미의 이야기도 전부 듣고 있었다. 최소한 본인은 전부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눈도 몸도 단번에 일어나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조금만 천천히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어나레이, 에리치.”


노조미의 이야기도 다 듣고 있었다. . 일어났어. 재차 대답도 했다고, 에리 자신은 생각했다.


아침 먹어야 하지 않나? 곧 나가야 하고.”


재촉하는 소리는 조금씩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가로막힌 듯 탁해졌다.


늦으면.”


그렇게 작아지다, 사그라들었다. 그 작아진 소리에 외려 에리의 눈이 뜨였다. 어느새 자신이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던 것도 에리는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불을 헤집으며 급히 일어나는 에리 때문에 침대가 크게 삐걱거렸다. . . 굴러떨어지듯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아래층에는 사람이 없으니 큰 발소리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은 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문 바로 앞에는 식탁이 보였다. 노조미는 그 건너편에 앉아 괜히 싱글거리며 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손이 풀리며 문고리를 놓아주고 팔을 떨어뜨렸다. 그 잠깐 새에 기운이 빠져서는 에리는 터덜터덜 문밖으로 나왔다.


왜 그렇게 사람을 보면서 웃고 있어.”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는 에리에게 노조미는 계속 웃는 채로 손가락을 들어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리치 머리카락이 입에 들어가 있는 거 알고 있나?”

. 노조미!”


에리는 의자를 빼내며 툭툭 입가를 쳐냈다. 그렇게 에리가 머리를 정리하고 나서도 싱글거리는 노조미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식탁에는 이미 빵이 몇 개 들어있는 바구니가 내놓아 있었다. 노조미의 맞은편에 앉은 에리는 빵을 하나 집어 들어 반으로 쪼갰다. 그리곤 한쪽을 입으로 가져가며 다른 한쪽은 다시 바구니에 내려놓았다.


빵이 푸석해.”

불평하지 말레이.”,


네네. 에리는 건성으로 답하며 남은 빵조각을 마저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에리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노조미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웃고 있었다. 에리는 쿵쿵 발을 울리며 이 방 저 방을 바쁘게 오가더니 욕실에 들어갈 때쯤이 되어서는 거의 집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샤워를 하는지 물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함께 조금씩 노조미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굳어가던 표정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깨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욕실을 나서는 에리와 눈이 마주쳤을 땐 이미 노조미는 다시 웃고 있었다.


***


에리는 한발을 들어 구두의 뒷꿈치를 매만지곤 두어 번 발을 굴러 발을 편히 했다. 그리곤 쭈그려 앉아 남은 한쪽의 신을 신으며 노조미를 올려보았다.


슬슬 나가볼게.”


그런 에리에게 노조미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녀오레이.”

. 다녀올게.”


느릿느릿 현관에서 한참을 인사를 건네고, 문을 열고도 에리는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돌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노조미는 슬쩍 웃으며 에리에게 이야기해줄 뿐이었다.


기다릴테니께.”


에리는 문을 나서고, 노조미는 안에 남았다. 문이 닫히고,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노조미는 에리를 향해 흔들던 손을 내리고 웃음을 거뒀다. 그 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던 이후로 노조미가 에리를 기다리는 것은 두 사람에게 너무나 당연한 매일이 되었다.




2. □□□의 꿈

 

삼 년 전 봄, 내 토죠 노조미는 스쿨아이돌을 시작했데이.

'내까지 넣어서 아홉명인기라.'

삼 년 전 여름, 내 토죠 노조미는 아야세 에리와 교제를 시작했데이.

'실수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거 고백인걸? 대답해주겠어, 노조미?”

그리고 그해 겨울, 나 토죠 노조미는그만 교통사고로 거짓말처럼 죽어버렸다.

 

***

 

이런 기분이구나. 죽은 자신을 인지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단 차분한 과정이었다. '삶에 미련이 없다.'라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이렇게 된 순간에 알아버린 쪽에 가까웠다. 이런 시간을 가지게 된 것도 스피리츄얼 파워라고 장난스레 불렀던 그 힘에 도움을 받아, 일종의 보너스 스테이지에 온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슬픔에 미쳐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나의 장례식에 와있었다.


장례식장은 분주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꽤 많은 편인 것 같았다. 어릴 때의 나를 떠올려보면 힘냈다고 생각해도 괜찮은 것 아닐까.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며 여기저기 구경을 하며 돌아다녔다.


거기 거기. 꽉 잡야한데이. 풀어지잖나?”


들리지는 않겠지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붙이고 다녔다. 이렇게 되어서야 할 일도 없으니 있는 건 정말로 시간뿐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돌아다녀도 다른 사람들을 성가시게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닿는 대로 여기저기를 떠다니다 순간 눈에 스친 모습에 급히 멈추어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니 많이 보고 싶었지만,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부모님 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마침 돌아본 쪽에 뮤즈 멤버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여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후다닥 도망쳐 그쪽으로 날아갔다. 모두의 머리 위에서 손가락을 들어 수를 헤아려 보았다. 하나. . . . 다섯. 여섯. 일곱. 다 같이 식장에 들어올 때 슬쩍 보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한 명이 부족했다. 누가 없는지는 보자마자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니코쨩, 어제 다녀온 건.”

그 녀석 얘기는 하지도 마.”


가까이 가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구 얘기인지는 몰라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니코의 모습에 그 옆에 슬쩍 앉아 얼굴을 붙였다.


너무하네 니콧치. 여 내 하루밖에 없는 날인디 그렇게 인상이나 쓰고. 얼굴 펴레이.”


웃으면서 괜히 손가락을 니코의 눈썹 사이에 가져가서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그러다 니코가 무거운 목소리로 잇는 말에 우뚝 멈추었던 것 같다.


아야세 에리. 그 멍청이는.”


직접 볼 수 없었으니 잘은 몰라도 내 표정도 같이 무서워지지 않았을까.


니코쨩.”

! 맞는 말이잖아. 그 녀석이 지금 여기 없는 게 말이 되냐고!”

니코.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우미의 지적에 니코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잘모르겠다. 니코의 이야기가 무슨 뜻일까. 에리가 왜 오지 않았을까. 니코는 왜 에리한테 찾아 갔던 걸까. 여러 생각은 모두 밖으로 나가면서 이어졌다.


에리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앞에 도착해 보니 집에 불이 꺼져있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다른 곳에 있나? 많이 이르긴 하지만 혹시나 자고 있는 걸까. 자는 모습이라도 보고 나오고 싶을지도. 아니 그러고 보니 일단 마음대로 들어가 봐도 되는 걸까. 아무도 못 보니 다행이었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서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은 부끄러웠다. 이미 죽어버린 후라고 해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오히려 아무렴 어떤가 싶어져 버렸다.


어차피 보지도 못할 테고 말이여!”


밖에서 본 것처럼 안은 어두웠다. 역시나 인기척도 없는 것 같았다. 역시 에리치는 집에 없는 걸까. 혹시 모르니 여기까지 온 거 확인은 해보자는 생각에 조심스레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기웃거려본 주방이나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에리치의 방문 앞에서 다시 고민이 이어졌다. 여기 있을지도 모르잖아? 에리치의 방에 들어가는 게 실례아니, 이건 에리치가 걱정돼서니까! 이렇게 되었으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아주, 아주 아주 조금은 있었다. 결국, 아까보다는 짧은 고민의 시간을 거쳐 에리치의 방문을 넘었다.


실례합니다.”

노조미?”


한구석에 쭈그려 앉아 슬쩍 고개를 드는 에리치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많이 달랐다. 그래서 에리치가 내 이름을 부른 것에 놀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노조미다.”


에리치는 웃고 있었다.


노조미가 보여.”


자기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만 들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에리치가 ''를 보고 있었다. 그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다가가면서 손을 뻗고 있었다. 두 손을 있는 힘껏 뻗어 금방이라도 에리치를 안아줄 수 있을 것처럼. 에리치의 표정이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뒤에는 벽뿐인데 에리치는 뒤로 물러나려는 듯이 발을 굴렀다. 무서워하고 있어. ? 내 뒤에 뭔가 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봤을 때에야 나와 에리치의 시선이 조금 엇나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에리치의 시선은 조금 낮았다. 따라갔을 때, 공중에 떠 있는 내 맨발이 있어서, 그제야 새삼 알았다. 아차차. 나는 지금 여기 있을 수 없는 사람이구나.


미안하데이.”


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물러날 곳도 없이 도망치려 하는 에리치 대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줬다.


, 에리치한테는, 정말, 정말로 미안하데이.”


가는 게 좋겠지. 조금이라도 빠르게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쪽이 좋을 것 같아 바로 돌아섰다. 어서, 도망가자. 천장에 이마가 닿았을 때 즈음이었을까.


노조미!”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는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에리치는 일어서 두 팔을 하늘로 자기 머리 위로 뻗고 있었다. 겁을 내는 그 표정 그대로, 필사적으로 내게 손을 내밀어 주고 있었다.


에리치가 나를 보며 무서워하는 표정을 짓지 않게 되기까지 3일이 걸렸다. 에리치가 내게 말을 걸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에리치의 옆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불안해하는 표정을 짓지 않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내가 에리치에게 손을 뻗었기 때문에. 또 에리치가 나에게 손을 뻗었기 때문에. 그렇게 다음날이 되면 깨야 할 꿈이 삼 년째 계속되고 있다.

 





3. 어느 주말

 

여느 때의 주말보단 조금 이른 기상.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분주한 준비. 그녀에게 약속이 있다는 것이야 누구든 조금만 지켜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니코라는 것도 언제나 에리의 옆에 붙어있는 노조미에겐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에리치, 니 오늘 니콧치 만나러 가는거 아니가?”

아니.”

아니이?”


노조미가 말꼬리를 늘이며 에리의 말을 반복해 물어오자 자연스럽게 에리의 고개가 그녀의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노조미는 이미 전날 에리와 니코가 문자를 주고받는 것을 바로 옆에 붙어서 보고 있었다. 당연히 눈을 돌리며 노조미의 시선을 피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이 이상 거짓말을 하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에리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시인했다.


아니. 그래. 맞아.”

뭘 숨기려고 그러나? 거기 내도-!”

기각!”


에리는 노조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노조미의 말을 막아섰다. 그리고 노조미도 이에 질세라 에리의 손 옆으로 얼굴을 비집고 들어오며 맞섰다.


!”


그런 노조미에게 에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어왔다.


왜냐니. 기억 안 나는 거야? 호노카와 만났을 때?”

 

***


노조미, 얘기했던 건 기억하고 있는 거지?”

네네! 잘 기억하고 있데이.”


약속장소의 옆, 건물과 건물 사이 작은 공간에서 에리는 노조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주의를 주고,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잔뜩 들떠서 주변을 에리를 보지 않고 밖을 기웃거리며 건성으로 대답을 하는 노조미에게 크게 신뢰가 가질 않았다.


절대, 절대로 조심하는 거야.”


그리고도 노조미에게 두어 번을 더 확인을 받고 나서야 두 사람은 호노카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에리쨩! 여기여기!”

호노카쨩!”


그리고 에리는 호노카를 만나자마자 얼굴을 감싸 쥐어버리게 되었다. 호노카와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조미가 에리에게 같이 가고 싶단 이야기를 해왔다. 에리는 한참을 고민하다 호노카를 보고 싶어하는 노조미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혹시 모를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노조미에게 밖에선 조심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멀찍이서 손을 흔들고 있는 호노카의 얼굴을 보자마자, 에리의 옆에 있던 노조미는 날아서 호노카의 얼굴에 매달려 버렸다. 안되지, 안되지. 에리는 속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이대로 가만히 서있으면 호노카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란 생각에 일단은 비척비척 호노카쪽으로 갔다.


에리쨩?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니야.”


노조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호노카의 옆에서 싱글벙글이었다. 슬쩍 그쪽을 노려보다 또 되었다 싶어져 우선 호노카를 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으로 끝이라면 에리도 더 따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만에 본 뮤즈 멤버였다. 그녀를 배려해줄 여유가 자신에게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한 번 정도야 미안한 마음과 함께, 조금 많이 들뜬 노조미를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 한 번으로 끝이었다면. 에리에겐 몹시 힘든 시간이었다. 호노카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내내 노조미는 호노카의 옆에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 하기도 했고, 호노카와 에리의 사이에 끼어들기도 했다. 웃음을 참느라 에리의 표정이 꿈틀거릴 때마다 호노카의 표정도 함께 의아하게 바뀌었다. 결국, 노조미가 호노카의 머리카락 사이로 슥 얼굴을 내밀었을 때는 참지 못하고 폭소가 터져버리기도 했다.


에리쨩,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병원에 가보는 쪽이 좋아.”


인사 끝에 묘한 표정을 지으며 호노카가 걱정스럽게 덧붙였을 때는 정말로 심란해져 버렸다.

 

***

 

에리는 고개를 슬쩍 돌리는 노조미에게 얼굴을 드밀며 한 번 더 강하게 물어보았다.


기억 안 나는 거야, 노조미?”

.”

 

***

 

결국 에리는 끝까지 매달리는 노조미를 떨쳐내고 혼자 카페에 도착했다. 오래 찾지 않아도 니코는 금방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을 위한 것 같은 의자의 한가운데에 등을 기대고 앉아 빨대를 입에 물고 있는 그녀는,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말이지.”


에리는 입구에 서서 슬쩍 굳었던 표정을 풀며 웃었다. 그리곤 일부러 맞은 편이 아닌 뒤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니코의 옆에 앉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우주 넘버원 아이돌 니코니인가요?”


옆쪽에서 어깨가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성공이네. 니코는 슬쩍 몸을 빼며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는 에리와 대조적으로 입꼬리가 내려가 있었다.


놀랐잖아.”


니코는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하며 한 손으로 슬쩍 선글라스를 내렸다. 미간에 자연스럽게 주름이 자리를 잡고 눈을 무섭게 뜬 것이 언제나의 니코와 같다고 에리는 생각해버렸다에리가 곁눈질로 슬쩍 테이블을 보니 니코가 시킨 음료는 아이스초코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에리, 근처에 홍보는 잘하고 있는 거지?”

하하하.”


에리는 시선을 피했다.


주문하고 올게. 나도 아이스초코가 먹고 싶어졌어.”


일어나는 에리의 등에 니코의 시선이 꽂혔다.


에리 잠깐만. 옷 뒤에.”

?”


니코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까치발을 들어 에리의 상의 뒤쪽에 달려있던 태그를 떼어주었다.


제대로 확인하라고. 새 옷인가 보네.”

, . 그러고 보니 사고 입었던 적이 없었네. 니코 앞에서 개시하게 됐는걸.”

흐응. 제법 잘 샀잖아.”

그치? 살 때 노조미도-”

?”


아차, 싶었다. 명백한 실수였다.


에리 너 설마 아직도-”


니코의 눈이 무서워져 버렸다. 에리가 노조미와 헤어지고 노조미와 다시 만나기까지의 사이의 시간에 몇 번씩이나 찾아왔던 니코였다. 닫혀있던 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 에리를 끄집어내려고 가장 노력했던 것도 니코였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고. 깐만. 일단 갔다올게.”


에리는 니코의 시선에서 도망쳐버렸다. 다짜고짜 일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기계적으로 읊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계속 생각 중이었다. 주문을 하고도 일부러 음료가 나올 때까지 그 옆에서 기다려, 받아 들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서 노조미 얘기는 뭔데?”


그 정도 시간을 끌었다고 호락호락 넘어가 줄 니코가 아니었다. 에리가 유리잔이 있는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자마자 다시 쏘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냥, 노조미도 이런 옷 좋아했으니까.”


카운터 옆에서 내내 머리 속으로 읊었던 대사를 그대로 늘어놓았다. 니코는 그런 에리를 빤히 추궁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에리쪽에서 가만히 마주 보니 이내 툭 던지듯 말을 내놓았다.


아아, . 그래.”


하아. 옆에 있던 쿠션을 끌어안으며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냥 그 정도 변명으로 넘어가 주겠다는 태도가 명백했다.


***

 

다녀왔어.”


에리의 힘이 빠진 인사에도 노조미는 곧장 다가왔다. 그리곤 쉴 새 없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땠어? 니콧치는 여전하나?”


에리는 응응, 건성으로 답하며 곧장 제 방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노조미는 계속 에리를 따라가며 이것저것 물어왔다.


사진 찍은 건 없나? 티비로 보긴혀도 그, 니콧치니까 말여.”

지쳤어

에리치? 에리치?”


노조미는 곧장 침대에 쓰러지는 에리를 계속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4. □□□의 산책

 

고양이씨, 고양이씨, 들어보레이.”


한낮이라도 덥지는 않으니 담에 앉아 옆에서 볕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씨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두 발은 번갈아가며 휘휘 허공을 차고 있었다. 고양이씨는 명백히 한 귀로 말을 흘리고 있는 표정으로 엎드려 귀 한쪽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란 걸 이해 못하는 건 아니레이.”


에리치가 몇 번을 불러도 응응, 건성으로만 대답하더니, ‘자꾸 그럼 확 나가버린데이!’하는데도 .’이라고 대답해버리는 바람에 홧김에 집에서 나와버렸다. 조금 움직이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으니 작은 그늘에서 쉬고 있는 고양이씨가 보여 멈추었다.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고양이씨는 하품을 하는가 싶더니 몸을 일으켜 움직였다. 너무 시끄러웠을까. 일단은 멀어지는 꼬리에 대고 인사를 건네보았다.


들어줘서 고맙데이.”

 

***

 

종종 외출은 한다지만 혼자 거리에 나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딜 갈까 하고 정해둔 곳은 없었다. 고양이씨를 보내며 담벼락 위를 걸어 그 뒤를 조금 따라갔다. 그러다 고양이씨가 훌쩍 뛰어 담을 내려갈 때 옆에 나비 한 마리가 지나 이번에는 그 뒤를 따라 보았다.


얼마나 움직였더라. 정확한 시간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상가 쪽 까지 나와버린 모양이었다. 옆에는 얼마 전 에리와 함께 나왔을 때 보았던 건물이었다. 그때는 한참 공사 중이던가 싶더니 거의 마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문은 열기 전, 커다란 유리창 한 면은 전부 검은 천에 가려 날짜 하나만 쓰여있었다. 그 덕에 가만히 들여보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아이들 몇이 밑으로 우르르 지나갔다. 하나는 모자를 쓰고 가장 크고 제일 앞장서서 달려가는 것이 대장 같은 폼이었고, 그 뒤로 고만고만 전부 다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으니 내 옆으로 누구 하나가 잠시 멈추어서 머리를 매만지고 가기도 했다. 그러다 얼핏 눈에 익은 얼굴이 앞으로 스쳐 지나가 홱 고개를 돌려보니 고등학교 때 보았던 모습이 남아있었다. 잘 지내고 있구나. 그 길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유리 안에 그 많은 모습들이 있는데, 거기 나는 없었다.


나는 나를 에리치를 통해서 보아왔다. 이제 스물둘. 에리치의 모습은 조금씩 변했다. 화장을 하기 시작하고, 옷차림이 자리에 맞게 변하고 표정이, 말투가 아주 조금씩이라지만, 변했다.


그리고 열어덟. 나는 변하지 않는다.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에리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불렀단 것에 착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길에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어 그제야 깜짝 놀라버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봐 찬찬히 날 부른 사람을 보니, 어릴 적에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내가 보이나.’


이렇게 되어버리기 전에. 뮤즈를 만나기도 전에. 에리치를 만나기 그 이전에. 혼자였을 무렵에,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전부 까만 모습에 까마귀 아저씨라고 혼자 기억에 담았다. 아저씨는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곤 말했다.


너는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선택했어요.”


나는 웃었다.






5. 그날 밤

 

노조미!”


술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지만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귀가가 늦어진다 싶더니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에리는 술에 만취해있었다. 집은 혼자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문을 잡은 채로 꿈지락꿈지락 신발을 벗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때마다 노조미는 움찔움찔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 나갈 뻔하며 에리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에리는 허리를 똑바로 펴질 못하고 얼굴은 잔뜩 붉어진 채로 슬쩍 노조미를 올려보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배시시 눈을 휘며 웃어 보인다.


에리.”


그러다 결국은 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집 안쪽으로 엎드려버렸다. 노조미는 그렇게 길게 엎으려 누워버린 에리의 옆에 쭈그려 앉아 귓가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에리치.”


대답은 없었다. 괜히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시늉을 해보았다.


술이 그렇게 좋나?”


아무 반응이 없던 에리가 노조미의 물음에 갑자기 몸을 반대로 뒤집으며 답을 해왔다.


그러엄.”

에리치 니.”

노조미.”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양 두 팔을 뻗어왔다. 붉어진 얼굴로 웃는 에리의 모습은 어딘지 어린아이 같았다. 에리는 계속 현관에 발을 둔 채로 누워 두 눈을 감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노조미. 노조미. 노조미.”

듣고있데이.”

있지 노조미.”

~?”

네가 죽는 꿈을 꿨어.”

.”


에리는 이내 바닥을 짚으며 상체만 일으켜 노조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노조미. 키스해도 될까?”


노조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리는 천천히 다가가 노조미의 입술이 있을 곳에 입을 맞췄다. 손을 뻗어 노조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조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조금씩 내려가 뺨을 스치고 어깨 즈음에서 떨어졌다.


에리는 안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에리치.”

.”

사랑해.”

.”

죽을만큼.”


숨을 삼켰다.


.”

 

***


노조미는 그렇게 어물쩍 늦게 귀가한 연인을 쉽게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에리치, 니 그거 아나?”


노조미의 목소리와 표정만으로도 무슨 말이 이어질지 에리는 어렴풋이 예상한 모양이었다. 바로 표정이 굳어지더니 에리는 일단 제 귀를 막고 보았다.


하지마. 노조미.”


딱딱히 굳은 목소리로 경고해 보았지만 능글맞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노조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느 나갔던 사이에 잠깐 방에 누가 놀러 왔던 것 같든데

아아아아아아.”

아직 남아있는건 아닌가 모르겠데이.”

노조미!”


귀를 막은 효과는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딱 에리치 앉은 그 옆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여. 허이야. 에리치, ! 옆에!”


밤 중에 때아닌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고맙네요. 덕분에 술은 다 깼어.”


실제로 침대 위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에리는 현관에 있을 때보다 정신이 맑아 진 것 같아 보였다. 생각보다 더 많이 놀랐는지 삐진 모습이 꽤나 오래가고 있었다. 퉁명스레 툴툴대는 에리의 모습에 노조미는 머쓱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근디 따지고 보면 내도 그런 긴데 말여.”


말꼬리를 흐리다 퍼뜩 표정이 바뀌어 두 손을 흔들었다.


미안타. 어쩔 수 없는 건데. 쓸데없는 말을 했네.”


에리는 노조미를 가만히 바라보다 안고 있던 베개를 옆에 내려두고 손짓을 하며 그녀를 불렀다


잠깐 이쪽으로 와주겠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노조미는 순순히 에리쪽으로 다가갔다.


그거 알아, 노조미?”


에리가 한쪽에 미뤄져 있던 이불을 잡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크게 에둘러 덮었다. 작은 동굴을 만들어, 어린아이들의 비밀기지 같은 모양이 되었다. 두 사람은 그 안에서 이마를 맞대고 마주했다. 에리는 두 손으로 위를 받쳐 공간을 만든 채로 노조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고, 한음한음 또박또박 그녀에게 전했다.


노조미는 언제나 빛이 나고 있어.”


어두운 이불 아래에서 에리는 노조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빛은 새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새어 나가고 있었다. 노조미의 빛은 그녀를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다. 노조미는 에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에리 또한 그동안 노조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봐왔다. 에리는 그것을 노조미에게 전했다.


에리의 눈동자를 통해 노조미 자신이 보였다.


긴 꿈일지 모른다. 그때의 그 순간에 멈추어서 '노조미'라고 불리던 그림자가 꾸는 꿈. 깨기 싫어 억지로 이어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내일도 계속될 꿈에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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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6. 12. 23. 17:35

. 삑삑삑삑. 익숙한 박자로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는 역시나 언제나처럼 중간에 한 번 멈췄다. 삑삑. 아직도 못 외웠나. 니코가 속으로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뒤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에리의 언제나와 같은 '다녀왔습니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보던 인터넷 창을 껐고 잠시 마우스가 멈추는가 싶었지만, 이내 니코는 돌아보지 않고 다시 새 인터넷 창을 열었다. 팬페이지 링크와 동영상 사이트 링크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마우스는 선택을 마치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온 에리의 목소리에 붙잡혀버렸다.


"다녀왔습니다."


니코는 돌아보지 않고 폴더를 열어 자료함을 뒤적이며 답했다.


"왔어?"

"오늘 춥더라."

"."


대화 사이 잠깐의 공백은 코트를 벗어 걸어놓는 소리와 딸각 이는 마우스 소리로 채워졌다.


"이제 좀 있으면 코트로 안 되겠어."

"."

"! 오늘 갔던 카페 괜찮더라. 다음엔 같이 가자."

"그래."

"노조미가 안부 전해달래."


인터넷 창을 끄고 바탕화면에서 방황하던 마우스는 다시 인터넷 아이콘을 향했다.


"그래."


건조하게 이어지는 대답에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에리는 니코의 옆으로 서서는 책상 위에 비닐봉지를 올려두며 말했다.


". 하겐다즈."

"니코가 엄청엄~청 기다린 거 알지?"


니코가 그제야 돌아보자 에리의 얼굴엔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활짝 웃던 니코도 순간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뭔데 그 표정은?"

"아니. 진지하게 귀엽다고 느껴져서 나 괜찮은 걸까 싶어서."


곧장 주먹이 에리를 향해 날아왔다. 힘껏 쥐고 힘껏 휘두른 주먹은 제대로 들어가 꽂혔다. 아야야. 에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니코가 친 팔을 문질렀다. 그러다 또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노조미도 보고 싶다고 했고."

"……. 아니다. 니코는 너희같이 이상한 애들이랑 달라서."


니코는 더 할 말이 없다고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자르고 다시 의자를 돌려 컴퓨터를 향하려 했다. 그런 니코의 팔을 붙잡고 다시 돌려놓으며 에리는 곧장 니코에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니코를 헤집어 놓고 떨어지며 에리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러면 나는 노조미랑 간접 키스한 셈인가?"


곧장 명치를 향해 뻗어오는 주먹을 에리는 반사적으로 붙잡았다이내 바로 놓아주며 항복의 표시 마냥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해. 심술이 심했어."

"멍청이가."

"정말 미안해."


니코는 대답 없이 홱 의자를 돌려 다시 모니터를 향했다. 니코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 미안."


그런 니코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더니 에리는 말 한마디만 남겨두고 방을 나갔다. 에리가 나가고 나서야 니코는 에리가 책상 위에 올리고 나간 비닐봉지를 뒤적여 아이스크림의 뚜껑을 화풀이 대상인 양 뜯어냈다. 그리고 니코는 작은 플라스틱 수저를 입에 물곤 중얼거렸다.


"말차맛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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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6. 12. 12. 01:15

왜 울고 있는 거야, 마키쨩?

한숨을 내쉰다.
가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어.

문이 닫혔다. 마키는 혼자 울고 있었다. 소매로 눈물을 훔쳐보지만 금세 다시 넘쳐버려 아무 소용 없었다. 눈만 붉게 달아올라 연한 살이 쓰리고 매워질 뿐이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려 앉아서는 손에 잡히는 원피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하지만 해결할 방법은커녕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삐- 삐- 작게 귀에 맴도는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작은 몸에 본인은 무엇인지도 몰랐던 것이 숨을 쉬기가 벅찰 정도로 들어찼다. 숨을 몰아쉬면서 점점 커지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몸을 있는 대로 움츠리고, 호흡을 잊어 간간이 터져 나오는 숨을 격하게 몰아쉰다. 금방이라도 그렇게 무언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삐- 귀에 아른거리던 소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마키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떠나지 않고 귀를 파고들었다. 감고 있던 눈꺼풀을 더 강하게 꾸욱 눌렀다. 한계다.

삐--.

마키는 눈을 떴다. 울어대는 핸드폰을 열어 기계적으로 알람을 껐다. 다시 감기려는 눈을 힘겹게 떠서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10시를 조금 넘겨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알람은 꽤 오래 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체를 일으킨다. 좁은 커튼 사이로는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아직 불을 켜지 않은 방을 조금이나마 밝히고 있었다. 마키는 가만히 눈을 깜박깜박 천천히 감았다 떠 보았다. 다시 눕고 싶다. 실제로 그녀의 어깨는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이른 시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주말인데 조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며 마키는 자신 안에서 들리는 유혹의 소리에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은 저항해보지만, 그 결과가 매번 패배였음을 마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내려가던 어깨가 베개에 닿았을 때, 진동이 울렸다. 짧게 울리고 끝나는 것을 보아하니 문자가 온 모양이었다.

귀찮아. 싫은데….

아예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묻어버리고 애써 외면하고 있자니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한번은 무시했지만 두 번째에 또 곧장 이어 울리는 세 번째 진동음에 이르러서는 마키도 별수 없이 슬렁슬렁 뒤집혀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이름에 그제야 잠이 깼다.



마키는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면서 문이 닫히기 직전에 다시 벌컥 열어젖혔다. 급하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만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손에 휴대전화가 들려있었다. 현관 앞에 멈춰 서서 빠르게 손가락으로 패드 위를 움직여 문자 하나를 보내두었다.

<지금 나가>

이제 막 보낸 문자를 받을 상대도, 아침부터 마키의 잠을 깨운 문자의 주인도 우미였다. 세 번에 나눠 온 장문의 메세지였지만 요약하자면 오늘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시작한 문자는 거듭 사과를 반복했다.

<이렇게 당일이 되어서 급한 연락을 받게 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라며 끝을 맺는 것을 보니, 마키는 딱딱한 우미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져 혼자 한참을 웃고 나서야 답장을 위해 휴대전화를 집어 들 수 있었다. 여러 마디를 썼다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하더니 겨우 보낸 답장은 한마디뿐이었다.

<지금 준비하고 나갈게>

그렇게 집을 나서 마키는 우미와 만나기로 한 카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꿈, 기분 나빴던 것 같은데. 멍하니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문득 생각이 났다. 일어나자마자는 아른거리며 남아있었던 꿈은 그사이 휘발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는 꿈이었다’라며 깨어서 생각했던 것만 남아있어 찝찝한 느낌이었다. 걸음도 멈추어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퍼뜩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왜 울고 있는 거야, 마키쨩?’

목소리를 따라 꿈의 끝자락이 끌려 나왔다. 마키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생각했다. 한숨. 왜 울고 있었지? 닫힌 문. 그리고 따라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은 방안에서 침대 위에 앉아, 손으로 까슬 거리는 레이스 자락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언제였더라. 생각하고 있자니 카페 간판이 눈에 띄었다. 어느새 목적지였다.




먼저 카페에 와 있던 우미는 웃으며 마키를 반겼다.

“이번 곡도 느낌이 좋던데요? 요즘 컨디션이 좋은가 봐요, 마키.”
“별로.”
“그런가요.”

둘이서만 만나는 것만 해도 벌써 수차례. 우미는 하하 웃으며 능숙하게 마키의 퉁명스런 말을 받아넘겼다.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던 마키가 슬쩍 다시 우미 쪽으로 시선을 향하니, 우미는 눈을 마주치곤 슬쩍 웃어 보였다. 얼굴이 달아올라 버렸다. 마키는 시선을 돌려버리며 괜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서 가사는?”
“아, 아! 그렇죠. 여기 있습니다.”

마키의 서투른 말 돌리기에도 우미는 그녀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주었다. 우미가 가방에서 꺼내 드는 투명한 파일은 마키가 몇 주 전 그녀에게 건넨 것이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음표마다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 쓴 가사가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을 닮아 그녀의 고지식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글씨는 지웠다 다시 쓴 흔적 하나 없이 정갈했다. 가장 앞 페이지부터 가사를 읽어나가는 마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 음이 따라붙어 노래가 되어 울렸다. 마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며 가사에 집중했고 우미는 그 건너에서 그녀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끝까지 가사를 따라간 후에야 마키는 손에 들고 있던 악보를 내려놓았다.

“괜찮은가요?”
“좋은데? 생각했던 그대로 가사가 된 것 같아. 역시 우미…. 대단하네.”
“최고의 칭찬이네요.”

가볍게 받는 우미였지만 마키의 이야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처음 우미가 그녀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주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매번 신기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따로 언질을 주거나 그녀의 생각을 전달한 것도 아닌데, 우미의 가사는 언제나 마키가 곡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을 그대로 글로 옮기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
“왜 그러시죠?”

묻혀있던 기억은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하니 한꺼번에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다. 어린 시절에 가끔씩 아무도 왜인지 알지 못해 답답해하는, 펑펑 울어버리는 날들이 있었다. 그 날도 같았다. 마키는 연주를 위해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그리고 연주 도중에 마키는 참을 수 없이 슬퍼졌다. 건반을 누르는 것이 힘들었고 어서 그 자리를 내려오고 싶었다. 자신이 만들어 제 귀로 돌아오는 소리가 가슴에 응어리져 스스로를 꾸욱 짖눌러 왔다. 간신히 끝낸 연주회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무대를 내려가 가장 먼저 가까이 다가오는 부모님께 매달려 울어버리고 싶었다. 진심을 담아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슬픔은 그대로 두려움이 되었다. 그 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두려움은 주변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키…?”

마키가 혼자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미안 오늘 할 일은 이걸로 끝인가?”
“네. 일단은….”
“그럼 가봐야겠네.”
“네. 그렇죠.”
“저기, 우미.”
“뭔가 할 말이 있으신가요?”

우미는 가만히 마키를 응시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마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둘 사이의 침묵 뒤에 마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아니야. 나 잠깐 있다 갈게. 먼저 가. 잘가!”

몰아치듯 마구 인사를 건네는 마키에게 떠밀려 한두마디 더 인사를 나눈 뒤 우미가 먼저 카페를 나섰다. 천천히 자리로 돌아와 마키 혼자 남은 자리에 한숨이 내려앉았다. 마키는 이야기를 나누며 늘어놓았던 악보를 하나하나 순서대로 모아 쥐었다, 그러다 힘이 풀린 손에서 악보들이 빠져나가 처음보다 더 엉망으로 흐트러져버렸다. 마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숙여 그 위에 슬그머니 엎드렸다. 악보 위에서 사랑을 하고, 선율을 따라 키스를 하고, 노랫말을 곱씹으며 홀로 이별한다. 그리고 다시 악보 위에서 사랑을 시작했다. 마키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우미가 나선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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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6. 5. 21. 23:31

그림자에 대하여

 

노조미의 자리는 창가 바로 옆이었다. 코트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놓고 자리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정면으로 보이는 시계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여섯 시, 그리고 분침은 삐걱대며 숫자 9를 향해가고 있었다. 교실 시계가 평소 3분 정도가 빨랐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노조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을 만하네.

이유 없이 조금 일찍 눈이 떠지는 날, 어쩐지 준비도 평소보다 일찍 끝나버리는 그런 날이 있다. 바로 오늘이 노조미에게는 그렇게 하루가 조금 일찍 시작되어버린 날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현관에 서 있으니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괜히 마음이 동해 그대로 일찍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당연하게도 평소보다는 훨씬 이른 시각. 교실에 노조미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다. 그렇게 혼자 창문 바로 옆에 앉아있자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창 너머로 향했다. 이른 시각에도 학생들은 한 명씩 띄엄띄엄 교문을 지나고 있었다. 교문 언저리에서 맴돌며 지나는 한명 한명을 세어 보더니 돌아온 시선은 그녀의 앞자리 책상을 향했다. 책상 위에 엎드리더니 슬쩍 눈동자만 시계를 올려보았다. 똑딱거리는 초침에 맞추어 손가락을 까딱이며 수를 세어본다. 하나. . . . 스물도 되지 않아 노조미는 다시 일어나며 오른손으로 턱을 괬다. 나 너무 참을성이 없는 건 아닐까. 자연스럽게 다시 창밖을 향해 돌아가는 자신의 고개에, 노조미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혼자서 등교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지만, 두셋씩 짝을 지어 교문을 넘는 이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와중에 이쪽저쪽을 오가는 노조미의 시선은 명백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보아도 찾는 이가 보이지 않자 이내 다시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노조미는 그대로 지나가려던 시선을 다시 돌려 자신의 오른손을 향했다. 정확히는 책상 위, 오른손의 새끼손가락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그것은 마치 노조미의 시선을 느낀 양 살랑거리며 슬쩍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노조미는 가만히 내려보더니 그것이 손목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가볍게 두어 번 손을 털었다. 가볍게 흩어지며 날아간 그것은 형체도, 무게도, 경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거기에 존재했다. 그것을 노조미는 그림자라 불렀다.

기억을 천천히 감아 올라간다. 뮤즈와 만난 날의 기억. 오토노키자카로 전학을 온 날의 기억.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어린 날에 내려보았던 발의 끝.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기 위해 발돋움을 했을 때.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은 어느 순간 뚝 끊어진다. 그 끝자락에도 그림자는 노조미의 곁에 있었다. 작은 손을 쥐락펴락할 때 그 위에서 그림자는 천천히 모여들었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살짝 서늘한 기분에 노조미는 그것을 퍽 재미있다 여겼다. 어린 노조미에게 그림자는 작은 친구와 다를 바 없었다

언제부터 그것을 그림자라 불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은 그림자로서 언제나 노조미의 옆에 존재했다. 오히려 언제부터 그것이 ‘보통의 그림자’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는가를 고민해본다. 아마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끼기 시작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림자를 가리키면 모두 같은 표정을 보였다. 초등학교의 담임선생님도, 부모님도, 친구들도.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의아해하던 그 표정은 이내 하나같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으응.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 표정이 두려워 노조미는 그 이상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해 보지 못했다. 그렇게 부정하고, 조금만 가만히 버티고 서있으면 금세 노조미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지고, 다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림자는 그렇게 혼자 멈추어 선 노조미를 천천히 감아 올라갔다.

‘그림자가 아니라면, 그럼 이건 뭐지?

그때 노조미는 처음으로 제 팔을 기어오르는 서늘한 감각이, 그림자가 무섭다고 느꼈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털어냈던 그림자가 다시 슬금슬금 노조미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씩 움직이다 노조미의 시선이 향하자 뚝 멈추어 선 것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쿡쿡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

반가운 목소리에 돌아보니 에리가 몸을 기대오고 있었다.

"에릿치! 언제 왔나?"

"방금?"

에리의 대답을 들으며 곁눈질로 돌아보았을 때 그림자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래서-"

에리는 슬쩍 노조미의 어깨 너머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야?"

당연하게도 에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가 이쪽저쪽을 탐색하더니 에리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에리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노조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혹시…. 그게 있는거야?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떠오른 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아니레이. 기냥 에릿치를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나서 말이여."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했을 때, 에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예상한 대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에리를 향해 노조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럼 우선 차례대로 자기소개라도 해볼까?

최악이다. 오늘 하루만 노조미가 같은 생각을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다만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의 다음에는 더 최악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 돌아왔다.

첫 등굣길이었다. 처음 가는 길은 아니었지만 낯설어 조금 헤매 버렸다. 덕분에 교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남은 자리는 가장 뒷자리 딱 하나뿐이었다. 남아있는 자리에 앉기 위해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낼 때 스스로에게 쏠린 시선에 노조미는 생각했다. 최악이다. 두 번째 최악도 금방 찾아왔다. 소름 끼치게 익숙한 서늘한 감각에 노조미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한동안 근처로 다가오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을 터였다. 왜 하필 오늘이지. 보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느끼지 말자.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최악의 상황으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하는 자기소개가 주어졌다.

와중에 등 뒤로 느껴지는 감각은 아래쪽에서 점점 위로 올라왔다.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노조미는 더 강하게 되뇌었다. 보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혼자 다른 세계로 점점 가라앉는 듯한 느낌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머리 위를 넘어 눈앞으로 그림자의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차례가 돌아와 노조미의 앞사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된 건가. 어떡하지. 지금 혹시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노조미는 혼자 생각에 잠겨 드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야세 에리라고 합니다.

순간 노조미는 앞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 흔들리지 않아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야 노조미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올려 본 시선 끝에 눈썹을 찌푸린 금발의 ‘아야세 에리’가 보였다. 그것이 노조미가 본 에리의 첫 모습이었다.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에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노조미는 한 몸에 온 교실의 시선을 받아버렸다. 하지만 그 시선들 가운데 에리와 눈이 마주쳐, 그 상황은 노조미에게 최악이 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에리는 교실에서 나가 버렸다. 내내 그녀를 신경 쓰고 있던 노조미는 당연히 에리가 문을 나서는 뒷모습 또한 보고 있었지만, 곧장 따라나서진 못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따라가야 해’가 맞았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떠오른 ‘왜?’는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누구의 것이었는지 모를 기억 속의 차게 가라앉은 눈도 스믈스믈 기어 나와 노조미를 붙잡았다. 그런 노조미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하지만’이었다.

결심하자마자 복도에 나와 좌우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에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노조미는 먼 곳에서부터 다시 모여드는 그림자를 느꼈다. 복도에 서 있는 몇몇이 이야기하는 와중에 들린 에리의 이름에 일단 무작정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 정도 뒤일까. 모여든 그림자는 노조미를 따라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다만 걸음은 조금 빨라졌다. 복도의 끝자락에 와서는 이미 거의 뛰는 것에 가까웠다. 그림자와의 거리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계단을 거의 날 것 마냥 뛰어 내려가다 우뚝 멈추었다. 노조미의 등 바로 뒤까지 뻗어 온 그림자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뛰어 내려온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노조미는 에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저기!

“넌 누구야?

에리가 돌아보는 시선과 함께 노조미의 등 뒤로 몰려오던 그림자는 일순간에 흩어졌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분명하게 노조미는 에리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나…”

노조미는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어버렸다.

“내는 토죠 노조미!

***

 

“노조미!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에리의 표정에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가 뒤따를 것이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조금은 그녀를 경험하게 된 노조미는 달랐다.

“나, 파르페란 걸 먹어보고 싶어.

덕분에 노조미는 이어지는 이야기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에리는 의아할 정도로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이런 상황은 노조미에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해보지 못한 일들을 노조미이기에 넌지시 청해오는 것이 그녀로서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여가 괜찮다카더라.

귀갓길에는 이미 노조미가 두 사람의 목적지를 정해두었다. 의외로 이런 부분에 서툰 에리 탓에 대부분의 준비는 노조미의 몫이었다. 노조미가 핸드폰 화면을 내밀며 이야기하면, 에리는 감탄하며 그녀를 따랐다. 그런 식으로 몇 번씩이나 둘이서 처음 찾는 길을 지났다. 그 좁은 골목길도 그중 하나였다.

두 사람이 지나기에는 길이 좁아 에리가 앞서가고 노조미가 그 바로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노조미의 발걸음이 늦어졌다.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노조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왜 지금’이었다. 지금까지는 에리와 함께 있으면 괜찮았을 터였다. 느려지던 걸음은 아예 멈춰버렸다.

“노조미?

돌아보는 에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노조미는 자신의 시선이 그녀를 지나쳐 그 뒤를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에리의 등 뒤로 그림자가 밀려오고 있었다. 크다. 한번 옮겨간 시선은 거기에 박혀버렸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림자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단지 가까워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노조미로서는 그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왜 그래? 괜찮아?

바로 뒤. 뒷걸음질 칠 수 없었다. 에리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노조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는 위에서부터 천천히 에리를 삼켜 들어갔다.

“괜찮은 거야?

이미 그림자가 에리의 얼굴의 반을 삼켜 노조미는 그녀의 입이 움직이는 모양만 볼 수 있었다. 에리가 무언가 말했다. 귀로 들리는 목소리와 입이 움직이는 모양, 모두 듣고 또 보고 있지만, 그 뜻이 머릿속에 들어 오지 않았다.

‘나 지금 제대로 웃고 있나?

목을 지나쳐, 가슴께, 허리, 에리의 온 몸이 그림자 안에 갇혔다. 노조미는 그 순간, 그 장소에 혼자였다.

“노조미!

그림자 안에서 뻗어 나온 손이 굳어 있던 노조미의 팔을 낚아챘다.

“듣고 있어? 나는 어두운 걸 싫어해.

에리의 손이 나온 곳을 중심으로, 그림자가 걷혔다.

“아니, 사실 무서워해. 나한텐 이게 아무한테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치만.

에리 자신도 당황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노조미에겐 분명히 전해지고 있었다. 노조미는 제 팔의 떨림이 멎는 것으로, 스스로가 떨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림자는 모두 걷혔다. 노조미는 에리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노조미는 머지않아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에리에게 웃어줄 수 있었다.

 

 

 

 

16.5.21. 어나더스테이지

Present by hon_u

http://kartene.tistory.com/

@kjan_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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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6. 4. 15. 10:02

두 사람에겐 익숙한 공원 한구석 벤치에 앉아있자니, 우미에게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새삼 오른편을 돌아보니 에리가 기억 속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눈을 마주쳐왔다.


"왜그래, 우미?"
"아뇨. 그러고보니 저희, 첫만남은 서로 별로 좋지 못했지 싶어서요."


바로 동의를 할 줄 알았던 에리의 표정에 떠오른 것은 의문이었다. 이내 그 표정은 혼자 뭘 고민하는지 인상으로 변했다. 그런 에리의 반응에 우미가 자신이 뭔가 잘못 말한 것 일까 걱정하며 입을 떼려는 순간, 에리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며 이야기했다.


"아! 그렇구나. 그랬지. 그랬어."
"네?"


에리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지를 연발하더니만, 이야기를 뚝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우미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럼 다시할까?"
"네?"


우미는 에리의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뵙겠습니다. 아야세 에리라고 해요. 첫 눈에 반했습니다만  교재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더더욱 따라갈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러시아식 농담인가요. 무표정하게 중얼거리는 우미의 목소리에 금방 지어낸 울상으로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어놓는 것을 보며, 우미는 새삼스레 에리가 많이도 변했다고여겼다.


"아무튼 이상한 얘기는 그만하죠.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그거 마키쨩의 흉내야? 별로 안닮았는데..."
"아닙니다!"


우미는 슬슬 시간이다 싶어, 짐을 챙겨 들고 일어서려했다. 옷자락을 붙드는 손길에 멈추어 돌아보니 에리가 차분해진 표정으로 우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우미. 우리 첫만남이 언제라고 기억해?"
"네?"
"힌트는 여기까지. 자, 자. 가자. 추워지네."
"네? 아니. 잠시만요 에리. 무슨 얘길."
"자~ 늦게까지 밖에 있으면 감기 걸린다고요."


에리는 머뭇머뭇 계속 자기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라는 우미를 뒤로하고 먼저 앞서나가 버렸다.


안녕하세요. 소노다 우미입니다.


기억해내준다면, 작은 심술은 그때 사과하겠노라 생각하면서 그녀가 보지 못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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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6. 1. 9. 01:11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슬쩍슬쩍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다. 끼리끼리 모여 저마다 수근대는 이야기에 제 이름, 아야세 에리가 빠지지 않는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홀의 들뜬 분위기에 한가운데 그녀가 있고, 흘의 모두가 그녀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다. 천천히 물러나 시선들을 피해보니 발뒷굼치에 구석의 벽이 닿는다. 처음으로 홀 전체를 훑어 보았다. 한쪽 벽에서 부터 시작해 홀의 중심으로. 그리고 다시 반대쪽 벽을 향했을 때 테라스를 향해 난 창 너머로 달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달은 아직 다 차지 않았다.

'내랑 내기나 할까?'

달의 반이 채 차기도 전에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에리는 천천히 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밤공기가 싸늘해질 계절이었다. 파티용 복장은 밤산책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몸이 차게 식는 것을 느꼈지만 걸음을 돌리진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하나. 그리고 그 뒤로 안쪽에서 저들끼리 재잘대는 소리가 뒤따른다. 간격은 점점 멀어졌다. 느린 걸음이라도 상관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하나. 재잘대는 소리가 뒤따른다. 그 뒤로 다시 발걸음 소리가 하나. 두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달음박질을 쳐 오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그리고 조금씩 가까워 오고 있었다. 에리는 소리를 들으며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않은 한걸음 다시 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바로 뒤. 에리는 웃으며 뒤를 돌아 보았다.

"따라와줄 줄 알았어, 노조미."

노조미의 뒤로 아직 다 차지 않은 달이 보였다.

"내 완전히 들켜버린거가? 아아. 에릿치는 못당해버리겠고만."

"그렇게 발소리를 크게 내면서 모르길 바란거야?"

"그럼 진작에 아는척을 하지 않고..."

노조미가 입술을 비죽 내미는 것을 가만 두고, 에리는 다시 뒤를 돌았다. 그리고 노조미를 등진 채로 입을 열었다.

"노조미."

이름만 불러두고 잠시 멈춘 후에 말을 계속 잇기 전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크게 내쉰다.

"에릿치?"

"고마워."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에리는 말을 이어갔다.

"전부 네 덕분이야. 고마워."

노조미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친구는 지금 제 표정을 감추려 등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로, 고마워."

노조미는 지금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 등을 안아줄듯 두 팔을 벌리며 한발 더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다시 뒤를 돌아보는 에리의 손에는 노조미의 심장을 향하는 칼날이 쥐여있었다.

"에...릿치?"

"손을 내려줘, 노조미. 내가 이겼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우리가 했던 내기 말이야. 달이 아직 차기 전에 마녀를 찾았잖아."

에리는 웃었다.

"노조미, 네가 날 죽일 마녀야."

그리고 에리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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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5. 5. 8. 11:31

#멘션온캐릭터X자신이좋아하는노래로연성

해시태그로 린을 받아 좋아하는 노래 가을방학(가을방학)을 들으면서 쓴 글입니다.


-


“자, 마키쨩 차례다냐!”


린이 두 손을 들어 마키를 향해 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동시에 린과 하나요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마키는 주춤 조금 물러서며 대꾸했다. 책상 하나를 셋이 둘러 앉아 머리를 맞댄 상황에서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당황해 반사적으로 익숙한 행동이 튀어나와버린 것이었다.


“나는 별로.”

“하아? 마키쨩은 우리랑 얘기하는 게 싫은걸까나~.”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그럼 우리에겐 딱히 궁금한 게 없단 뜻? 실망이다냐.”


눈을 가늘게 뜨며 놀리듯 말을 이어가는 린의 태도에 발끈해 마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버렸다. 린도, 그런 마키 자신도 당황해 서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자, 마키쨩. 뭐라도 괜찮으니까.”


미묘한 대치상황은 하나요의 중재로 끝났다. 물러나질 못하는 두 사람을 떼어놓은 것은 언제나 하나요의  말 한마디였다. 마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분위기를 바꾸고는 말했다.


“그럼 린에게,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


생각할 시간 조금도 갖지 않고 린은 발표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번쩍 들며 답햇다.


“의외네.”

“응?”


마키가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을 린은 흘리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린은 왠지 여름이라는 이미지가 있으니까.”

“아. 알것같아 그거.”

“그렇지?”


서로 마주 보고 웃는 마키와 하나요를 보며, 린은 괜히 두손으로 책상을 짚고 쭈그러들어서는 입을 내밀고 왠지 바보 취급 하는 것 같다며 중얼거렸다. 고개와 두 손을 같이 흔들어가며 그런 거 아니라고 힘껏 부정하는 하나요와 괜히 새침하게 팔짱을 끼며 고개만 슬쩍 돌리는 마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책상을 밀며 몸을 일으켜 ‘다음은 하나요!’를 외치는 린. 세사람은 종종 부활동이 끝난 늦은 시각 셋만 남은 교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슷한 듯 다른 이야기들은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특별히 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흘러가고 어딘가에 쌓인 기억들이었다.


“가을이었지?”

“응?”

“린이 좋아하는 계절 말이야.”


누군가 그렇게 들춰내지 않으면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를 그런 기억이었다.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아.”


슬쩍 웃고 마는 린의 반응은 꽤나 길어진 머리 때문에 달라진 인상만큼이나 다른 반응이었다.


“린은, 여름이라는 인상이 있었으니까.”

“그랬지.”


그랬지. 한번 더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입술을 떼었다, 다시 닫고,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웃으며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


자신을 돌아보며 눈을 치켜뜨는 상대방에게 린은 웃으며 덧붙였다.


“가을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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