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5. 00:43

"잠깐만. 잠깐잠깐. 이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저기, 코사카씨?"

"그러니까, 레이나."


몸을 바짝 붙여오는 레이나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힘을 줘 밀어 보았지만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라고 했잖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만 슬쩍 올려보며 말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린다. 지금 뒤를 넘겨보면 꼬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래서, 정말로 곤란해?"


그렇게 똑바로 보는 건 반칙이야. 시선을 쭉 빼 달아나 보았다. 그러다 슬쩍 곁눈질로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도 레이나는 여전히 그대로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건 애초에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얇은 이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열이 올랐다. 시야는 금방금방 뒤집혔다. 누구의 목소리였지, 방금? 부드럽구나, 레이나는--

--눈을 깜박였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곤란해? 정말로?- 문자가 되어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로부터 얼굴이, 장면이 끌려 나왔다. 퍼뜩 일어나 급히 좌우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익숙한 구조에 익숙한 물건들. 익숙한 내 방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꿈인가.


"아... 저질러버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면 좋을 텐데. 그만그만그만. 어차피 꿈이잖아. 생각을 멈추면 금방 잊어버릴 거야!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멋대로 똑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뿌옇던 기억은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점점 선명해졌다. 곤란해? 그만. 정말로? 그만. 레이나는-


"일어났으면 빨리 준비하지~?"

"-그만!"


양쪽 팔을 번쩍 든 채로 굳어버렸다. 먼저 다시 입을 열기도 난감한 상황에 방 안이 너무 심하게 조용했다. 차라리 웃어 주시죠. 뭐라고 말이라도 하던가.


"뭐해, 너?"


그렇게 아침부터 언니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



햇살이 강하다.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걷자니 금새 얼굴이 달아 올랐다. 머리 위로 두 손을 모아 가려보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다리는 계속 움직이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맞기나 한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빙빙 도는 것 같은 기분으로 그냥 일단은 걷고 있었다. 매미소리가 멀게 들렸다. 주변 소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길이 힘겹게 느껴졌다. 학교에 가고 있었지, 나.  욥. 쿠미코. 주저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얼 해야겠다, 내지는 무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다리를 들어다 앞으로 놓는다. 덥다. 와중에도 머릿속에는-곤란해, 쿠미코?- 그만! 들어가! 쿠미코 표정이 이상해. 아 정말이지 길에서 생각나도 괜찮은 게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그러니까… 레이나는 부드러웠던가. 아니. 아니아니아니. 아. 이러다 죽어버릴지도. 이대로 집에 가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꿈도 그런데 레이-


"꿈?"


뭔가 눈 앞에 불쑥 나타나 뒷걸음질 치고 보니 하즈키가 서있었다. 아니 잠깐.


"있었어, 하즈키? 아, 아니 그보다 나 입 밖으로 말하고 있었어?"

"몰랐던 거냐."


하즈키는 뚱하게 얼굴을 찌푸리더니 금새 표정을 바꾸며 물어왔다.


"아, 맞아. 꿈은 무슨 얘기였던 거야?"


이건…조금 위험할지도.


"아니, 아,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러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오오 쿠미코 딱딱해졌어."


눈을 피해본다. 그러니까, 어떻게, 아, 그래. 도망갈까?


"어, 쿠미코 지금 그렇게 뛰면-"


그렇다. 현기증이 난다.



***



"쿠미코 말이야. 엄청 이상했다고?"


네, 네. 미도리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하즈키의 목소리는 한쪽으로 흘러나가 버렸다. 책상에 한쪽 귀를 대고 엎드려 있는데도 두 사람은 내 자리 옆을 떠나지 않았다. 선풍기가 목이 돌아가며 터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잠시 동안 물러나는 더위는 두어 걸음 뒤에서 눈치를 보다 금새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미도리! 저번에 봤던 그 가게 열었던 것 같던데?"

"정말인가요?"


고개를 들었다 반대쪽으로 돌려 다시 책상에 기댄다. 타이밍 좋게 바람이 뒷머리를 살짝 흔들어 놓더니 그대로 멀어졌다. 정말이지 더운 날이다. 창틀 위로 하늘이 보였다. 눈만 깜빡, 깜빡 감았다 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첫 수업이 뭐더라.


"맞아 쿠미코 말이야, 그 뭐더라 꿈? 얘길 하더니 막 갑자기 달리기도 하고."

"꿈이요?"


--곤란해 쿠미코?


"응. 꿈이라고 했어."


부드럽구나, 레이나는--


"아아아! 그만! 그만! 레이나는 이제 됐잖아, 레이나는!"

"내가 왜?"


위에서 레이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으왁!"


정확히는 어느샌가 책상 앞쪽에 서서는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 반응이 그게 뭐야?"

"레, 레레레이나가 여기 왜 있어?"


레이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하게도,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맥락도 없이 꿈 속의 레이나가 지었던 표정이 떠올라버렸다. 여우일까 싶었던 그 미소와 눈 앞의 모습이 겹쳐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쿠미코, 어디 아파?"


아니. 그건 아닌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천장으로, 창 밖으로 시선을 피하려는데 레이나는 용납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양쪽 볼을 붙잡고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눈동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좋아. 그건 됐어. 그보다 쿠미코, 키스를 하자."

"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그러니까... 레이나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뭐라고? 음. 그러니까 일단 뭐라고 한 건지 레이나한테 다시 물어봐야겠지?


"므아므므."


다가온다? 다가옵니다? 다가오는 건가. 다가오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그러니까 뭐가, 무슨, 아니 그니까 레이나가, 다가온다. 아니, 레이나? 눈이, 에. 입술. 에- 아까 레이나가 뭐라고 했지?

--키스를 하자.

키스?


"에? 에에에? 에?!"


흠. 흠흠.

아무래도 수업이 한창이었던 것 같다. 꽤 큰소리를 내버린 모양이다. 선생님은 정확히 내 방향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린 채로 헛기침을 하고 계셨다. 지금 무슨 시간? 그러니까 방금 뭐지? '사실은 꿈이었습니다.'라니. 요즘은 싸구려 소설에서도 안쓸거야, 그런거. 걱정스럽게 돌아보는 미도리와 눈이 마주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줬다. 정말 무슨 일인 걸까 오늘은. 아침부터 말이야. 뒤에서 쿡쿡거리는 하즈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 덥다.



***



수업은 계속 진행됐다. 집중이 될 리가. 책 한 귀퉁이에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동그라미를 한참 그리다 무슨 짓인가 싶어져 지우개를 들었다. 막상 지우자니 거기 들어가는 힘도 아까워 슬쩍 내려놓고 그냥 다시 샤프를 집었다. 시대상과… 작품은… 꿈… 그러네 꿈. 하즈키랑 미도리는 슬슬 잊어버렸겠지. 아니 거기도 꿈이었을까? 레이나는… 응, 그치. 이따 레이나는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한 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트 한쪽 구석에 ‘레이나’가 쓰여 있었다. 곧장 지우개를 들어 최대한 자국이 남지 않도록 지웠다. 덥다. 조금 어지럽고, 졸릴지도. 정확히는 눈이 무거워.


"쿠미코, 일어나."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레이나?"


아. 그런가. 나 자고 있었구나.


"깨워줘서 고마워."

"일어났어? 잠은 깬 거야?"

"응. 덕분에."

"좋아. 그럼."


저기. 레이나씨 조금 가까운 것 같은--

--또, 인가.


"쿠미코, 오늘 피곤했나요? 날이 많이 덥긴 하지만…."

"그렇네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책상에 다시 엎드리려다 하즈키에게 손목이 붙들려 억지로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졌다. 그리곤 뒤에서 등을 미는 통에 그대로 떠밀려 다리가 움직였다.


"자자. 그만 부실에 가자고."



***



“그치? 오늘 이상하지?”

“아무래도 그렇죠?”


다 들리는데요…. 부실로 향하는 길에 날 앞세워 놓고 하즈키와 미도리는 조금 뒤에서 수군거리며 뒤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해주고 배려 해주는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지. -하하하. 별일 없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친구들아! 사실 그냥 오늘 조금 이상한 꿈을 꿔서 잠자리가 안 좋았나봐!-정도로 이야기하고 정리하면 서로 좋을 일일텐데. 전혀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덕분에 그냥 못들은 척 부실을 향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더위 때문일까? 한풀 꺾일 시간이 되었는데도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으엑.”


부실 문을 열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이거 이거. 여기도 만만치 않은데요.”


뒤이어 들어오며 중얼거리는 미도리의 말마따나 부실도 꽤나 후끈거리는 것이 복도나 교실 이상인 것 같기도 했다. 부실의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 표정들이었다. 그래보아야 금방 부실에 들이닥쳐 언제나와 같은 상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타키 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연습이 시작됐다.


레이나와 눈이 마주칠 뻔 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던 전날의 일은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약속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말할 기분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조금도 들지 않았다. 둘 만 기억하는 조각이라는 건- 아차차차. 방금거 꽤 큰 실수였는데. 슬쩍 보인 아스카 선배의 눈초리가 무서워 황급히 시선을 악보에 좀 더 가까이 모았다. 당황해서 마우스피스에서 입을 떼버릴 뻔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귀 뒤를 타고 목덜미를 따라 땀이 흐르는 자국이 느껴졌다. 어지러워. 귀에 닿는 소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흐리멍덩해 지는 기분. 악보의 음표들이 멋대로 둥둥 떠다닌다. 삐-------------- 긴 이탈음 끝에 저편에서 레이나가 벌떡 일어섰다. 다짜고짜 내 자리 쪽으로 사람들 자리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가까워져서는-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할까. 욕구불만인가 나는? 연습 중에 가볍게 잠깐 의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봐야 30초가 될까 말까 한 남짓이었던 것 같지만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기엔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미코 몸이 안좋으면 무리하지 않는게 좋아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미도리 외에도 다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날 둘러싸고 있느라 연습도 중단하고 웅성거리기를 한참. 결국은 부활동 자체가 중단됐다. 타키 선생님도 이 날씨에 나 같은 사례가 나온 이상 이대로 연습을 계속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고, 그대로 일단은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하즈키와 미도리의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을 힘겹게 만류하고 선약이 있던 두 사람의 등을 떠밀어 보낸 뒤에 느긋하게 하교를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하아.”


교문까지 내려와서야 뭔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가방을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아무래도 악보를 부실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돌아갈까, 그냥 가버릴까. 혼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차라리 평소 같았다면 눈을 꼭 감고 그냥 교문 밖으로 나가 버릴 텐데 오늘 연습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은 방향을 돌렸다.


“안 되는 날이라는 거 있는 모양이네 아무래도.”


부실에는 레이나가 혼자 있었다. 레이나? 또 그건가?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 정도로 원 패턴이면 질려버린다고.


“쿠미코? 왜 돌아 온거야? 아. 몸은 좀 괜찮아?”


정말 오늘은 무슨 날인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대체, 그러니까 아침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수업 중간에. 또 부실에서. 그리고 또인거야? 아. 그래. 정말 차라리 확 해버리기라도 했으면 몰라. 이거 억울하네.


“쿠미코?”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꿈을 한 낮에 네 번이나 겪지. 생각할수록 화나네. 어차피 꿈이면 그냥 기회 있을 때, 해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러게. 그렇네. 그러면 되는 거겠네.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일단 어깨를 붙잡았다. 도망가면 곤란해. 그럼 또 깨버리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지?


“쿠미코? 쿠미코 잠깐만. 너 지금 좀 이상해.”


역시 오늘은 더운 날이다. 누가 학교를 끓이고 있는 게 아닐까? 뇌까지 끓어버릴 것 같아.


“쿠미코!”


머리가 조금 울려. 아무래도 좋다. 어깨를 조금 내렸다. 무릎을 조금 구부렸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깨지 않아?

레이나의 어깨를 놓아주고 두 손을 들었다.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잠깐. 잠깐잠깐잠깐.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이 봤다면 별다를 건 없었겠지만.


정말이지 전부 더위 탓이다. 레이나도, 나도 얼굴이 붉어져 버린 것도 전부 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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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