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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2.19 [로카>이로] Day of Days
글/초 카구야 공주2026. 2. 19. 01:16

 

 로카가 손에 든 탁상 달력에는 두꺼운 펜으로 검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별표나 다른 메모 같은 것은 없고, 꾸욱 힘을 주어 눌러 그었는지 선이 살짝 흔들린 모양이었다.

 

 “오늘이구나.”

 

 달력을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가 종이가 살짝 밀려 올라갔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원이 점점 커져 저를 덮쳐오는 것 같아 로카는 달력을 원래 위치에 내려놓았다. 내려놓은 달력의 뒤로는 방금까지 보고 있었는지 모니터 화면이 그대로 켜져 있었다. 네트워크 화면에 여러 개의 탭이 한꺼번에 띄워져 있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항상 띄워두는 SNS 화면이 하나. 즐겨듣는 플레이리스트를 띄워둔 유튜브가 하나. 자료조사를 하던 웹서핑의 흔적이 여러 개. 그 마지막 탭에는 질의응답 사이트의 로고와 함께 질문 글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짝사랑 어떻-’ 그 제목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기 전에 로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손목을 들어보니 숫자들이 자신을 재촉한다. 로카는 반대 손으로 시계 화면을 덮어 끄고는 ‘준비, 준비.’ 중얼거리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꼼꼼히 기초를 마치고, 퍼프, 다음은 브러쉬. 마지막으로 아이라인을 따라 펜을 긋는다. 거울을 향해 살짝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고 눈을 가늘게 떠보았다. 흠을 찾으려 해보았지만 오늘따라 한 번에 깔끔하게도 그어져 수정할 곳도 찾을 수가 없었다. 괜히 눈썹을 찌푸렸다 한숨을 뱉어 놓고 일어섰다. 외투를 걸치다 눈에 들어온 책상 위의 책들을 책장에 꽂아놓고, 가방을 챙기다 여길 보라며 손짓을 하는 싱크대 위의 컵들을 헹궈 놓았다. 그리고서야 다시 한번 시계를 들어보았다.

 

“늦었네에.”

 

 결국은 가벼운 한숨을 뒤에 남기고 로카는 문을 나섰다.

 

*

 

 손거울을 꺼내 가볍게 앞머리를 매만지고, 카페의 전면 유리창을 통해 친구들의 위치가 어디인가 살펴보았다. 각도 상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머리색을 눈에 담아둔다. 마지막으로 로카는 두 손가락으로 제 입매를 슬쩍 들어 올려보고 문을 열었다.

 

 “마미- 이로하-”

 

 마주보고 있던 마미가 손을 흔들어 주어 마주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보는 이로하와 눈이 마주쳤다. 로카는 곧장 두 사람에게 가 마미의 옆자리 의자를 빼며 앉았다.

 

 “늦어서 미안해!”

 

자신의 두 손을 맞부딪히며 고개를 푹 숙이는 로카에게 친구들은 따로 핀잔을 주지 않았다.

 

 “정신 차려보니 시간이 지났지 뭐야.”

 

 로카는 슬쩍 고개를 들어 찡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로하는 제 옆자리에 놓여있던 머그잔을 로카 앞으로 건네주었다.

 

“답장이 없길래 메일을 못 보는 것 같아서 항상 먹던 걸로 시켜놨는데 괜찮을까?”

 

 따듯한 카페라떼. 여지없이 정답이다. 곤란하게도.

 

 “정답정답.”

 

 홀짝이니 첫입엔 우유의 부드러운 꼬수운 맛이 더 크게 와닿는다. 로카는 잔을 내려놓고 그 테두리를 매만졌다. 동그란 잔 테두리, 그 원이 눈에 박혔다. 점점 다가와 두꺼워진 검은색 동그라미가 로카에게 속삭였다. 오늘이야. 피해서 고개를 돌리니 메뉴판의 숫자 0들이 와글거렸다. 오늘이야. 천장으로 피해버리니 또 위의 전구가 동그랗다.

 

O O O O O O O O O O O O O O O O

 

 “어때 로카? 다음에 그렇게 하는 건?”

 “응? 아-”

 

 로카는 마미와 이로하의 표정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걱정이 한가득 담겨있는 눈으로 본인을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로하의 검은 눈동자를 피해 로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 나 오늘은 먼저 일어나 볼게.”

 

로카는 아무런 변명도 늘어놓지 못하고 가방만 챙겨 그대로 카페를 나섰다. 그렇게 도망쳐버렸다.

 

*

 

 “아.......”

 

최악이야. 로카는 길가에 쭈그려 앉아 제 무릎를 감싸안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며 떠올려보니 손 끝부터 차게 식어온다. 정말 별로네. 제대로 해내고 싶었는데. 끝 정도는 잘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그럭저럭 잘 포장해왔는데. 완전 이상해졌잖아. 스스로를 타박하고 있자니 소매가 젖어온다. 로카는 소매 그대로 눈가를 닦아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쉰다.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로카는 자신의 등을 톡톡 두드리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그대로 익숙한 눈동자를 마주쳤다.

 

“어.”

 

환각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먼저 튀어나왔다.

 

“저... 로카 아까 좀 평소랑 달라 보여서.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걸까 하고.”

 

뿌옇게 눈물이 차오르는 느낌에 로카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안간힘을 써보아도 좀처럼 잠기지가 않았다. 눈을 깜빡이며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고서야, 시야가 선명해지면서 제 앞에 서 있는 이로하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이로하는 분명히 로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로카는 반대로 로카는 손발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풀리며 숨을 탁 내놓을 수 있었다.

 

“나.”

 

정말 당해낼 수 없을 거야, 나는.

 

“이로하를 좋아해.”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지만, 로카는 이로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답은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면 충분해. 나 이제부터 혼자 노래방에 가려고 해. 실컷 사랑 노래 이별 노래를 부르고 그 다음엔 칸다강에 가서 물 흐르는걸 가만히 보다가 편의점에서 맥주를 세 캔정도 사서 집에 돌아갈 거야.”

 

남은 눈물을 모두 내어놓고 로카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정말로, 좋아했어.”

 

*

 

집에 돌아온 로카는 편의점 봉투를 주방에 대충 던져두고 방에 들어가 외투를 걸어두었다. 그러다 건드린 마우스에 낮에 미처 끄지 못한 모니터가 밝아진다.

 

<짝사랑 혼자 끝내는 방법>

 

로카는 제대로 모든 화면을 끄고 컴퓨터의 전원을 내린다.

 

Posted by 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