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언라2014. 12. 3. 21:47

1.


‘---야.’

누이. 나의 첫 기억은 누이가 나의 이름을 불러 준 것이랍니다. 너무 들여다보아 바래고 바랜 사진 마냥 흐릿할망정 그 목소리를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 날 이름으로 불러준 것이 누이가 처음이었기 때문일까요. 누이도 지금보다 조금 앳되어 달큰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던 것을 아무것도 모르던 옛적의 나도 퍽 좋다고 배시시 웃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아바마마의 여섯 번째 손이라는 위치를 이해할 때 즈음, 또 나와 누이의 어미가 다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나이 즈음이 되어서는 누이는 날 이름이 아니라 왕자라 불렀지요.

‘왕자. 공부는 잘되어가나요?’

누이가 그렇게 물어 올 때면 제가 무어라 대답했던가요. 누이의 목소리는 모두 기억하는데 제 대답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어린 치기에 여섯 번째 왕자가 공부는 해서 무엇하냐 했던가요. 아니. 아니겠죠. 나는 누이의 앞에선 언제고 착한 아이이고 싶어 했으니까요. 눈도 못 맞추고 또 바닥을 보며 오늘은 무얼 공부했다 이야기했겠죠. 누이의 칭찬을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또 유독 분명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습니다, 누이. 누이가 처음으로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린 날 말이에요. 결국, 끝까지, 지금까지도 누이는 나에게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았지요. 그저 내 손을 꼭 잡아 주며 몇 번이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몇 해 만에 누이의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들었는지요. 누이도 그 날을 기억하나요? 누이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날 누이가 내 이름을 불러준 횟수만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답니다. 내가 누이를 지키겠노라 말이에요.

하지만 누이, 누이도 알다시피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요 나의 오만이었습니다. 누이는 내 도움을 바라지 않을 만치 강한 여인이었어요.

‘왕자. 왕자가 왕이 되어요. 내가 왕자를 도울 거에요.’

한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왕자의 도움 아래 설정도로 야망이 없는 이도 아니었지요. 또 나는 누이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착한 왕자였고요.

덜 여문 제 머리에 아바마마께서 쓰셨던 금관은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왕좌에 앉은 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리고 손이고 주책없이 떨려와 잠시 앉아있겠노라 들어온 내 공부방에서 나갈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요. 밖에서는 시녀들이 어서 가야 한다며 닦달인 것을 고함을 냅다 질러다 쫓아내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추려 했습니다. 험한 말을 써가며 윽박지르는데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이 누이였어요. 달달 떠는 손을 누이가 꼭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분명 그 자리에서 도망쳤겠지요. 그것이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누이, 어째서 나는 아직도 이 관이 이리도 무거운 걸까요.

“나를 사랑했나요, 왕이시여. 무얼 바라고 내 앞에 섰나요.”

누이는 또 처연히도 웃는군요.

“왕자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나를 사랑했나요?”

재차 물어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어요, 누이. 그냥 날 보아 주세요. 나는 누이의 바람대로 허리를 펴고 가신을 내려보는 당당한 왕이 되었습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럼 모든 것은 누이의 뜻대로 될 것이에요.

“나의 작은 왕. 나를 사랑했나요?”

누이는 웃는다. 울듯이 웃는다.



2.


“고민이라도 있나요?”

멍하니 책자를 바라보다 서책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바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둥대고 있자니 누이가 다시 한 번 물어온다.

“아니면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나요? 표정이 좋지 않아요.”

“아니요. 그냥 조금 다른 생각을 했어요, 누이.”

누이가 또 무어라 이야기하기도 전에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혹시 내가 도움될 일이 있거든 말해주시게. 그대와 나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가 아닌가.“

그는 내 마주 편에 서서 말했다. 말인즉슨 그는 바로 누이의 옆자리에 서 있었다. 셋이 한 자리에 있을 적이면 나의 자리는 언제나 그와 누이가 나란히 선 건너편이었다.

“여러모로 말이야.”

나는 그의 웃음이 싫었다.

그는 큰 사내였다. 그가 말할 때면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당당함. 결단력. 내가 갖추지 못한 왕의 자격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내 누이의 시선 또한 가져가 버렸다. 등을 보고 있노라면 짓눌리는 기분에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그런 사내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누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선대의 때부터 황국의 관리로서 이곳, 궁에 머무르며 정치에 깊게 관여하고 있던 그는 누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누이는 나를 왕으로 만들었다.

누구도 앞에서 말해주지 않건만 뒤의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잘만 흘러들어온다. 허수아비 왕. 누이의 꼭두각시.

“황국과의 관계 유지는 이대로 할 것이고 백성들의 안정을 생각하여 개혁 정책의 시행은 천천히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누이의 뜻대로 하세요.”

누이의 뜻대로 하세요. 이 자리에 앉은 후로 내가 가장 많이 입에 담은 말이었다. 하나 아무래도 좋았다. 누이가 날 보아만 준다면 나는 언제나 누이의 나이 어린 왕자가 될 뿐이었다.

“나는 먼저 일어날게요, 누이.”

“그럼 또 보지.”

답을 한 것은 누이가 아니었다. 그가 먼저 인사를 하니 누이는 그저 살풋 웃으며 나를 보냈다. 나는 누이를 향한 그의 웃음이 싫었다. 또한, 그를 향한 누이의 웃음이 싫었다.



3.


모든 것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다 하여도 내가 줄 위의 광대가 되면, 그것으로 이 극은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는 것 아닌가? 큰일을 위해 작은 것들은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말이야.“

“짓궂네. 내가 나고 자란 궁은 이런 곳이라고 칭하는 건가요?”

허나 그 안일하였던 생각은 우연히 문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면서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동생은 이제 제 발로 설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말이야. 모든 것은 준비되어있어. 그대가 힘을 펼칠 자리가, 황궁에 말이지.”

본래부터 숨어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절로 숨이 멎어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것인가 생각하는 사이에 앞으로 나설 기회를 놓쳤을 뿐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보모 일이나 다름없지 않나.”

두 사람이 지금 무슨 이야길 하는 건가? 누이가 이 궁에서 떠난다는 것인가? 그럼 나는? 나는 무얼 위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지? 생각들이 맴돌았다. 제자리를 돌아 모든 생각은 하나로 모였다. 누이가 사라질 것이다. 손이 떨렸다. 수많은 문자들로 머릿속이 꽉 들어차 정작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판단하지 못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순간에 누이의 등 너머로, 누이와 입을 맞추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4.


발소리가 크게도 울린다. 돌벽에 닿는 손끝이 차다. 행여 누이가 춥지는 않을까. 계단을 오른다. 절로 굽는 허리를 다시 편다. 나는 왕이 될 것이다. 나는 그를 덮을 것이다. 뒤에서 맴도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5.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타박이며 조금 빠른 것이 답지 않게 서두르는 기색이 서려 있지만 아마도 누이의 것이리라.

“국왕!”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어서와요, 누이. 어인 일로 내 방을 찾았나요?”

나는 웃으며 누이를 맞는다.

“물을 것이 있습니다.”

“아니 잠깐만.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보아요, 누이.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정돈되지 않는 표정에, 드물게도 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게 되려나 싶었지만 역시나 누이는 잠깐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차분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에요.”

“안돼요. 내 이야기부터 들어요, 누이.”

장난스레 웃으며 이야기하는 나를 누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보고 있는 걸까요. 또 내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누이는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요? 분명 언제나의 그 변함없는 상냥한 미소와는 다른 것이겠죠. 누이는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하는군요.

“좋아요. 먼저 듣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누이는 황궁으로 가주세요. 이번에 제게 힘을 실어 주시겠다 약조하신 황궁의 관리분이 누이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누이는 큰 뜻을 지닌 분이 아니십니까? 저를 위해 황궁으로 가주세요.”

“지금 황궁이라 하셨습니까? 대체 누가-“

떠는가요? 누이가 제게 보여주는 표정은 그것인가요?

“그럼 그는… 그분은 어떻게….”

“그분?”

나는 예의 그 미소와 함께 이야기한다.

“그게 누구죠?”

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4. 11. 16. 19:51

the gross selection rules tell us which are the gross selection rules-

“응?”

미간을 찌푸리고 모니터에 눈을 바짝 붙여 서너번쯤 다시 문장을 따라가본다. 마키는 그제야 자신이 같은 줄의 첫 단어를 세번째 읽어 내려가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아….”

꽤나 오래 노트북과 씨름을 하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는 했다. 마키는 그제야 이대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고개를 들어올리며 쭉 펴보았다. 마감을 생각하면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키는 일단 노트북을 닫았다. 그제야 그녀는 배경음으로 자신이 즐겨듣는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었음을 눈치챘다. 이어폰을 끼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신기할 정도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허탈하게 웃으며 마키는 옆에 놓아두었던 유리잔을 들었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시원하게 혀에 닿는 커피향. 입안에서 굴리다 천천히 흘러넘기니 씁쓰름하게 혀끝에 남는다.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따지고 보면 골목에 자리잡은 흔하고 작은 카페 중 하나였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사람이 별로 없는 점이나 최신음악이 아닌 클랙식을 틀어주는 점이 마키와는 잘 맞아 처음 발견했을 때에는 보물이라도 찾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앉아 해야할 과제라도 있는 날이면 마키는 꼭 해가 반만 가린 창가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 보고 있곤 했다. 얼마나 있었던 거지. 몸을 돌려 카운터 너머에 걸린 시계를 보니 세시 사십분. 마키는 몸이 찌뿌둥할만도 하다고 중얼거리며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향한 창 너머로 그녀가 보였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무 생각도 없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카페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그대로 걸어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나서야 퍼뜩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대체 어떤 얼굴로, 무슨 얘기를, 어떻게 꺼내려고. 어깨를 붙잡아 그 걸음을 멈춰 세우고 그녀가 돌아보기까지, 그 짧은 시간동안 마키는 몇번이나 후회를 거듭했다.

“마키쨩!”

반복되던 자책들은 그녀가 돌아보며 반갑게 웃어주었을 때 모두 사라졌다. 그 모습에 제 걱정이 허탈해져 또 동시에 안심이 되어 마키는 힘을 빼고 저도 미소를 지어주며 인삿말을 건넸다.

“오랜만이네, 하나요.”

잘 지냈어? 응. 여긴 어쩐 일이야? 학교가 근처야. 그랬구나. 그럼…. 뻔한 이야기를 주고 받고 나자 할말이 없어져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허둥대는 마키를 하나요는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요 쪽에서 이야기를 건네왔다.

“조금 걸을까?”

마키는 바로 급하게 카페로 돌아가 짐을 챙겨 나와서는 하나요의 옆에 섰다. 마주보고 생긋 웃고는 두사람은 특별한 목적지에 대한 이야기 없이 일단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골목길이었다. 대화가 없으니 발걸음 소리에 집중하게 되었다. 마키가 먼저 그리고 하나요가 반걸음 늦게 따라왔다.  2년만인가? 그러게. 2년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을 마키도, 하나요도 모르지 않았다. 꽤나 추워진 모양이었다. 마키가 내쉰 숨에 하얀 김이 보였다.

“아! 카요-“

사소한 습관이었다. 단순히 자주 듣던 호칭이 무심코 입 밖으로 새어나온 것이었다.

“응?”

“…하나요는 이 근처에는 무슨 일로 온거야?”

“나는 이 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그러고 보니 마키쨩 학교가 이 쪽이라면 그 동안에도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

그랬다면 도망쳤을지도. 하지 않는 편이 좋은 말은 목 끝을 넘기지 않고 삼켜냈다. 발을 끌어다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러게.”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대학생활의 이야기. 도무지 끝이 나질 않는 과제에 대한 불평도 조금 늘어놓았다. 하나요는 마키에게 얼마 전 호무라에 다녀왔다며 호노카는 여전하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니코를 통해 전해 들은 에리와 노조미의 이야기도 늘어놓았다. 하나요는 최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곳이 음식점이라며 한번 찾아오라고 약도가 그려진 쿠폰을 건네주었다.

“꼭 갈게.”

마키는 쿠폰을 지갑에 넣으며 약속했다. 그렇게 온갖 얘기에 웃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진작에 골목을 벗어나 어느새 두 사람은 마키에게 너무도 익숙한 장소에 있었다. 빌딩 사이 작은 공원의 입구에는 가로등이 하나, 그리고 벤치가 하나 있었다. 아직 초저녁이지만 이미 많이 어두워져 가로등은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래되고 손보지 않아 등은 힘에 겨운듯 간간히 깜박깜박거리며 그렇게 있는 힘을 다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마키쨩, 좋아해.

그 날도 똑같았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유난히 별이 밝은 날, 꽤나 늦은 시각이었다.

“마키?”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던 모양이다. 하나요가 두어걸음 앞에서 왜 그러냐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핸드폰, 얼마 전에 바꿨지? 연락처 좀 알려줄래?”

“아, 응!”

제 핸드폰을 건네고 제 번호를 입력하는 하나요를 잠시 내려보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까지 무서워했을까.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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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4. 11. 2. 22:02
어린시절 자신이 노조미의 앞에 서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구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방에 자신과 어린시절의 자신. 열이 조금 있는가 싶더니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라고 노조미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만큼이나 현실감없는 모습이었다. 스피리츄얼한 꿈이구만. 여느때와 같이 실실 웃으며 노조미는 다시 그녀의 어린시절을 보았다. 어린 노조미는 자신을 보고있지 않았다. 가만히 바닥만 내려 보고 있어 아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표정이야 굳이 보지 않아도 그 누구보다 노조미가 잘 알고있었다.

꼭 연락할게, 노조미.

그때 어디서인지 모르게 누구의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퍼뜩 고개를 든 작은 아이는 환하게 웃고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조미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갔다. 토죠, 보고싶을거야. 역시나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노조미는 아이에게 두 손을 뻗었다. 정말 아쉽다. 그래도 계속 연락은 할 수 있는거지? 귀를 막자. 어디로 가는건데? 나중에 찾아갈게! 다시 만나자. 꼭이야! 아이는 더이상 웃고있지 않았다. 목소리는 이내 모두 뒤섞여 소음이 되었다. 눈을 찡그리고 제 두 귀를 막고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다. 아무것도 듣고싶지않아. 소리는 사라졌다. 혼자 빈공간에 노조미는 웅크리고 있었다.

"노조미."
"아무것도 듣고싶지않아."
"나야, 노조미."

그것은 알고있는 목소리였다. 아이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살그머니 실눈을 떠보았다. 어린 노조미의 눈 앞에 에리가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걱정이 한가득이라 미간은 잔뜩 찌푸리고 그러면서도 웃고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아이는 입을 여는가 싶더니 우물우물 속으로 삼켜버리곤 다시 닫아버렸다. 그 모습이 답답할 법도 한데 에리는 가만히 그 모양 그대로 그녀를 기다렸다. 아이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어 힘겹게 힘겹게 첫마디를 내놓았다.

"모두."
"응?"
"모두 거짓말을 해."

그리고 막혀있던 울음이 그 한마디와 동시에 터져나왔다. 엉엉 큰 울음도 아니었다. 눈물이 계속 새어나오는 것을 쉼없이 팔로 훔쳐대니 눈가가 금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노조미."

에리는 그런 아이를 제 품으로 당겨안으며 자장가라도 불러주는 듯 나긋한 목소리로 한자한자 귀 바로 옆에서 이야기 해주었다.

"나는 여기있어."

에리는 미열의 악몽에 시달리는 친구를 제 무릎에 뉘이고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네게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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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4. 11. 2. 22:00
마키는 제 샤프의 뒷축과 나무로 된 탁자가 부딪히는 소리를 좋아했다. 톡. 무의식적으로 한번 두번 두드리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그녀는 조금 빠르다 싶은 박자에 맞추어 제 손목을 까닥이고 있었다. 톡. 톡. 톡. 톡. 그 소리에 맞춰 작은 흥얼거림이 찻집의 나직한 배경음악에 섞여 녹아내렸다. 건너 자리에 앉아 제 앞의 노트를 노려보던 우미는 고개를 들어 마키를 보더니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 소절이 사그라드는 것과 동시에 우미가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이야기했다.

"역시 마키. 좋은 곡이네요."
"그럭저럭이네. 고마워."

퉁명스런 말씨였다. 하지만 우미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는 것이 마키 나름의 만족의 표시임을 알았기에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럼. 말을 떼는가 싶더니 우미는 계속 제 앞에 하얀 백지상태로 놓여있는 노트를 들어 두손으로 잡고는 세워 툭툭 두어번 내리쳤다.

"이번엔 제 차례네요. 이 곡에 가사를 쓰면 되는거죠?"
"응. 곡 자체는 나왔지만 세세한 부분의 수정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키의 말을 멈춘 것은 진동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은 탁자 위에 올려져있던 마키의 것이었다.

"미안."
"아니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마키는 휴대폰을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발신자의 이름이었다. 화면에 떠오른 간단하게 '린'이라고 저장되어있는 호칭에 얼마전 그녀가 자신의 폰을 가져가 멋대로 바꿔두었던 것이 떠올라 웃음이 새어나왔다.  당시에는 당황해 바로 다시 바꿔두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조금 아쉽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미소를 띈 채 핸드폰의 버튼을 누르던 마키의 표정은 린으로부터의 메세지를 본 순간 확 바뀌었다.

"하?"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에 반응은 저쪽 편에서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마키?"

걱정스레 물어오는 우미의 목소리에 마키는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 해명했다. 별 일이라 할 수는 없었다. 마키는 그저 영문을 알 수 없는 메세지의 내용에 당황했을 뿐이었으니.
<냥냥냥!>
린으로부터의 메세지는 단 한줄이 전부였다. 빠르게 자판 위를 움직여 보낸 마키의 답장도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뭐야, 린>
<산토끼의 반대말이 뭔지 아냥?>
분명 마키에게 답을 요구하는 메세지였지만 린은 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다음 메세지를 보내왔다.
<죽은토끼! 몰랐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키를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지만 확인하지는 않았다. 대신 마키는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마키?"
 "미안, 우미. 먼저 일어나볼게."
 "아, 네. 괜찮습니다. 오늘 해야할 작업은 거의 끝났으니까요.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응. 그렇네. 기르는 고양이가 조금 칭얼대는 모양이야."
 "고양이를 기르셨나요?"

우미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의자를 밀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응. 얼마 되진 않았지만."


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4. 11. 2. 21:58

문을 한쪽으로 밀어 열자마자 마키의 눈길이 향한 곳은 린 너머의 창문이었다. 날이 제법 쌀쌀해졌다 싶더니 열린 창 틈으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춥지 않아?”

마키는 안으로 들어가며 물어보더니, 린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창 쪽으로 향했다. 괜찮은데.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창을 닫아 새는 틈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마키는 린의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린은 볼을 부풀리고 마키를 노려보더니 풀석 허리를 숙여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답답한데에.”
“그래, 그래.”

볼맨소리로 칭얼거리는 것이 이불에 울려 웅웅대는 소리로 들려왔다. 그래보았자 즉시 돌아온 대꾸는 일말의 재고도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린이 입을 다물어버리니 둘 사이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홱 고개를 치켜든 린은 두 팔을 뻗어 마키의 양 볼을 장난스레 꼬집어주는 것으로 마키를 응징했다. 마키의 표정이 금세 구겨졌지만 약하게 도리질을 할 뿐이었다.

“아, 정말! 린!”
“아아. 정말 억울하다니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더웠고 드디어 가을이다!”

린은 그제야 마키의 볼을 놓아주고 두팔을 번쩍 들고는 말을 계속했다.

“-한지도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우리 마키선생님은 창문이나 닫으라고 하고 말이다냐.”
“기침 심해져.”
“네, 네.”

린은 웃었다.
-마키쨩, 좋아해.
언젠가 고백의 말을 해주었던 그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린은 마키를 향해 웃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마키는 목 끝까지 치민 문장을 꾹 눌러 삼켰다. 린이 다 붓고 빨개진 눈으로 자신을 보며 웃었던 그날에 이미 다짐했을 터였다. 린의 옆에선 그녀의 연인으로만 남겠노라고. 나는 그것 조차 힘든데, 너는 어떻게.

“마키쨩, 마키쨩. 있잖아 약은 쓰지 않게 만들 수 없는거야?”
“린.”

마키는 린을 향해 한손을 뻗었다. 여전히 짧은 머리칼을 쓸어 쥐어본다. 눈매 끝을 매만져보다 뺨을 쓰다듬어 본다.

“마키쨩?”

품에 끌어안고 그 어깨에 얼굴을 묻어본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마키쨩은 어리광쟁이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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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마키  (8) 2014.11.02
Posted by 혼우
글/뱅가드2014. 6. 7. 00:32
드문드문 잡초만 비집고 자란 빈터 가득 검은 갑주의 이름없는 이들이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다 보니 새삼 제 머리 위의 하늘이 타르투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의 익숙한 클레이의 하늘이 아니었다. 검붉은 하늘에 커다란 검은색의 고리, 그것이 천천히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타트루는 이내 아무 말 없이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한 사람이 담겼다.


 모드레드는 제 앞에 선 이들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입을 꾹 다물고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드레드는 짧게 숨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너희는 나와 함께하라.

기억이 목을 막았다. 그들이 그날과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절망하라.

숨이 새어나올 뿐 아무런 이야기도 전할 수 없었다. 길어진 침묵은 그대로 무게가 되어 모두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몇몇이 곤란하다는 생각에 표정이 흐트러지기 시작할 때였다.

 "보상은 없을 것이다."

날카롭게 모두의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흐트러지던 전열을 붙들었다. 모든 시선은 일제히 모드레드의 뒤로 쏠렸다.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블래스터 다크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명예도 주어지지 않을지 모른다."

잠시 말을 멈추고 블래스터 다크는 자신의 앞에 선 섀도우 팰러딘을 응시했다. 그리곤 제 옆에 선 모드레드의 어깨에 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다만 우리는 이길 것이다."

반응은 천천히 끓어올랐다. 한 사람의 박수 소리에서 부터 시작해, 커다란 함성이 되어 서로의 귀를 울렸다. 루케아와 라키아는 휘파람을 불어대고, 타르투는 자신의 목표를 다시 한 번 제 눈에 새겼다. 그 와중에도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는 블러드 마스터도, 서로의 손을 맞추는 쌍둥이 형제도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리벤져의 이름을 새겼다.



 "이번에는 서서 졸기라도 한 건가?"

함성의 뒤에 혼자 숲의 안쪽으로 들어간 모드래드를 블래스터 다크가 따라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커다란 나무의 아래 기대어 앉아 있는 모드레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무 그림자에 가려 모드레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울컥 치미는 기분에 블래스터 다크는 한발 다가서며 모드래드의 가슴 부근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공범이다! 혼자서 도망치지 마라!"

블래스터 다크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한순간도 과거에 삼켜지지 말란 말이다."

모두 뱉어내고 나서야 블래스터 다크는 모드레드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기사는 그림자 밑에서 웃고 있었다.

 "오늘따라… 말이 많군그래."

느긋한 모드레드의 어투에 블래스터 다크는 밀치듯 손을 놓아주며 퉁명스레 답했다.

 "잠은 깬 모양이지? 일어나라. 출발이다."

블래스터 다크는 여전히 앉아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드레드는 잠시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는가 싶더니 맞잡으며 그에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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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블루 배포본  (0) 2015.05.31
Posted by 혼우
글/언라2014. 6. 3. 20:27
1.

밤이다. 어둡고, 물론 내가 앞을 못 볼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대단하거든. 이 정도도 분간못해서 휘청거리는 다른 인간 같은 것들은 불쌍해. 아 또 말이지 잔잔하고. 달도 밝고. 맞아, 춥지도 않네. 얼마전까지만 해도 꽤 추웠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때는 아무리 나라도 웅크리고 있는데도 몸이 오들오들 떨리더라니까? 그러니까 음... 뭐였지? 아, 그래. 밤이다. 슬슬 조금 움직여 봐도 좋겠네. 우선 일어나서 다리부터 허리까지 쭉 펴고, 목도 쭉 뻗어보고, 크게 한번 울지. 준비 끝. 여기서 뛰어 내려갈까 생각도 했는데, 물론 내 몸에 몇배나 되게 높기는 하지만 나는 대단하거든, 밑으로 걷다가 인간이나 다른 것들이랑 마주치면 귀찮으니까. 저 밑은 인간 하나면 꽉 차게 좁잖아. 이 위는 길이 좁기는 해도 나만 걸어가거든. 오늘 밤 산책은 이 담장 윗길로 하기로 결정했어. 나는 말이지 이번에 내가 자리 잡은 곳이 꽤나 맘에 들어. 내가 여길 좋아하는 이유? 그야 일단 조용하거든. 시끄러운 인간들이 적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높기만한 건물들 사이로 한낮에 절묘하게 해가 드는데, 그게 좋아. 낮잠 자기엔 최고의 장소잖아.

뭐, 가끔은 이렇게 시끄럽고 귀찮은 인간들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말이야. 이 정도는 참아줘야지. 하여튼 우충충한 얼굴로 내 영역에 들어 왔을 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지. 좀 가라 가. 가라. 귀찮으니까 좌절은 좀 다른 것에 가서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땅만 보고 걷길래 저렇게 그냥 가겠거니하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하필 딱 눈이 마주쳐서 이게 뭐하는 건지. 레드그레이브님인지 뭔지 모르겠고, 니가 꾸중 들은 얘기를 왜 나한테 늘어 놓는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만 좀 가버려! 이제 잘거니까 말이지, 눈 앞에다 대고 하품을 해주면 알아서 가버리지 않을까?

"너 날 위로해 주는거냐? 한낱 미물에게 위로를 받게 되다니..."

답이 없군. 웃지마. 기분 나빠.

"그래 알겠다. 실수를 했다면 차라리 레드그레이브님 앞에 무릎꿇고 벌을 받으라는거지?"

오, 이런.

"좋아. 그럼 난 이만 가보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등을 보고 있자니, 어휴, 맥이 빠졌어. 산책은 그만둘래.


2.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가. 먹을거? 있어? 놓고 가. 뭐야 없어? 그럼 가버려. 하여튼 꼬마들은 귀찮게 군다니까. 겨우 보냈-에이! 기껏 한 무리 가나 싶었더니 또 누구야? 어? 너냐 작은 여자. 이 녀석 또 왔네. 뭐, 이 녀석이야 빛을 가리는 것도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야, 야야야야야. 만지지는 마. 만지지 말라니까. 보고 있는 것 참아줬더니만 어딜 손을 뻗을라고 그래. 그래그래. 너 잘치운거야. 손 댔으면 물거였다고.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구나."

뭐 좋다고 웃는건지 모르겠네. 그만 가라. 기분 나빠졌어.

"역시 그와 닮았구나."

가라니까.

"그라이바흐..."


3.

거기 둘. 그런 건 좀 아무도 안보는데서 하지 그러냐? 여기 내가 보고 있잖아. 하암. 암컷이랑 수컷이 혈기왕성한 때인것 알겠다만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건데 말이지 인간들은 역시 이상해. 조금 아까는 조금 이상한 인간이 여길 지나갔는데 처음엔 털이 길어서 암컷인가 했더니 수컷이더라고. 표정은 꼭 어디 아픈것 같아서는. 구석에서 헉헉대더니 지 옷 꽉 잡고 울기 시작하는데 누구? 메리아? 뭐 그런걸 중얼거리면서 또 한참을 울더라. 돌아갈땐 시치미를 뚝 떼고 정색하는데, 이상한 인간이었어. 인간이니 이상한걸까? 그런것 보다 저 높은 탑이 없어지면 여기가 좀 더 좋아질 것도 같은데 말이야. 우선 해가 더 잘들테니까.

"너도 혼자니?"

이 인간 언제부턴지 날 빤히 쳐다보더니만 내 놓은 소리가 이거야. 그냥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가버리더라고. 그치만 '너도'냐니? 물론 나는 혼자지. 하지만 그 인간은, 그 인간 뒤에서 날 빤히 노려보고 있는게 분명 있었는데 말이야.

오늘은 구름이 가깝네. 나른하고, 평화롭고, 조용하고, 좋다. ...아무튼 말 끝나기 무섭게 나타나네. 인간이란 것들은 말이야. 저건 뭘까... 한 인간이 여기로 소란스럽게 뛰어들어오더니 말이지 저쪽 벽에 쭈그리고 앉아버리는 거야. 뭐하는 건가 하고 나도 모르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니까 찡긋거리면서 손가락을 자기 입에 가져다 대는데, 작은 것도 아니고 커다란 수컷이 저러니 과연 안어울리는군. 나 표정 찌푸렸다고 이봐.

어. 저건 뭐지? 저거, 저거, 저거, 저 동그란거. 저거, 저, 저거. 잡고 싶어. 잡고 싶- 놀랐어! 저 동그란거에서 빛이 나오더니 인간이 나타났어! 인간이란건 저런 것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었구나.

"미리안. 여기에요."

아니아니아니아니 정말로 놀랐어. 놀라있는 사이에 아까 그 수컷은 사라져 버렸더라고. 깜짝 나타난 인간은 날 빤히 보는데. 왜. 뭘봐.

"당신, 나와 닮았네. 인간을 보는 눈이 말이에요."

무슨 소리야. 그 이상한 여자 말이야 이상한 말만 하고 사라졌는데, 아니 나는 그렇게 나타나고 사라지지 못하는데. 역시 인간들은 이상해.


4.

저거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저 달 말이야. 하암. 저 빨간 망토 요즘 많이 보이는걸. 가만. 어제 울고 있던 그 인간도 저거 였던가? 내 알 바 아니긴 하지만. 그보다 또 왔네, 이 작은 인간. 인간? 아니 아무래도 좋지만. 아무튼 난 잘거니까 어서 가버려.

-

"...목표와 해야 할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건 살가드, 당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이봐, 송. 일단 내 얘기를..."
"그만. 조금 기대했다만 역시 너도 어쩔 수 없는... 아니, 먼저 가지."

조용히 좀 해. 잠이 깼잖아. 또 너냐, 인간.

"또 네녀석에게 위로를 받게 되는구나."

아니 됐으니까 그냥 조용히 하라고.

"고맙다."


5.

몸 좀 쭉 펴고 꼬리도 좀 세우고 살랑살랑. 꼬맹이들은 귀찮아. 특히 시끄럽고 말이야. 눈에 안띄는게 상책이란 말이지. 아까부터 내 골목에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작은 인간들이 먼지나 일으키고 있거든. 직접 귀찮게 구는 것 보다야 낫지만. 어제 그 이상한게 붙어 있던 인간도 혹시나 저런걸 바란건가. 어찌됐든 꼬맹이들이 보기 전에 자리부터 옮겨야겠네. 가끔 땅이 흔들려. 인간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 말이야. 아 그래 인간. 인간? 아무튼 그런 것들말이야 너무 많지 않아? 이대로 눈 감고 걷다 보면 제일 먼저 부딪히는 건 틀림없이 인간일거야. 아니면 인간과 비슷한 그것들.


6.

또냐? 너 같이 유난인 인간도 오랜만이다. 안놀아줄거야. 그냥 가버어어어어- 이 냄새! 냄새! 먹을거지! 그치? 줘 ! 내놔! 그거 줘, 그거. 그거 나 주려고 가져온거야? 그치? 오 그렇지 거기거기 그렇게 좋아 내려놓고 물러나. 옳지. 그치그치. 가져왔으니 특별히 먹어주지. 제법 괜찮은 녀석이구나 작은인간. 어 뭐야 너 뭘 그렇게 보고 서있어? 너 가야 내려갈거야 나. 그렇게 보고 있어도 가까이 안갈거라니까. 야야, 손대지 마라. 먹을거 하나 가지고 뭘 바라는거야? 우리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 어차피 갈거면서 말이야. 뭘 그렇게 웃냐. 좀, 미안하게 말이지. 어쨌든, 고맙다.


7.

뭔가 온다.

"어? 너 아직도 여기 있었네."

이 인간 갑자기 달려오더니 헥헥대면서 뭐라는거야. 난 너 같은 인간 몰라. 어, 어어어, 저거! 그때 그 여자가 나타났던 동그란 공 맞지? 그치? 아! 저 인간 그때 그 수컷이구나. 쭈그려 앉아있던.

"잠깐 실례 좀 하자."

야 야 누구 맘대로. 이 인간 뭐 하는거야. 왜 멋대로 내 담벼락을 기어오르는데. 저리가. 저리가라니까. 앞 발을 확 할켜버릴라.

"이크."

이번엔 또 뭐야. 새로운 인간이네. 귀찮아. 귀찮아. 좀 니들끼리 저기가서 놀아. 어? 저 빨간 망토, 그건가? 뭘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냐. 저녀석 골목길 입구에서 이쪽만 빤히 보고 있어. 어, 들어오네. 천천히 한발씩 들어오는데, 저녀석은 또 여기 무슨 일이지?

"맥스, 뭔가 찾았어?"

또 다른 인간이잖아. 어휴. 오늘은 무슨 날인가? 귀찮게 말이야. 새로 나타난 인간도 빨간 망토네. 먼저 와있던 녀석한테 말하는거 보니 둘이 아는사이인가? 볼 일 없으면 그냥 가지 그래? 그냥 가라니까? 왜 안가고 나랑 먼저온 녀석만 번갈아 가면서 보고 그래. 난 결백해. 잘못한거 없다니까. 그만 노려봐 임마. 먼저 온 녀석은 또 나만 빤히 보고 있고. 아니, 아닌가? 내가 아니라 이 벽 뒤에 있는 그 인간을 보는건가?

"여기 뭔가 있어?"

응. 있지. ...전부 다 조용해져서 나도 괜히 귀찮아질까봐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삑삑 울리더니 제일 나중에 온 망토 녀석이 품에서 뭔가 꺼냈어. 뭐냐 그건?

"-예. 알겠습니다. 바로 그쪽으로 가도록하겠습니다."

지 혼자 중얼거리더니 괜히 인상 쓰기는.

"가자, 맥스. 저쪽에서 놈들이 나타난 모양이야."

한 놈은 바로 돌아서 나가는데 나머지 한 인간은 계속 이 쪽만 보고 있더라고. 먼저 간 인간이 안보이게 되고 나서야 남아있던 그 망토 녀석도 움직였는데, 끝까지 돌아보더라. 거참. 그럴거면 말이라도 하던가. 아 근데 그러고 보니 인간이 아니었지 아까 그거. 아마 그럴거야.

"미리안 쪽이 성공한 모양이네요."

으힉! 이 여자! 언제 또 나타난거야! 남자쪽도 언제 나왔는지 위에 올라왔네.

"또 봐요."

아니 나는 사양하고 싶은데. 먼저 여자가 붕 내려가더니 남자쪽도 기지개 한번 켜고 씩 웃으면서 따라 내려갔어. 


8.

지금 자면 좋은 꿈을 꾸지 않을까? 이렇게 기분이 좋은걸. 인간만 피하면 귀찮은건 없어. 그러고보면 아주 어릴때 봤던 그거들은 다 어디로 간걸까? 어라? 저거, 그 녀석이네. 뒤에 이상한걸 달고있던 녀석 말이야. 

"싫어. 이젠, 그만. 다 그만두고 싶어."

아, 눈 마주쳤다. 뒤에 달린거랑 눈이 마주 쳤는데 씨익 웃네. 저번에도 느꼈지만, 역시 저거 위험해 보여. 인간 자체도 그렇지만 말이야.

어? 저녀석은! 또 왔냐? 뭐, 어제 그건 맛있었는데. 오늘도 있어? 먹을거 있냐? 넌 위험한 인간은 아닌 것 같으니까. 뭐 조금 더 가까이 와봐도 좋아. 그래. 내가 지금 먹을거에 눈이 팔린게 아니라 그냥 그런거야. 으음. 그래 내가 조금 가봐도 괜찮겠네. 에구구. 기다려봐. 몸 좀 펴고 내려갈테니까.

"맛이 괜찮더냐?"

응. 뭐. 나쁘진 않아.


9

"다음에 지상에 내려가는 일정이... 응. 그래. ...크레니히? 아이는 신경 쓰지 말게. 그 애도 이해해줄 나이야. 그래서..."

이쪽은 보지도 않고 휙 지나가네. 다른 인간들도 저려면 나도 좀 편할텐데.


10.

"먼저 지나가요."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지나갔으면 그냥 지나가면 될 것이지 저 이상한 여자는 왜 돌아서는거야. 역시 이상한 여자라니까.

"우리 아는 사이 아닌가요? 그 쪽 이름이 어떻게 되죠?
"네? 음... 죄송합니다만 기억이 잘 안나네요. 저는 크레니히라고 해요."

왜 말을 안해?

"그래요? 제 착각인가 보네요.

싱겁긴.

-

"안녕하세요, 고양이씨."

어? 너 이상한 여자! 가는거 봤는데 언제 내 옆에 온거야? 하긴 넌 원래 갑자기 나타나고 없어지고 그랬지.

"아까 그 아이 말이에요.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막상 보게 되니 저렇게 자랐구나 하는 감상 정도는 남네요."

뭐라는 거야.

"그래봐야 과거의 잔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말이에요. 그 뒤에 붙어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11.

오늘도 올까, 그 작은 인간?

이제 왔냐, 인간? 오늘은 좀 늦었네. 내려갈테니까 거기서 기다려. 어, 야, 너 손... 그래그래, 인심썼다. 한번 정도야 뭐 그동안 얻어 먹은것도 있고 하니 봐줄- 차가워!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너! 야!

"아. 미안하구나. 많이 놀랐더냐?"

뭐하려고 한거야 너! 가만히 있어 줬더니만 말이야. 엄청 차가웠다고! 어? 너 가냐? 그냥 가면 다야? 야! 야? 이씨... 너, 내일도 올거지?


12.

오늘은 안 와?


13.

여기도 너무 시끄러워졌어. 슬슬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지. 꽤 아까운 장소이긴 하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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