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다시 볼 것처럼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던 요우는 한참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조만 간은 삼 년이 됐고, 요우는 여전한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바로 어제 만났던 마냥 ‘안녕, 리코쨩!’의 뒤로 멋쩍게 웃으며 ‘삼 년만이던가?’가 따라왔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동창과 저녁 식사 후 술 한잔을 나누는 시간. 가볍게 한잔을 넘기며 근황을 나누고, 찾아온 잠깐의 침묵. 시선을 한 바퀴 돌리다 잔을 들어 맥주 한 모금을 삼킨다. 너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옛 추억 이야기들이 나올 타이밍에 리코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때 기억나?"


아니나 다를까 요우가 운이 띄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던가? 그게 쉬우면. 리코는 입술을 씹으며 생각을 삼키고, 미소를 지었다.


"그때? 언제?"

"그- 있잖아. 리코쨩이 도와줬을 때."


요우는 멋쩍게 웃으며 손에 쥔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고 들었다 놓았다. 요우는 그렇게 '추억 이야기'의 서두를 끌어냈다.



전화 너머로 요우가 울었던 날. 그날에 요우는 치카와 혼자만의 화해를 했다며, 나중에야 리코에게 후련해진 표정으로 어서 오라는 이야기와 함께 전해왔다. 두 번째로 요우가 운 날은 수화기 너머가 아닌 리코의 앞에서였다. 그날 요우는 혼자서 치카와 이별했다. 치카의 앞에서 울지 못했던 요우는 리코를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울음도 자기가 삼키는 요우를 바라보다, 리코는 제안했다. 거짓말을 했다.


“한번 흉내라도 내볼까? 기분 전환 겸, 말이야.”


평소의 요우였다면 당황해 거절했을, 애초에 평소의 리코라면 제안하지도 않았을 이야기였다.


"나도 참 바보 같았지? 그때 정신 차리게 도와주느라 정말 고생했어, 리코쨩."


리코는 쓴웃음을 감추기 위해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요우는 더 입을 열다 말고, 자신의 잔 입구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더니, 리코가 다시 잔을 내려놓고야 말했다. 수줍은, 어딘지 고등학교 2학년의 요우와 닮은 미소와 함께.


"리코쨩을 좋아하게 됐다면 좋았을 텐데."


적당히 늦고 어두워져 자연스럽게 자리를 정리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은 조만 간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요우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이야 어둑했지만, 가로등은 밝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처럼, 리코는 왠지 발걸음 옮기는 행동 하나도 어색하다 느꼈다.


“그렇네.”


자기 목소리로 내뱉는 말도 어쩐지 어색하게 귀로 돌아왔다.


"요우쨩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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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고싶은 소재나 상황
  • 모든 것의 첫번째 (ex첫친구, 첫키스, 첫 애인 등 모든 경험의 처음)






첫 번째. 네가 내 모든 것의 첫 번째였다.


“자. 다이아.”


작은 개울의 돌다리 너머에서 자신에게 내미는 카난의 손에 어쩐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기시감일까. 스스로 알 수 없는 위화감에 기다리고 있는 손을 바로 잡지 못했다. 잠깐이었지만 무언가 걸리는 느낌을 스쳐 보내지 못했다.


“다이아?”


재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손을 내려보고 있던 시선을 올려보니 카난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아차 싶어 우선 손을 맞잡았다. 하하.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가볍게 넘어가며 카난은 다이아의 손을 이끌었다. 여차. 다이아는 끌어주는 손에 의지해 개울을 건너고 가볍게 치마를 털어내고 복장을 정돈했다.


“그럼 갈까?”

“네. 이동하죠.”


산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은 나란히 걸을 수 없었고, 다이아는 자연히 먼저 앞서가는 카난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 뒤를 따르다, 계속 보게 되는 뒷모습에 왠지 모를 기시감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아. 그리고 다이아는 알았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왠지 이미 본 것 같은 모습. 당연하다. 다이아가 보는 것은 언제나 카난의 뒷모습이었다. 생각해보노라면, 카난은 언제나 다이아의 앞에 있었다.


쿠로사와, 맞지? 첫 만남에 먼저 손을 내민 것 역시 카난이었다. 집안의 건물 한 쪽에 기대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아무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작은 틈에, 한 명 말을 걸어온 것이 역시나 작은 어린아이였던 카난이었다. 하하. 그때에도 지금과 다를 것 없는 웃음으로 먼저 말을 걸어오는 카난은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 손을 내민 것이 다이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가족 이외의 누군가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카난이 처음이었다. 네가 좋아. 처음으로 들어본 고백은 끌어안은 채여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역시 카난이었다. 학생회 일을 핑계 삼아 단둘이 남은 교실에서의 첫 번째 입맞춤 역시 카난과 함께였다. 다이아의 모든 처음에 카난이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카난은 언제나 다이아보다 한발 앞에서 다이아에게 손을 내밀어왔다.


“-아. 다이아!”

“네, 네네네?”

“정말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 다섯 번쯤 불렀는데.”


무슨 생각-카난이 던진 한마디와 동시에 하던 생각이 문장이 되어 다이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이아는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붙잡고 구부정하니 얼굴을 묻었다.


“다이아? 어디 안 좋아? 괜찮아?


당연하게도 바로 다가와 몸을 낮추며 걱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를 건네는 카난의 반응에 더 얼굴을 깊게 묻었다. 귀가 뜨겁다. 들키고 싶지 않은 생각을 해버렸다. 치졸한 생각을 해버린 걸 카난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디 안 좋으면 내려가자. 부축해줄게. 힘들 것 같으면 기다릴래? 도와줄 사람을 불러올게.”


내 처음은 카난, 당신이에요. 카난의 처음은 내가 아니야?


“기다릴래? 대답하기 싫으면 고개만 끄덕여.”


다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앞에 같이 쭈그려 앉아 제 팔에 얹은 카난의 손을 반대쪽 손으로 붙잡으며, 고개를 들고 카난을 마주 봤다. 걱정 가득한 눈을 마주 보며 다이아는 부끄러워 털어놓고 싶지 않은 문장을 목 위로 끌어냈다. 한껏 걱정시켜놓고 겨우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항상 먼저 도와준 것에 괜한 생각을 한다고 염치없다 여기면 어쩌나. 걱정을 덮는 것은 또 다른 걱정이었다. 우선 카난은 다이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곱씹었다. 이해하고, 곧 카난은 다이아에 뒤지지 않을 만큼 귀 끝까지 새빨개졌다.


“내가 처음으로 또래의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건 거, 가끔씩 혼자 벽에 서 있는 귀여운 아이를 보고 며칠인가를 벼르고 했던 거였어.”


이번에는 카난이 제 뒷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고 싶은 일을 앞에 두고 웃는 다이아를 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어. 입을 맞추고 싶다고. 옆에 있고 싶다고. 그러니까-”


카난은 다시 고개를 들어 멍한 표정의 다이아를 마주 보며 웃었다.


“내 모든 처음이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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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7. 2. 23. 20:55

옥상으로. 에리는 계단을 오르며 제 치마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쪽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쓴 사람의 이름도 없이 그 네 글자뿐인 쪽지. 하지만 그것을 보자마자 에리에게 생긴 의문은 그 쪽지를 누가 썼는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눈에 익은 글씨에 한눈에도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있어 더 의아했다. 왜 굳이 쪽지를 남긴 것일까. 그것이 에리에게 떠오른 의문이었다. 두사람은 이미 교문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또한 직전까지 함께 있었으니 약속을 바꾸고 싶었다면 말로 전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의문들이 있었지만 사소한 것들이었다. 어깨를 들어올렸다 떨어뜨리더니 다시 계단을 올랐다. 궁금한 것들은 그녀에게 직접 물으면 될 일이었다. 옥상 문이 오늘따라 유독 무거워 몸을 힘껏 실어 열어제꼈다.


시야를 방해하는 햇빛이 사그라들며 바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난간 가까이에 서서 운동장 쪽을 내려보고 잇는 호노카에게 에리는 가볍게 다가가며 이름을 불렀다.


“호노카.”


때맞추어 불어온 바람이 하필이면 맞불어와 돌아 보는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놓았다. 눈을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발이 땅에 붙어버렸다. 무언가 다르다? 아니. 그건 아니었다. 분명 조금 전에도 보았던 호노카, 본인이었다.


“에리쨩.”


웃는 모습 역시 언제나의 호노카와 같았다. 호노카의 뒤로 흘러가는 구름이 반이 뚝 짤린 마냥 어긋나 있었다. 에리는 저도 모르게 눈으로 짝이 맞지 않는 구름의 끝을 쫓아 그 멀찍이에서 방황했다. 


“나. 지금 꼭 해야할 말이 있어.”


그녀의 말 끄트머리를 붙잡고 다시 그 입꼬리를 거쳐 눈으로 올라온다.


“에리쨩."


눈을 마주치고 호노카는 다시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 지금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


알 수 없는 위화감이었다. 나 지금 누구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지. 에리는 멍한 기분이 좀처럼 가시질 않아 머뭇거리며 물었다.


"호노카…지?"


그에 대한 답으로 호노카는 슬며시 웃어보였다.


"있지 에리쨩. 나는 에리쨩이 좋아. 에리쨩은 내가 좋아?"


어려울 것은 없는 질문이었다. 


"응."

"그럼 지금은 그걸로 좋아."




***



이상한 기분이 걸음을 늘어지게 해, 호노카가 먼저 내려가라며 등을 떠밀고도 한참 후에야 에리는 교문에 다다를 수 있었다.


"왜 이제야 나온거야!"


그리고 교문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것 또한 호노카였다.


"어? 호노카? 호노카야?"


왜 이제야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을까. 옥상의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이렇게 늦기까지하고 오늘 에리쨩 이상한데?"

"있지 호노카. 호노카는 내가 좋아?"

"응."


조금의 지체도 없이 호노카는 대답했다.


"그럼 지금은 그걸로 괜찮은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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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봄이다.


어떨까? 1년이야. 1년만 그렇게 해보자. 1년 전의 이곳에서 리코는 웃으며 요우에게 이야기했다.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 이야기에 이끌려 그렇게 1일째에 손을 끌어 맞잡는 온기를 느껴보기로 했다. 어색하지만 한껏 꾸미고, 또 꾸며낸 것이지만 나름대로 들뜬 마음으로 공원을 향했던 날이 이틀째였다. 거리를 거닐며 나누는 평범한 대화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포옹을 시도하는 요우의 뻣뻣한 동작에 리코는 웃으며 자신이 먼저 등 뒤로 두 손을 포갰다. 하루 종일 카페에서 둘이 같은 노래를 귀에 담은 것이 아마도 일주일 째 되던 날. 밤공기로 열을 식히며 긴 통화를 나눴던 것은 열흘째였을 것이다. 30일 즈음 되었을까. 그날에는 바다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함께 보았다. 백일째라고 작은 선물을 주고받은 것은 초여름의 일이었다. 가을의 어느 날에는 함께 일부러 낙엽을 밟으며 바스락 소리를 즐겼다.


그렇게 365일째의 오늘. 다시 봄이다. 분침이 점점 약속 시간으로 다가가는 것을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요우는 아직 못다 한 말을 헤아리고, 또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을 헤아리며 리코를 기다렸다. 아직은 봄이라기엔 너무 쌀쌀한 날이었다. 리코는 항상 약속 시간을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정확히 지켰다. 그러니 이제 곧. 요우는 아직 리코와 단둘이 한 번쯤 도쿄에 가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단 걸 기억했다. 세시. 약속한 시각이었다. 리코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아직 리코에게 아침을 만들어 준 적이 없었다. 아직 제대로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직, 아직 올해의 벚꽃을 보지 못했다.


요우쨩.”


세시 십분. 요우는 도착한 리코를 웃으며 맞았다. 괜찮아. 리코쨩도 같은 생각일 거야. 지난 1년간 그랬는걸. 그렇게 믿으며 요우는 지난 몇 분간 자기의 생각을 하나둘 풀어놓았다. 그리고 요우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던 리코는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요우가 입을 꾹 다문 후에야 입을 열었다.


“1년간 정말 좋은 시간이었지.”


리코는 그렇게 운을 떼며 요우가 앉은 벤치의 바로 옆에 털썩 앉았다. 다리를 조금 흔들며 잠시 말을 고르는 사이, 요우는 시선 둘 곳을 찾다 결국 두 사람의 사이에 놓아둔 제 손끝을 향했다.


나 요우쨩 덕분에 정말 행복했어. 정말이야. 그런데 있지 나 그런 생각도 해. 마지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만큼 행복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마지막을 상상하는데, 그리고 걱정하는데, 시간을 쓰지 않을 수 있었잖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돼, 요우쨩.”


그리고 안녕까지는 금방이었다. 혼자 남은 벤치에서 요우는 손끝이 빨개진 두 손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역시 봄이라기엔 아직 너무 쌀쌀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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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짧은 수신음과 함께 켜진 핸드폰의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리코는 읽던 책을 덮어 책장에 집어넣었다. 리코는 곧 의자에서 일어나 잠시 침대에 대충 걸쳐뒀던 외투를 집어 들고 전신 거울 앞에서 입으며 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고 나서야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읽었다.


<잠시 시간 괜찮아?>


리코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언제나와 같이 바닷가에서 만나 잠시 파도 자락을 아슬아슬 걷는다. 항상 앞장서는 쪽은 요우였다. 리코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요우의 등을 바라보았다. 리코가 자신의 그림자가 요우에게 닿을락 말락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요우가 웃으며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다음은.


"무슨 일 있어?"


언제나와 같이 넌지시 물었다.




와타나베 요우는 사쿠라우치 리코의 앞에서만 운다. 내가 요우에게 특별한 존재구나. 리코는 그것이 기뻤다. 기쁘고, 또 기뻤다. 조금씩 들뜬 기분들은 점점 뭉쳐 모였다. 그리고 묵직하게 리코에게 돌아왔다.

요우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일 때마다 어깨를 떨었다. 리코는 그런 요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리코..쨩."


와타나베 요우는 사쿠라우치 리코의 앞에서는 운다. 되돌아온 것은 더이상 기쁨이 아니었다. 맴도는 문장은 정리해내지 못해 혀끝을 넘지 못하고 흩어졌다. 왜. 그 하나만 남아서 리코는 그대로 토해냈다. 왜. 왜. 왜. 그 한마디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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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7. 1. 14. 23:01

1. 매일 아침

 

창은 머리맡 왼편에 조금 높이 나 있는 편이었다. 커튼도 쳐있지 않으니 햇살은 쉽게 창을 넘어 이미 작은 방에 한가득이었다. 노조미는 아직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방 주인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곤 슬쩍 창을 올려보았다. 빛이 내려앉는 사이로 먼지가 희뿌옇게 흐렸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동안, 백귀들이 재잘대는 마냥, 그렇게 저들밖에 없는 양. 노조미는 잠시 표정 없이 하얀 점들이 노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슬쩍 입꼬리만 올리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에리치, 일어나.”


그 잠시 사이에 소리 없이 일어나있는 상대방의 모습에 순간 노조미의 말문이 막혔다.


났구나.”

..”


잠이 덜 깬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에리는 상체만 일으킨 채로 침대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씩 내려가는 에리의 고개에 노조미는 쿡쿡 웃으며 그녀의 오른쪽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왼팔을 침대에 디디고 슬쩍 에리 쪽으로 기대오며 말했다.


그래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나?”

..”


이미 에리의 머리는 노조미의 어깨 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에리치이?”


더 가까이 다가가며 이름을 불러보니 색색 숨소리만 돌아왔다. 이제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와 끝이 흐려지던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몸을 슬쩍 틀어 아슬아슬, 닿지만 않을 위치에서 에리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꼭 닫은 눈꺼풀에 슬쩍 벌어진 입. 아무래도 에리가 저 혼자 일어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여기선 일단 한 발 물러서는게 좋겠지. 노조미는 여러 번의 경험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살짝 찡그리며 웃어 보이더니 우선은 몸을 뺐다.


에리는 눈은 감고 있었지만 자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조미의 이야기도 전부 듣고 있었다. 최소한 본인은 전부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눈도 몸도 단번에 일어나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조금만 천천히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어나레이, 에리치.”


노조미의 이야기도 다 듣고 있었다. . 일어났어. 재차 대답도 했다고, 에리 자신은 생각했다.


아침 먹어야 하지 않나? 곧 나가야 하고.”


재촉하는 소리는 조금씩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가로막힌 듯 탁해졌다.


늦으면.”


그렇게 작아지다, 사그라들었다. 그 작아진 소리에 외려 에리의 눈이 뜨였다. 어느새 자신이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었던 것도 에리는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불을 헤집으며 급히 일어나는 에리 때문에 침대가 크게 삐걱거렸다. . . 굴러떨어지듯 침대에서 내려왔지만, 아래층에는 사람이 없으니 큰 발소리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은 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문 바로 앞에는 식탁이 보였다. 노조미는 그 건너편에 앉아 괜히 싱글거리며 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손이 풀리며 문고리를 놓아주고 팔을 떨어뜨렸다. 그 잠깐 새에 기운이 빠져서는 에리는 터덜터덜 문밖으로 나왔다.


왜 그렇게 사람을 보면서 웃고 있어.”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는 에리에게 노조미는 계속 웃는 채로 손가락을 들어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리치 머리카락이 입에 들어가 있는 거 알고 있나?”

. 노조미!”


에리는 의자를 빼내며 툭툭 입가를 쳐냈다. 그렇게 에리가 머리를 정리하고 나서도 싱글거리는 노조미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식탁에는 이미 빵이 몇 개 들어있는 바구니가 내놓아 있었다. 노조미의 맞은편에 앉은 에리는 빵을 하나 집어 들어 반으로 쪼갰다. 그리곤 한쪽을 입으로 가져가며 다른 한쪽은 다시 바구니에 내려놓았다.


빵이 푸석해.”

불평하지 말레이.”,


네네. 에리는 건성으로 답하며 남은 빵조각을 마저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에리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노조미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웃고 있었다. 에리는 쿵쿵 발을 울리며 이 방 저 방을 바쁘게 오가더니 욕실에 들어갈 때쯤이 되어서는 거의 집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샤워를 하는지 물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함께 조금씩 노조미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굳어가던 표정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깨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욕실을 나서는 에리와 눈이 마주쳤을 땐 이미 노조미는 다시 웃고 있었다.


***


에리는 한발을 들어 구두의 뒷꿈치를 매만지곤 두어 번 발을 굴러 발을 편히 했다. 그리곤 쭈그려 앉아 남은 한쪽의 신을 신으며 노조미를 올려보았다.


슬슬 나가볼게.”


그런 에리에게 노조미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녀오레이.”

. 다녀올게.”


느릿느릿 현관에서 한참을 인사를 건네고, 문을 열고도 에리는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돌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노조미는 슬쩍 웃으며 에리에게 이야기해줄 뿐이었다.


기다릴테니께.”


에리는 문을 나서고, 노조미는 안에 남았다. 문이 닫히고,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노조미는 에리를 향해 흔들던 손을 내리고 웃음을 거뒀다. 그 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던 이후로 노조미가 에리를 기다리는 것은 두 사람에게 너무나 당연한 매일이 되었다.




2. □□□의 꿈

 

삼 년 전 봄, 내 토죠 노조미는 스쿨아이돌을 시작했데이.

'내까지 넣어서 아홉명인기라.'

삼 년 전 여름, 내 토죠 노조미는 아야세 에리와 교제를 시작했데이.

'실수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거 고백인걸? 대답해주겠어, 노조미?”

그리고 그해 겨울, 나 토죠 노조미는그만 교통사고로 거짓말처럼 죽어버렸다.

 

***

 

이런 기분이구나. 죽은 자신을 인지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단 차분한 과정이었다. '삶에 미련이 없다.'라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이렇게 된 순간에 알아버린 쪽에 가까웠다. 이런 시간을 가지게 된 것도 스피리츄얼 파워라고 장난스레 불렀던 그 힘에 도움을 받아, 일종의 보너스 스테이지에 온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슬픔에 미쳐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나의 장례식에 와있었다.


장례식장은 분주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꽤 많은 편인 것 같았다. 어릴 때의 나를 떠올려보면 힘냈다고 생각해도 괜찮은 것 아닐까.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며 여기저기 구경을 하며 돌아다녔다.


거기 거기. 꽉 잡야한데이. 풀어지잖나?”


들리지는 않겠지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붙이고 다녔다. 이렇게 되어서야 할 일도 없으니 있는 건 정말로 시간뿐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돌아다녀도 다른 사람들을 성가시게 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닿는 대로 여기저기를 떠다니다 순간 눈에 스친 모습에 급히 멈추어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니 많이 보고 싶었지만,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부모님 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마침 돌아본 쪽에 뮤즈 멤버들이 모여있는 것이 보여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후다닥 도망쳐 그쪽으로 날아갔다. 모두의 머리 위에서 손가락을 들어 수를 헤아려 보았다. 하나. . . . 다섯. 여섯. 일곱. 다 같이 식장에 들어올 때 슬쩍 보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한 명이 부족했다. 누가 없는지는 보자마자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니코쨩, 어제 다녀온 건.”

그 녀석 얘기는 하지도 마.”


가까이 가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구 얘기인지는 몰라도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니코의 모습에 그 옆에 슬쩍 앉아 얼굴을 붙였다.


너무하네 니콧치. 여 내 하루밖에 없는 날인디 그렇게 인상이나 쓰고. 얼굴 펴레이.”


웃으면서 괜히 손가락을 니코의 눈썹 사이에 가져가서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그러다 니코가 무거운 목소리로 잇는 말에 우뚝 멈추었던 것 같다.


아야세 에리. 그 멍청이는.”


직접 볼 수 없었으니 잘은 몰라도 내 표정도 같이 무서워지지 않았을까.


니코쨩.”

! 맞는 말이잖아. 그 녀석이 지금 여기 없는 게 말이 되냐고!”

니코.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우미의 지적에 니코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잘모르겠다. 니코의 이야기가 무슨 뜻일까. 에리가 왜 오지 않았을까. 니코는 왜 에리한테 찾아 갔던 걸까. 여러 생각은 모두 밖으로 나가면서 이어졌다.


에리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앞에 도착해 보니 집에 불이 꺼져있어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다른 곳에 있나? 많이 이르긴 하지만 혹시나 자고 있는 걸까. 자는 모습이라도 보고 나오고 싶을지도. 아니 그러고 보니 일단 마음대로 들어가 봐도 되는 걸까. 아무도 못 보니 다행이었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서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은 부끄러웠다. 이미 죽어버린 후라고 해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오히려 아무렴 어떤가 싶어져 버렸다.


어차피 보지도 못할 테고 말이여!”


밖에서 본 것처럼 안은 어두웠다. 역시나 인기척도 없는 것 같았다. 역시 에리치는 집에 없는 걸까. 혹시 모르니 여기까지 온 거 확인은 해보자는 생각에 조심스레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기웃거려본 주방이나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에리치의 방문 앞에서 다시 고민이 이어졌다. 여기 있을지도 모르잖아? 에리치의 방에 들어가는 게 실례아니, 이건 에리치가 걱정돼서니까! 이렇게 되었으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아주, 아주 아주 조금은 있었다. 결국, 아까보다는 짧은 고민의 시간을 거쳐 에리치의 방문을 넘었다.


실례합니다.”

노조미?”


한구석에 쭈그려 앉아 슬쩍 고개를 드는 에리치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모습과 많이 달랐다. 그래서 에리치가 내 이름을 부른 것에 놀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노조미다.”


에리치는 웃고 있었다.


노조미가 보여.”


자기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만 들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에리치가 ''를 보고 있었다. 그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다가가면서 손을 뻗고 있었다. 두 손을 있는 힘껏 뻗어 금방이라도 에리치를 안아줄 수 있을 것처럼. 에리치의 표정이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뒤에는 벽뿐인데 에리치는 뒤로 물러나려는 듯이 발을 굴렀다. 무서워하고 있어. ? 내 뒤에 뭔가 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봤을 때에야 나와 에리치의 시선이 조금 엇나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에리치의 시선은 조금 낮았다. 따라갔을 때, 공중에 떠 있는 내 맨발이 있어서, 그제야 새삼 알았다. 아차차. 나는 지금 여기 있을 수 없는 사람이구나.


미안하데이.”


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물러날 곳도 없이 도망치려 하는 에리치 대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줬다.


, 에리치한테는, 정말, 정말로 미안하데이.”


가는 게 좋겠지. 조금이라도 빠르게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쪽이 좋을 것 같아 바로 돌아섰다. 어서, 도망가자. 천장에 이마가 닿았을 때 즈음이었을까.


노조미!”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는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에리치는 일어서 두 팔을 하늘로 자기 머리 위로 뻗고 있었다. 겁을 내는 그 표정 그대로, 필사적으로 내게 손을 내밀어 주고 있었다.


에리치가 나를 보며 무서워하는 표정을 짓지 않게 되기까지 3일이 걸렸다. 에리치가 내게 말을 걸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에리치의 옆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불안해하는 표정을 짓지 않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내가 에리치에게 손을 뻗었기 때문에. 또 에리치가 나에게 손을 뻗었기 때문에. 그렇게 다음날이 되면 깨야 할 꿈이 삼 년째 계속되고 있다.

 





3. 어느 주말

 

여느 때의 주말보단 조금 이른 기상.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분주한 준비. 그녀에게 약속이 있다는 것이야 누구든 조금만 지켜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니코라는 것도 언제나 에리의 옆에 붙어있는 노조미에겐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에리치, 니 오늘 니콧치 만나러 가는거 아니가?”

아니.”

아니이?”


노조미가 말꼬리를 늘이며 에리의 말을 반복해 물어오자 자연스럽게 에리의 고개가 그녀의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노조미는 이미 전날 에리와 니코가 문자를 주고받는 것을 바로 옆에 붙어서 보고 있었다. 당연히 눈을 돌리며 노조미의 시선을 피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이 이상 거짓말을 하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에리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시인했다.


아니. 그래. 맞아.”

뭘 숨기려고 그러나? 거기 내도-!”

기각!”


에리는 노조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노조미의 말을 막아섰다. 그리고 노조미도 이에 질세라 에리의 손 옆으로 얼굴을 비집고 들어오며 맞섰다.


!”


그런 노조미에게 에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어왔다.


왜냐니. 기억 안 나는 거야? 호노카와 만났을 때?”

 

***


노조미, 얘기했던 건 기억하고 있는 거지?”

네네! 잘 기억하고 있데이.”


약속장소의 옆, 건물과 건물 사이 작은 공간에서 에리는 노조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주의를 주고,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잔뜩 들떠서 주변을 에리를 보지 않고 밖을 기웃거리며 건성으로 대답을 하는 노조미에게 크게 신뢰가 가질 않았다.


절대, 절대로 조심하는 거야.”


그리고도 노조미에게 두어 번을 더 확인을 받고 나서야 두 사람은 호노카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에리쨩! 여기여기!”

호노카쨩!”


그리고 에리는 호노카를 만나자마자 얼굴을 감싸 쥐어버리게 되었다. 호노카와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조미가 에리에게 같이 가고 싶단 이야기를 해왔다. 에리는 한참을 고민하다 호노카를 보고 싶어하는 노조미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혹시 모를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노조미에게 밖에선 조심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멀찍이서 손을 흔들고 있는 호노카의 얼굴을 보자마자, 에리의 옆에 있던 노조미는 날아서 호노카의 얼굴에 매달려 버렸다. 안되지, 안되지. 에리는 속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이대로 가만히 서있으면 호노카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란 생각에 일단은 비척비척 호노카쪽으로 갔다.


에리쨩?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니야.”


노조미는 뭐가 그리 좋은지 호노카의 옆에서 싱글벙글이었다. 슬쩍 그쪽을 노려보다 또 되었다 싶어져 우선 호노카를 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으로 끝이라면 에리도 더 따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만에 본 뮤즈 멤버였다. 그녀를 배려해줄 여유가 자신에게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한 번 정도야 미안한 마음과 함께, 조금 많이 들뜬 노조미를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 한 번으로 끝이었다면. 에리에겐 몹시 힘든 시간이었다. 호노카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내내 노조미는 호노카의 옆에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 하기도 했고, 호노카와 에리의 사이에 끼어들기도 했다. 웃음을 참느라 에리의 표정이 꿈틀거릴 때마다 호노카의 표정도 함께 의아하게 바뀌었다. 결국, 노조미가 호노카의 머리카락 사이로 슥 얼굴을 내밀었을 때는 참지 못하고 폭소가 터져버리기도 했다.


에리쨩, 안 좋은 곳이 있으면 병원에 가보는 쪽이 좋아.”


인사 끝에 묘한 표정을 지으며 호노카가 걱정스럽게 덧붙였을 때는 정말로 심란해져 버렸다.

 

***

 

에리는 고개를 슬쩍 돌리는 노조미에게 얼굴을 드밀며 한 번 더 강하게 물어보았다.


기억 안 나는 거야, 노조미?”

.”

 

***

 

결국 에리는 끝까지 매달리는 노조미를 떨쳐내고 혼자 카페에 도착했다. 오래 찾지 않아도 니코는 금방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을 위한 것 같은 의자의 한가운데에 등을 기대고 앉아 빨대를 입에 물고 있는 그녀는,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말이지.”


에리는 입구에 서서 슬쩍 굳었던 표정을 풀며 웃었다. 그리곤 일부러 맞은 편이 아닌 뒤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니코의 옆에 앉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우주 넘버원 아이돌 니코니인가요?”


옆쪽에서 어깨가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성공이네. 니코는 슬쩍 몸을 빼며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는 에리와 대조적으로 입꼬리가 내려가 있었다.


놀랐잖아.”


니코는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하며 한 손으로 슬쩍 선글라스를 내렸다. 미간에 자연스럽게 주름이 자리를 잡고 눈을 무섭게 뜬 것이 언제나의 니코와 같다고 에리는 생각해버렸다에리가 곁눈질로 슬쩍 테이블을 보니 니코가 시킨 음료는 아이스초코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에리, 근처에 홍보는 잘하고 있는 거지?”

하하하.”


에리는 시선을 피했다.


주문하고 올게. 나도 아이스초코가 먹고 싶어졌어.”


일어나는 에리의 등에 니코의 시선이 꽂혔다.


에리 잠깐만. 옷 뒤에.”

?”


니코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까치발을 들어 에리의 상의 뒤쪽에 달려있던 태그를 떼어주었다.


제대로 확인하라고. 새 옷인가 보네.”

, . 그러고 보니 사고 입었던 적이 없었네. 니코 앞에서 개시하게 됐는걸.”

흐응. 제법 잘 샀잖아.”

그치? 살 때 노조미도-”

?”


아차, 싶었다. 명백한 실수였다.


에리 너 설마 아직도-”


니코의 눈이 무서워져 버렸다. 에리가 노조미와 헤어지고 노조미와 다시 만나기까지의 사이의 시간에 몇 번씩이나 찾아왔던 니코였다. 닫혀있던 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와 에리를 끄집어내려고 가장 노력했던 것도 니코였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고. 깐만. 일단 갔다올게.”


에리는 니코의 시선에서 도망쳐버렸다. 다짜고짜 일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기계적으로 읊으면서 머리 속으로는 계속 생각 중이었다. 주문을 하고도 일부러 음료가 나올 때까지 그 옆에서 기다려, 받아 들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서 노조미 얘기는 뭔데?”


그 정도 시간을 끌었다고 호락호락 넘어가 줄 니코가 아니었다. 에리가 유리잔이 있는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자마자 다시 쏘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냥, 노조미도 이런 옷 좋아했으니까.”


카운터 옆에서 내내 머리 속으로 읊었던 대사를 그대로 늘어놓았다. 니코는 그런 에리를 빤히 추궁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에리쪽에서 가만히 마주 보니 이내 툭 던지듯 말을 내놓았다.


아아, . 그래.”


하아. 옆에 있던 쿠션을 끌어안으며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냥 그 정도 변명으로 넘어가 주겠다는 태도가 명백했다.


***

 

다녀왔어.”


에리의 힘이 빠진 인사에도 노조미는 곧장 다가왔다. 그리곤 쉴 새 없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땠어? 니콧치는 여전하나?”


에리는 응응, 건성으로 답하며 곧장 제 방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노조미는 계속 에리를 따라가며 이것저것 물어왔다.


사진 찍은 건 없나? 티비로 보긴혀도 그, 니콧치니까 말여.”

지쳤어

에리치? 에리치?”


노조미는 곧장 침대에 쓰러지는 에리를 계속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4. □□□의 산책

 

고양이씨, 고양이씨, 들어보레이.”


한낮이라도 덥지는 않으니 담에 앉아 옆에서 볕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씨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두 발은 번갈아가며 휘휘 허공을 차고 있었다. 고양이씨는 명백히 한 귀로 말을 흘리고 있는 표정으로 엎드려 귀 한쪽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란 걸 이해 못하는 건 아니레이.”


에리치가 몇 번을 불러도 응응, 건성으로만 대답하더니, ‘자꾸 그럼 확 나가버린데이!’하는데도 .’이라고 대답해버리는 바람에 홧김에 집에서 나와버렸다. 조금 움직이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으니 작은 그늘에서 쉬고 있는 고양이씨가 보여 멈추었다.


너무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고양이씨는 하품을 하는가 싶더니 몸을 일으켜 움직였다. 너무 시끄러웠을까. 일단은 멀어지는 꼬리에 대고 인사를 건네보았다.


들어줘서 고맙데이.”

 

***

 

종종 외출은 한다지만 혼자 거리에 나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딜 갈까 하고 정해둔 곳은 없었다. 고양이씨를 보내며 담벼락 위를 걸어 그 뒤를 조금 따라갔다. 그러다 고양이씨가 훌쩍 뛰어 담을 내려갈 때 옆에 나비 한 마리가 지나 이번에는 그 뒤를 따라 보았다.


얼마나 움직였더라. 정확한 시간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상가 쪽 까지 나와버린 모양이었다. 옆에는 얼마 전 에리와 함께 나왔을 때 보았던 건물이었다. 그때는 한참 공사 중이던가 싶더니 거의 마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문은 열기 전, 커다란 유리창 한 면은 전부 검은 천에 가려 날짜 하나만 쓰여있었다. 그 덕에 가만히 들여보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아이들 몇이 밑으로 우르르 지나갔다. 하나는 모자를 쓰고 가장 크고 제일 앞장서서 달려가는 것이 대장 같은 폼이었고, 그 뒤로 고만고만 전부 다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으니 내 옆으로 누구 하나가 잠시 멈추어서 머리를 매만지고 가기도 했다. 그러다 얼핏 눈에 익은 얼굴이 앞으로 스쳐 지나가 홱 고개를 돌려보니 고등학교 때 보았던 모습이 남아있었다. 잘 지내고 있구나. 그 길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유리 안에 그 많은 모습들이 있는데, 거기 나는 없었다.


나는 나를 에리치를 통해서 보아왔다. 이제 스물둘. 에리치의 모습은 조금씩 변했다. 화장을 하기 시작하고, 옷차림이 자리에 맞게 변하고 표정이, 말투가 아주 조금씩이라지만, 변했다.


그리고 열어덟. 나는 변하지 않는다.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에리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불렀단 것에 착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돌아보니 길에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어 그제야 깜짝 놀라버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봐 찬찬히 날 부른 사람을 보니, 어릴 적에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내가 보이나.’


이렇게 되어버리기 전에. 뮤즈를 만나기도 전에. 에리치를 만나기 그 이전에. 혼자였을 무렵에,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전부 까만 모습에 까마귀 아저씨라고 혼자 기억에 담았다. 아저씨는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곤 말했다.


너는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선택했어요.”


나는 웃었다.






5. 그날 밤

 

노조미!”


술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지만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귀가가 늦어진다 싶더니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에리는 술에 만취해있었다. 집은 혼자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문을 잡은 채로 꿈지락꿈지락 신발을 벗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때마다 노조미는 움찔움찔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 나갈 뻔하며 에리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에리는 허리를 똑바로 펴질 못하고 얼굴은 잔뜩 붉어진 채로 슬쩍 노조미를 올려보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배시시 눈을 휘며 웃어 보인다.


에리.”


그러다 결국은 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집 안쪽으로 엎드려버렸다. 노조미는 그렇게 길게 엎으려 누워버린 에리의 옆에 쭈그려 앉아 귓가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에리치.”


대답은 없었다. 괜히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시늉을 해보았다.


술이 그렇게 좋나?”


아무 반응이 없던 에리가 노조미의 물음에 갑자기 몸을 반대로 뒤집으며 답을 해왔다.


그러엄.”

에리치 니.”

노조미.”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양 두 팔을 뻗어왔다. 붉어진 얼굴로 웃는 에리의 모습은 어딘지 어린아이 같았다. 에리는 계속 현관에 발을 둔 채로 누워 두 눈을 감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노조미. 노조미. 노조미.”

듣고있데이.”

있지 노조미.”

~?”

네가 죽는 꿈을 꿨어.”

.”


에리는 이내 바닥을 짚으며 상체만 일으켜 노조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노조미. 키스해도 될까?”


노조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리는 천천히 다가가 노조미의 입술이 있을 곳에 입을 맞췄다. 손을 뻗어 노조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조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조금씩 내려가 뺨을 스치고 어깨 즈음에서 떨어졌다.


에리는 안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에리치.”

.”

사랑해.”

.”

죽을만큼.”


숨을 삼켰다.


.”

 

***


노조미는 그렇게 어물쩍 늦게 귀가한 연인을 쉽게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에리치, 니 그거 아나?”


노조미의 목소리와 표정만으로도 무슨 말이 이어질지 에리는 어렴풋이 예상한 모양이었다. 바로 표정이 굳어지더니 에리는 일단 제 귀를 막고 보았다.


하지마. 노조미.”


딱딱히 굳은 목소리로 경고해 보았지만 능글맞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노조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느 나갔던 사이에 잠깐 방에 누가 놀러 왔던 것 같든데

아아아아아아.”

아직 남아있는건 아닌가 모르겠데이.”

노조미!”


귀를 막은 효과는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딱 에리치 앉은 그 옆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여. 허이야. 에리치, ! 옆에!”


밤 중에 때아닌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고맙네요. 덕분에 술은 다 깼어.”


실제로 침대 위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에리는 현관에 있을 때보다 정신이 맑아 진 것 같아 보였다. 생각보다 더 많이 놀랐는지 삐진 모습이 꽤나 오래가고 있었다. 퉁명스레 툴툴대는 에리의 모습에 노조미는 머쓱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근디 따지고 보면 내도 그런 긴데 말여.”


말꼬리를 흐리다 퍼뜩 표정이 바뀌어 두 손을 흔들었다.


미안타. 어쩔 수 없는 건데. 쓸데없는 말을 했네.”


에리는 노조미를 가만히 바라보다 안고 있던 베개를 옆에 내려두고 손짓을 하며 그녀를 불렀다


잠깐 이쪽으로 와주겠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노조미는 순순히 에리쪽으로 다가갔다.


그거 알아, 노조미?”


에리가 한쪽에 미뤄져 있던 이불을 잡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크게 에둘러 덮었다. 작은 동굴을 만들어, 어린아이들의 비밀기지 같은 모양이 되었다. 두 사람은 그 안에서 이마를 맞대고 마주했다. 에리는 두 손으로 위를 받쳐 공간을 만든 채로 노조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고, 한음한음 또박또박 그녀에게 전했다.


노조미는 언제나 빛이 나고 있어.”


어두운 이불 아래에서 에리는 노조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빛은 새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새어 나가고 있었다. 노조미의 빛은 그녀를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다. 노조미는 에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에리 또한 그동안 노조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봐왔다. 에리는 그것을 노조미에게 전했다.


에리의 눈동자를 통해 노조미 자신이 보였다.


긴 꿈일지 모른다. 그때의 그 순간에 멈추어서 '노조미'라고 불리던 그림자가 꾸는 꿈. 깨기 싫어 억지로 이어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내일도 계속될 꿈에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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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6. 12. 23. 17:35

. 삑삑삑삑. 익숙한 박자로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는 역시나 언제나처럼 중간에 한 번 멈췄다. 삑삑. 아직도 못 외웠나. 니코가 속으로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뒤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에리의 언제나와 같은 '다녀왔습니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보던 인터넷 창을 껐고 잠시 마우스가 멈추는가 싶었지만, 이내 니코는 돌아보지 않고 다시 새 인터넷 창을 열었다. 팬페이지 링크와 동영상 사이트 링크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마우스는 선택을 마치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온 에리의 목소리에 붙잡혀버렸다.


"다녀왔습니다."


니코는 돌아보지 않고 폴더를 열어 자료함을 뒤적이며 답했다.


"왔어?"

"오늘 춥더라."

"."


대화 사이 잠깐의 공백은 코트를 벗어 걸어놓는 소리와 딸각 이는 마우스 소리로 채워졌다.


"이제 좀 있으면 코트로 안 되겠어."

"."

"! 오늘 갔던 카페 괜찮더라. 다음엔 같이 가자."

"그래."

"노조미가 안부 전해달래."


인터넷 창을 끄고 바탕화면에서 방황하던 마우스는 다시 인터넷 아이콘을 향했다.


"그래."


건조하게 이어지는 대답에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에리는 니코의 옆으로 서서는 책상 위에 비닐봉지를 올려두며 말했다.


". 하겐다즈."

"니코가 엄청엄~청 기다린 거 알지?"


니코가 그제야 돌아보자 에리의 얼굴엔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활짝 웃던 니코도 순간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뭔데 그 표정은?"

"아니. 진지하게 귀엽다고 느껴져서 나 괜찮은 걸까 싶어서."


곧장 주먹이 에리를 향해 날아왔다. 힘껏 쥐고 힘껏 휘두른 주먹은 제대로 들어가 꽂혔다. 아야야. 에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니코가 친 팔을 문질렀다. 그러다 또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노조미도 보고 싶다고 했고."

"……. 아니다. 니코는 너희같이 이상한 애들이랑 달라서."


니코는 더 할 말이 없다고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자르고 다시 의자를 돌려 컴퓨터를 향하려 했다. 그런 니코의 팔을 붙잡고 다시 돌려놓으며 에리는 곧장 니코에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니코를 헤집어 놓고 떨어지며 에리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러면 나는 노조미랑 간접 키스한 셈인가?"


곧장 명치를 향해 뻗어오는 주먹을 에리는 반사적으로 붙잡았다이내 바로 놓아주며 항복의 표시 마냥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해. 심술이 심했어."

"멍청이가."

"정말 미안해."


니코는 대답 없이 홱 의자를 돌려 다시 모니터를 향했다. 니코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 미안."


그런 니코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더니 에리는 말 한마디만 남겨두고 방을 나갔다. 에리가 나가고 나서야 니코는 에리가 책상 위에 올리고 나간 비닐봉지를 뒤적여 아이스크림의 뚜껑을 화풀이 대상인 양 뜯어냈다. 그리고 니코는 작은 플라스틱 수저를 입에 물곤 중얼거렸다.


"말차맛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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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6. 12. 12. 01:15

왜 울고 있는 거야, 마키쨩?

한숨을 내쉰다.
가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어.

문이 닫혔다. 마키는 혼자 울고 있었다. 소매로 눈물을 훔쳐보지만 금세 다시 넘쳐버려 아무 소용 없었다. 눈만 붉게 달아올라 연한 살이 쓰리고 매워질 뿐이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려 앉아서는 손에 잡히는 원피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하지만 해결할 방법은커녕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삐- 삐- 작게 귀에 맴도는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작은 몸에 본인은 무엇인지도 몰랐던 것이 숨을 쉬기가 벅찰 정도로 들어찼다. 숨을 몰아쉬면서 점점 커지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몸을 있는 대로 움츠리고, 호흡을 잊어 간간이 터져 나오는 숨을 격하게 몰아쉰다. 금방이라도 그렇게 무언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삐- 귀에 아른거리던 소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마키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떠나지 않고 귀를 파고들었다. 감고 있던 눈꺼풀을 더 강하게 꾸욱 눌렀다. 한계다.

삐--.

마키는 눈을 떴다. 울어대는 핸드폰을 열어 기계적으로 알람을 껐다. 다시 감기려는 눈을 힘겹게 떠서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10시를 조금 넘겨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알람은 꽤 오래 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체를 일으킨다. 좁은 커튼 사이로는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아직 불을 켜지 않은 방을 조금이나마 밝히고 있었다. 마키는 가만히 눈을 깜박깜박 천천히 감았다 떠 보았다. 다시 눕고 싶다. 실제로 그녀의 어깨는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이른 시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주말인데 조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며 마키는 자신 안에서 들리는 유혹의 소리에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은 저항해보지만, 그 결과가 매번 패배였음을 마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내려가던 어깨가 베개에 닿았을 때, 진동이 울렸다. 짧게 울리고 끝나는 것을 보아하니 문자가 온 모양이었다.

귀찮아. 싫은데….

아예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묻어버리고 애써 외면하고 있자니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한번은 무시했지만 두 번째에 또 곧장 이어 울리는 세 번째 진동음에 이르러서는 마키도 별수 없이 슬렁슬렁 뒤집혀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이름에 그제야 잠이 깼다.



마키는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면서 문이 닫히기 직전에 다시 벌컥 열어젖혔다. 급하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만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손에 휴대전화가 들려있었다. 현관 앞에 멈춰 서서 빠르게 손가락으로 패드 위를 움직여 문자 하나를 보내두었다.

<지금 나가>

이제 막 보낸 문자를 받을 상대도, 아침부터 마키의 잠을 깨운 문자의 주인도 우미였다. 세 번에 나눠 온 장문의 메세지였지만 요약하자면 오늘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시작한 문자는 거듭 사과를 반복했다.

<이렇게 당일이 되어서 급한 연락을 받게 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라며 끝을 맺는 것을 보니, 마키는 딱딱한 우미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져 혼자 한참을 웃고 나서야 답장을 위해 휴대전화를 집어 들 수 있었다. 여러 마디를 썼다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하더니 겨우 보낸 답장은 한마디뿐이었다.

<지금 준비하고 나갈게>

그렇게 집을 나서 마키는 우미와 만나기로 한 카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꿈, 기분 나빴던 것 같은데. 멍하니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문득 생각이 났다. 일어나자마자는 아른거리며 남아있었던 꿈은 그사이 휘발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는 꿈이었다’라며 깨어서 생각했던 것만 남아있어 찝찝한 느낌이었다. 걸음도 멈추어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퍼뜩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왜 울고 있는 거야, 마키쨩?’

목소리를 따라 꿈의 끝자락이 끌려 나왔다. 마키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생각했다. 한숨. 왜 울고 있었지? 닫힌 문. 그리고 따라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은 방안에서 침대 위에 앉아, 손으로 까슬 거리는 레이스 자락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언제였더라. 생각하고 있자니 카페 간판이 눈에 띄었다. 어느새 목적지였다.




먼저 카페에 와 있던 우미는 웃으며 마키를 반겼다.

“이번 곡도 느낌이 좋던데요? 요즘 컨디션이 좋은가 봐요, 마키.”
“별로.”
“그런가요.”

둘이서만 만나는 것만 해도 벌써 수차례. 우미는 하하 웃으며 능숙하게 마키의 퉁명스런 말을 받아넘겼다.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던 마키가 슬쩍 다시 우미 쪽으로 시선을 향하니, 우미는 눈을 마주치곤 슬쩍 웃어 보였다. 얼굴이 달아올라 버렸다. 마키는 시선을 돌려버리며 괜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서 가사는?”
“아, 아! 그렇죠. 여기 있습니다.”

마키의 서투른 말 돌리기에도 우미는 그녀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주었다. 우미가 가방에서 꺼내 드는 투명한 파일은 마키가 몇 주 전 그녀에게 건넨 것이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음표마다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 쓴 가사가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을 닮아 그녀의 고지식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글씨는 지웠다 다시 쓴 흔적 하나 없이 정갈했다. 가장 앞 페이지부터 가사를 읽어나가는 마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 음이 따라붙어 노래가 되어 울렸다. 마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며 가사에 집중했고 우미는 그 건너에서 그녀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끝까지 가사를 따라간 후에야 마키는 손에 들고 있던 악보를 내려놓았다.

“괜찮은가요?”
“좋은데? 생각했던 그대로 가사가 된 것 같아. 역시 우미…. 대단하네.”
“최고의 칭찬이네요.”

가볍게 받는 우미였지만 마키의 이야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처음 우미가 그녀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주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매번 신기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따로 언질을 주거나 그녀의 생각을 전달한 것도 아닌데, 우미의 가사는 언제나 마키가 곡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을 그대로 글로 옮기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
“왜 그러시죠?”

묻혀있던 기억은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하니 한꺼번에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다. 어린 시절에 가끔씩 아무도 왜인지 알지 못해 답답해하는, 펑펑 울어버리는 날들이 있었다. 그 날도 같았다. 마키는 연주를 위해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그리고 연주 도중에 마키는 참을 수 없이 슬퍼졌다. 건반을 누르는 것이 힘들었고 어서 그 자리를 내려오고 싶었다. 자신이 만들어 제 귀로 돌아오는 소리가 가슴에 응어리져 스스로를 꾸욱 짖눌러 왔다. 간신히 끝낸 연주회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무대를 내려가 가장 먼저 가까이 다가오는 부모님께 매달려 울어버리고 싶었다. 진심을 담아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슬픔은 그대로 두려움이 되었다. 그 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두려움은 주변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키…?”

마키가 혼자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미안 오늘 할 일은 이걸로 끝인가?”
“네. 일단은….”
“그럼 가봐야겠네.”
“네. 그렇죠.”
“저기, 우미.”
“뭔가 할 말이 있으신가요?”

우미는 가만히 마키를 응시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마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둘 사이의 침묵 뒤에 마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아니야. 나 잠깐 있다 갈게. 먼저 가. 잘가!”

몰아치듯 마구 인사를 건네는 마키에게 떠밀려 한두마디 더 인사를 나눈 뒤 우미가 먼저 카페를 나섰다. 천천히 자리로 돌아와 마키 혼자 남은 자리에 한숨이 내려앉았다. 마키는 이야기를 나누며 늘어놓았던 악보를 하나하나 순서대로 모아 쥐었다, 그러다 힘이 풀린 손에서 악보들이 빠져나가 처음보다 더 엉망으로 흐트러져버렸다. 마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숙여 그 위에 슬그머니 엎드렸다. 악보 위에서 사랑을 하고, 선율을 따라 키스를 하고, 노랫말을 곱씹으며 홀로 이별한다. 그리고 다시 악보 위에서 사랑을 시작했다. 마키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우미가 나선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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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2016. 11. 5. 00:43

"잠깐만. 잠깐잠깐. 이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저기, 코사카씨?"

"그러니까, 레이나."


몸을 바짝 붙여오는 레이나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힘을 줘 밀어 보았지만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라고 했잖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만 슬쩍 올려보며 말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린다. 지금 뒤를 넘겨보면 꼬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래서, 정말로 곤란해?"


그렇게 똑바로 보는 건 반칙이야. 시선을 쭉 빼 달아나 보았다. 그러다 슬쩍 곁눈질로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도 레이나는 여전히 그대로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건 애초에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얇은 이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열이 올랐다. 시야는 금방금방 뒤집혔다. 누구의 목소리였지, 방금? 부드럽구나, 레이나는--

--눈을 깜박였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곤란해? 정말로?- 문자가 되어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로부터 얼굴이, 장면이 끌려 나왔다. 퍼뜩 일어나 급히 좌우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익숙한 구조에 익숙한 물건들. 익숙한 내 방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꿈인가.


"아... 저질러버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면 좋을 텐데. 그만그만그만. 어차피 꿈이잖아. 생각을 멈추면 금방 잊어버릴 거야!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멋대로 똑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뿌옇던 기억은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점점 선명해졌다. 곤란해? 그만. 정말로? 그만. 레이나는-


"일어났으면 빨리 준비하지~?"

"-그만!"


양쪽 팔을 번쩍 든 채로 굳어버렸다. 먼저 다시 입을 열기도 난감한 상황에 방 안이 너무 심하게 조용했다. 차라리 웃어 주시죠. 뭐라고 말이라도 하던가.


"뭐해, 너?"


그렇게 아침부터 언니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



햇살이 강하다.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걷자니 금새 얼굴이 달아 올랐다. 머리 위로 두 손을 모아 가려보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다리는 계속 움직이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맞기나 한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빙빙 도는 것 같은 기분으로 그냥 일단은 걷고 있었다. 매미소리가 멀게 들렸다. 주변 소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길이 힘겹게 느껴졌다. 학교에 가고 있었지, 나.  욥. 쿠미코. 주저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얼 해야겠다, 내지는 무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다리를 들어다 앞으로 놓는다. 덥다. 와중에도 머릿속에는-곤란해, 쿠미코?- 그만! 들어가! 쿠미코 표정이 이상해. 아 정말이지 길에서 생각나도 괜찮은 게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그러니까… 레이나는 부드러웠던가. 아니. 아니아니아니. 아. 이러다 죽어버릴지도. 이대로 집에 가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꿈도 그런데 레이-


"꿈?"


뭔가 눈 앞에 불쑥 나타나 뒷걸음질 치고 보니 하즈키가 서있었다. 아니 잠깐.


"있었어, 하즈키? 아, 아니 그보다 나 입 밖으로 말하고 있었어?"

"몰랐던 거냐."


하즈키는 뚱하게 얼굴을 찌푸리더니 금새 표정을 바꾸며 물어왔다.


"아, 맞아. 꿈은 무슨 얘기였던 거야?"


이건…조금 위험할지도.


"아니, 아,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러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오오 쿠미코 딱딱해졌어."


눈을 피해본다. 그러니까, 어떻게, 아, 그래. 도망갈까?


"어, 쿠미코 지금 그렇게 뛰면-"


그렇다. 현기증이 난다.



***



"쿠미코 말이야. 엄청 이상했다고?"


네, 네. 미도리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하즈키의 목소리는 한쪽으로 흘러나가 버렸다. 책상에 한쪽 귀를 대고 엎드려 있는데도 두 사람은 내 자리 옆을 떠나지 않았다. 선풍기가 목이 돌아가며 터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잠시 동안 물러나는 더위는 두어 걸음 뒤에서 눈치를 보다 금새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미도리! 저번에 봤던 그 가게 열었던 것 같던데?"

"정말인가요?"


고개를 들었다 반대쪽으로 돌려 다시 책상에 기댄다. 타이밍 좋게 바람이 뒷머리를 살짝 흔들어 놓더니 그대로 멀어졌다. 정말이지 더운 날이다. 창틀 위로 하늘이 보였다. 눈만 깜빡, 깜빡 감았다 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첫 수업이 뭐더라.


"맞아 쿠미코 말이야, 그 뭐더라 꿈? 얘길 하더니 막 갑자기 달리기도 하고."

"꿈이요?"


--곤란해 쿠미코?


"응. 꿈이라고 했어."


부드럽구나, 레이나는--


"아아아! 그만! 그만! 레이나는 이제 됐잖아, 레이나는!"

"내가 왜?"


위에서 레이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으왁!"


정확히는 어느샌가 책상 앞쪽에 서서는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 반응이 그게 뭐야?"

"레, 레레레이나가 여기 왜 있어?"


레이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하게도,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맥락도 없이 꿈 속의 레이나가 지었던 표정이 떠올라버렸다. 여우일까 싶었던 그 미소와 눈 앞의 모습이 겹쳐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쿠미코, 어디 아파?"


아니. 그건 아닌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천장으로, 창 밖으로 시선을 피하려는데 레이나는 용납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양쪽 볼을 붙잡고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눈동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좋아. 그건 됐어. 그보다 쿠미코, 키스를 하자."

"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그러니까... 레이나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뭐라고? 음. 그러니까 일단 뭐라고 한 건지 레이나한테 다시 물어봐야겠지?


"므아므므."


다가온다? 다가옵니다? 다가오는 건가. 다가오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그러니까 뭐가, 무슨, 아니 그니까 레이나가, 다가온다. 아니, 레이나? 눈이, 에. 입술. 에- 아까 레이나가 뭐라고 했지?

--키스를 하자.

키스?


"에? 에에에? 에?!"


흠. 흠흠.

아무래도 수업이 한창이었던 것 같다. 꽤 큰소리를 내버린 모양이다. 선생님은 정확히 내 방향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린 채로 헛기침을 하고 계셨다. 지금 무슨 시간? 그러니까 방금 뭐지? '사실은 꿈이었습니다.'라니. 요즘은 싸구려 소설에서도 안쓸거야, 그런거. 걱정스럽게 돌아보는 미도리와 눈이 마주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줬다. 정말 무슨 일인 걸까 오늘은. 아침부터 말이야. 뒤에서 쿡쿡거리는 하즈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 덥다.



***



수업은 계속 진행됐다. 집중이 될 리가. 책 한 귀퉁이에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동그라미를 한참 그리다 무슨 짓인가 싶어져 지우개를 들었다. 막상 지우자니 거기 들어가는 힘도 아까워 슬쩍 내려놓고 그냥 다시 샤프를 집었다. 시대상과… 작품은… 꿈… 그러네 꿈. 하즈키랑 미도리는 슬슬 잊어버렸겠지. 아니 거기도 꿈이었을까? 레이나는… 응, 그치. 이따 레이나는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한 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트 한쪽 구석에 ‘레이나’가 쓰여 있었다. 곧장 지우개를 들어 최대한 자국이 남지 않도록 지웠다. 덥다. 조금 어지럽고, 졸릴지도. 정확히는 눈이 무거워.


"쿠미코, 일어나."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레이나?"


아. 그런가. 나 자고 있었구나.


"깨워줘서 고마워."

"일어났어? 잠은 깬 거야?"

"응. 덕분에."

"좋아. 그럼."


저기. 레이나씨 조금 가까운 것 같은--

--또, 인가.


"쿠미코, 오늘 피곤했나요? 날이 많이 덥긴 하지만…."

"그렇네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책상에 다시 엎드리려다 하즈키에게 손목이 붙들려 억지로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졌다. 그리곤 뒤에서 등을 미는 통에 그대로 떠밀려 다리가 움직였다.


"자자. 그만 부실에 가자고."



***



“그치? 오늘 이상하지?”

“아무래도 그렇죠?”


다 들리는데요…. 부실로 향하는 길에 날 앞세워 놓고 하즈키와 미도리는 조금 뒤에서 수군거리며 뒤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해주고 배려 해주는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지. -하하하. 별일 없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친구들아! 사실 그냥 오늘 조금 이상한 꿈을 꿔서 잠자리가 안 좋았나봐!-정도로 이야기하고 정리하면 서로 좋을 일일텐데. 전혀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덕분에 그냥 못들은 척 부실을 향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더위 때문일까? 한풀 꺾일 시간이 되었는데도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으엑.”


부실 문을 열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이거 이거. 여기도 만만치 않은데요.”


뒤이어 들어오며 중얼거리는 미도리의 말마따나 부실도 꽤나 후끈거리는 것이 복도나 교실 이상인 것 같기도 했다. 부실의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 표정들이었다. 그래보아야 금방 부실에 들이닥쳐 언제나와 같은 상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타키 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연습이 시작됐다.


레이나와 눈이 마주칠 뻔 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던 전날의 일은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약속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말할 기분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조금도 들지 않았다. 둘 만 기억하는 조각이라는 건- 아차차차. 방금거 꽤 큰 실수였는데. 슬쩍 보인 아스카 선배의 눈초리가 무서워 황급히 시선을 악보에 좀 더 가까이 모았다. 당황해서 마우스피스에서 입을 떼버릴 뻔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귀 뒤를 타고 목덜미를 따라 땀이 흐르는 자국이 느껴졌다. 어지러워. 귀에 닿는 소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흐리멍덩해 지는 기분. 악보의 음표들이 멋대로 둥둥 떠다닌다. 삐-------------- 긴 이탈음 끝에 저편에서 레이나가 벌떡 일어섰다. 다짜고짜 내 자리 쪽으로 사람들 자리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가까워져서는-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할까. 욕구불만인가 나는? 연습 중에 가볍게 잠깐 의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봐야 30초가 될까 말까 한 남짓이었던 것 같지만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기엔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미코 몸이 안좋으면 무리하지 않는게 좋아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미도리 외에도 다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날 둘러싸고 있느라 연습도 중단하고 웅성거리기를 한참. 결국은 부활동 자체가 중단됐다. 타키 선생님도 이 날씨에 나 같은 사례가 나온 이상 이대로 연습을 계속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고, 그대로 일단은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하즈키와 미도리의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을 힘겹게 만류하고 선약이 있던 두 사람의 등을 떠밀어 보낸 뒤에 느긋하게 하교를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하아.”


교문까지 내려와서야 뭔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가방을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아무래도 악보를 부실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돌아갈까, 그냥 가버릴까. 혼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차라리 평소 같았다면 눈을 꼭 감고 그냥 교문 밖으로 나가 버릴 텐데 오늘 연습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은 방향을 돌렸다.


“안 되는 날이라는 거 있는 모양이네 아무래도.”


부실에는 레이나가 혼자 있었다. 레이나? 또 그건가?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 정도로 원 패턴이면 질려버린다고.


“쿠미코? 왜 돌아 온거야? 아. 몸은 좀 괜찮아?”


정말 오늘은 무슨 날인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대체, 그러니까 아침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수업 중간에. 또 부실에서. 그리고 또인거야? 아. 그래. 정말 차라리 확 해버리기라도 했으면 몰라. 이거 억울하네.


“쿠미코?”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꿈을 한 낮에 네 번이나 겪지. 생각할수록 화나네. 어차피 꿈이면 그냥 기회 있을 때, 해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러게. 그렇네. 그러면 되는 거겠네.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일단 어깨를 붙잡았다. 도망가면 곤란해. 그럼 또 깨버리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지?


“쿠미코? 쿠미코 잠깐만. 너 지금 좀 이상해.”


역시 오늘은 더운 날이다. 누가 학교를 끓이고 있는 게 아닐까? 뇌까지 끓어버릴 것 같아.


“쿠미코!”


머리가 조금 울려. 아무래도 좋다. 어깨를 조금 내렸다. 무릎을 조금 구부렸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깨지 않아?

레이나의 어깨를 놓아주고 두 손을 들었다.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잠깐. 잠깐잠깐잠깐.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이 봤다면 별다를 건 없었겠지만.


정말이지 전부 더위 탓이다. 레이나도, 나도 얼굴이 붉어져 버린 것도 전부 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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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6. 5. 21. 23:31

그림자에 대하여

 

노조미의 자리는 창가 바로 옆이었다. 코트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놓고 자리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정면으로 보이는 시계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여섯 시, 그리고 분침은 삐걱대며 숫자 9를 향해가고 있었다. 교실 시계가 평소 3분 정도가 빨랐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노조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을 만하네.

이유 없이 조금 일찍 눈이 떠지는 날, 어쩐지 준비도 평소보다 일찍 끝나버리는 그런 날이 있다. 바로 오늘이 노조미에게는 그렇게 하루가 조금 일찍 시작되어버린 날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현관에 서 있으니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괜히 마음이 동해 그대로 일찍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당연하게도 평소보다는 훨씬 이른 시각. 교실에 노조미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다. 그렇게 혼자 창문 바로 옆에 앉아있자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창 너머로 향했다. 이른 시각에도 학생들은 한 명씩 띄엄띄엄 교문을 지나고 있었다. 교문 언저리에서 맴돌며 지나는 한명 한명을 세어 보더니 돌아온 시선은 그녀의 앞자리 책상을 향했다. 책상 위에 엎드리더니 슬쩍 눈동자만 시계를 올려보았다. 똑딱거리는 초침에 맞추어 손가락을 까딱이며 수를 세어본다. 하나. . . . 스물도 되지 않아 노조미는 다시 일어나며 오른손으로 턱을 괬다. 나 너무 참을성이 없는 건 아닐까. 자연스럽게 다시 창밖을 향해 돌아가는 자신의 고개에, 노조미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혼자서 등교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지만, 두셋씩 짝을 지어 교문을 넘는 이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와중에 이쪽저쪽을 오가는 노조미의 시선은 명백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보아도 찾는 이가 보이지 않자 이내 다시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노조미는 그대로 지나가려던 시선을 다시 돌려 자신의 오른손을 향했다. 정확히는 책상 위, 오른손의 새끼손가락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그것은 마치 노조미의 시선을 느낀 양 살랑거리며 슬쩍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노조미는 가만히 내려보더니 그것이 손목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가볍게 두어 번 손을 털었다. 가볍게 흩어지며 날아간 그것은 형체도, 무게도, 경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거기에 존재했다. 그것을 노조미는 그림자라 불렀다.

기억을 천천히 감아 올라간다. 뮤즈와 만난 날의 기억. 오토노키자카로 전학을 온 날의 기억.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어린 날에 내려보았던 발의 끝.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기 위해 발돋움을 했을 때.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은 어느 순간 뚝 끊어진다. 그 끝자락에도 그림자는 노조미의 곁에 있었다. 작은 손을 쥐락펴락할 때 그 위에서 그림자는 천천히 모여들었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살짝 서늘한 기분에 노조미는 그것을 퍽 재미있다 여겼다. 어린 노조미에게 그림자는 작은 친구와 다를 바 없었다

언제부터 그것을 그림자라 불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은 그림자로서 언제나 노조미의 옆에 존재했다. 오히려 언제부터 그것이 ‘보통의 그림자’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는가를 고민해본다. 아마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끼기 시작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림자를 가리키면 모두 같은 표정을 보였다. 초등학교의 담임선생님도, 부모님도, 친구들도.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의아해하던 그 표정은 이내 하나같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으응.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 표정이 두려워 노조미는 그 이상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해 보지 못했다. 그렇게 부정하고, 조금만 가만히 버티고 서있으면 금세 노조미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지고, 다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림자는 그렇게 혼자 멈추어 선 노조미를 천천히 감아 올라갔다.

‘그림자가 아니라면, 그럼 이건 뭐지?

그때 노조미는 처음으로 제 팔을 기어오르는 서늘한 감각이, 그림자가 무섭다고 느꼈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털어냈던 그림자가 다시 슬금슬금 노조미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씩 움직이다 노조미의 시선이 향하자 뚝 멈추어 선 것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쿡쿡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

반가운 목소리에 돌아보니 에리가 몸을 기대오고 있었다.

"에릿치! 언제 왔나?"

"방금?"

에리의 대답을 들으며 곁눈질로 돌아보았을 때 그림자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래서-"

에리는 슬쩍 노조미의 어깨 너머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야?"

당연하게도 에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가 이쪽저쪽을 탐색하더니 에리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에리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노조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혹시…. 그게 있는거야?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떠오른 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아니레이. 기냥 에릿치를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나서 말이여."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했을 때, 에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예상한 대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에리를 향해 노조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럼 우선 차례대로 자기소개라도 해볼까?

최악이다. 오늘 하루만 노조미가 같은 생각을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다만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의 다음에는 더 최악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 돌아왔다.

첫 등굣길이었다. 처음 가는 길은 아니었지만 낯설어 조금 헤매 버렸다. 덕분에 교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남은 자리는 가장 뒷자리 딱 하나뿐이었다. 남아있는 자리에 앉기 위해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낼 때 스스로에게 쏠린 시선에 노조미는 생각했다. 최악이다. 두 번째 최악도 금방 찾아왔다. 소름 끼치게 익숙한 서늘한 감각에 노조미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한동안 근처로 다가오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을 터였다. 왜 하필 오늘이지. 보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느끼지 말자.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최악의 상황으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하는 자기소개가 주어졌다.

와중에 등 뒤로 느껴지는 감각은 아래쪽에서 점점 위로 올라왔다.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노조미는 더 강하게 되뇌었다. 보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혼자 다른 세계로 점점 가라앉는 듯한 느낌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머리 위를 넘어 눈앞으로 그림자의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차례가 돌아와 노조미의 앞사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된 건가. 어떡하지. 지금 혹시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노조미는 혼자 생각에 잠겨 드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야세 에리라고 합니다.

순간 노조미는 앞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 흔들리지 않아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야 노조미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올려 본 시선 끝에 눈썹을 찌푸린 금발의 ‘아야세 에리’가 보였다. 그것이 노조미가 본 에리의 첫 모습이었다.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에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노조미는 한 몸에 온 교실의 시선을 받아버렸다. 하지만 그 시선들 가운데 에리와 눈이 마주쳐, 그 상황은 노조미에게 최악이 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에리는 교실에서 나가 버렸다. 내내 그녀를 신경 쓰고 있던 노조미는 당연히 에리가 문을 나서는 뒷모습 또한 보고 있었지만, 곧장 따라나서진 못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따라가야 해’가 맞았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떠오른 ‘왜?’는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누구의 것이었는지 모를 기억 속의 차게 가라앉은 눈도 스믈스믈 기어 나와 노조미를 붙잡았다. 그런 노조미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하지만’이었다.

결심하자마자 복도에 나와 좌우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에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노조미는 먼 곳에서부터 다시 모여드는 그림자를 느꼈다. 복도에 서 있는 몇몇이 이야기하는 와중에 들린 에리의 이름에 일단 무작정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 정도 뒤일까. 모여든 그림자는 노조미를 따라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다만 걸음은 조금 빨라졌다. 복도의 끝자락에 와서는 이미 거의 뛰는 것에 가까웠다. 그림자와의 거리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계단을 거의 날 것 마냥 뛰어 내려가다 우뚝 멈추었다. 노조미의 등 바로 뒤까지 뻗어 온 그림자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뛰어 내려온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노조미는 에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저기!

“넌 누구야?

에리가 돌아보는 시선과 함께 노조미의 등 뒤로 몰려오던 그림자는 일순간에 흩어졌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분명하게 노조미는 에리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나…”

노조미는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어버렸다.

“내는 토죠 노조미!

***

 

“노조미!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에리의 표정에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가 뒤따를 것이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조금은 그녀를 경험하게 된 노조미는 달랐다.

“나, 파르페란 걸 먹어보고 싶어.

덕분에 노조미는 이어지는 이야기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에리는 의아할 정도로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이런 상황은 노조미에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해보지 못한 일들을 노조미이기에 넌지시 청해오는 것이 그녀로서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여가 괜찮다카더라.

귀갓길에는 이미 노조미가 두 사람의 목적지를 정해두었다. 의외로 이런 부분에 서툰 에리 탓에 대부분의 준비는 노조미의 몫이었다. 노조미가 핸드폰 화면을 내밀며 이야기하면, 에리는 감탄하며 그녀를 따랐다. 그런 식으로 몇 번씩이나 둘이서 처음 찾는 길을 지났다. 그 좁은 골목길도 그중 하나였다.

두 사람이 지나기에는 길이 좁아 에리가 앞서가고 노조미가 그 바로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노조미의 발걸음이 늦어졌다.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노조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왜 지금’이었다. 지금까지는 에리와 함께 있으면 괜찮았을 터였다. 느려지던 걸음은 아예 멈춰버렸다.

“노조미?

돌아보는 에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노조미는 자신의 시선이 그녀를 지나쳐 그 뒤를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에리의 등 뒤로 그림자가 밀려오고 있었다. 크다. 한번 옮겨간 시선은 거기에 박혀버렸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림자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단지 가까워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노조미로서는 그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왜 그래? 괜찮아?

바로 뒤. 뒷걸음질 칠 수 없었다. 에리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노조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는 위에서부터 천천히 에리를 삼켜 들어갔다.

“괜찮은 거야?

이미 그림자가 에리의 얼굴의 반을 삼켜 노조미는 그녀의 입이 움직이는 모양만 볼 수 있었다. 에리가 무언가 말했다. 귀로 들리는 목소리와 입이 움직이는 모양, 모두 듣고 또 보고 있지만, 그 뜻이 머릿속에 들어 오지 않았다.

‘나 지금 제대로 웃고 있나?

목을 지나쳐, 가슴께, 허리, 에리의 온 몸이 그림자 안에 갇혔다. 노조미는 그 순간, 그 장소에 혼자였다.

“노조미!

그림자 안에서 뻗어 나온 손이 굳어 있던 노조미의 팔을 낚아챘다.

“듣고 있어? 나는 어두운 걸 싫어해.

에리의 손이 나온 곳을 중심으로, 그림자가 걷혔다.

“아니, 사실 무서워해. 나한텐 이게 아무한테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치만.

에리 자신도 당황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노조미에겐 분명히 전해지고 있었다. 노조미는 제 팔의 떨림이 멎는 것으로, 스스로가 떨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림자는 모두 걷혔다. 노조미는 에리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노조미는 머지않아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에리에게 웃어줄 수 있었다.

 

 

 

 

16.5.21. 어나더스테이지

Present by hon_u

http://kartene.tistory.com/

@kjan_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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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