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언라2019. 12. 17. 10:16

1.

 

저거.

 

언젠가의 그가 언제나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신 같아.

 

그녀가 돌아보았을 때 그는 의욕 없이 엎드린 채로 한 팔만 들어다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손끝을 따라가니 한쪽 벽에 검은 거미 한 마리가 느긋하게 천장을 향해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의외의 센스가 있네, 당신. 거미는 분명 지혜로운 여성을 상징했지?

?

 

한마디에 쉽게도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모습이 그답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혜로운 여성? , ! 그냥 먹이를 기다리면서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꼴이 당신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쏘아붙인 끝에 그는 습관처럼 몇 번이고 반복했던 한마디를 더했다.

 

기분 나쁜 여자.

 

내가 당신 이야기에 동의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마르그리드는 듣지 못할 이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

아니, 이쪽 얘기야.”

 

마르그리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거울이라도 있는 양 똑같은 모습의 마르그리드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쪽은 끝자락에 얼굴이 묻은 흰색 실험복 차림에 초조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반면에 다른 한쪽은 엔지니어들의 가벼운 차림과 함께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얼굴, 체형 그리고 목소리 무엇 하나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의 상대방에게 두 사람은 서로 지독한 거부감을 느꼈다.

 

저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요. 누구, 당신?”

 

연구복 차림을 한 쪽의 마르그리드가 한 발 물러서며 경계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동의할게, 로쏘. 정말 기분 나쁜 여자네. 마르그리드는.’

 

한발 더 물러서더니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그녀는 한 팔을 펼쳐 들었다. 무엇인가를 보호하려는 듯 한 그녀의 몸짓에 마르그리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너머를 향했다. 희뿌옇게 시야 밖에 있던 배경은 기계가 그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시야를 따라 점점 거대해지는 모습은 분명 마르그리드의 기억 한편에 있었다. 끊임없이 웅웅 울어대는 소리는 그 기계의 것이었다. 정체는 좀처럼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마르그리드는 자신이 저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뿐이었다. 마르그리드는 다시 시선을 자신의 앞에 선 '마르그리드'에게로 돌렸다. 잔뜩 어깨를 굳힌 그녀를 바라보며 마르그리드는 생각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 몸이 굳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보이고 싶은 모양이라고. 그리곤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답을 주었다.

 

나는 당신이야.”

이해할 수 없어요.”

 

마르그리드의 이야기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거짓말.”

 

또다시 한 발을 물러서는 그녀에게 맞춰 마르그리드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이미 모든 판단을 내리고 생각하고 있잖아, 당신. 혹시 다시 한 번 말해주길 바라는 거야?”

 

두 사람의 눈동자는 미동 없이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이내 마르그리드의 눈이 보기 좋게 휘었다. 가늘게 뜬 눈초리로도 마르그리드는 그녀가 살짝 뒤로 뻗은 손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마르그리드야.”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마르그리드는 나예요. 당신이 마르그리드라고 하는 건.”

그거 자기가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발언인 거 아니야?”

그 말은.”

 

그녀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무니 기계소리가 더 크게 두 사람 사이를 매웠다. 다시 입을 열고도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그녀는 이내 쏘아붙이듯이 이야기했다.

 

아니. 아니에요. 나는, 나는 인정할 수 없어요.”

그래?”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스쳤다.

 

, 그래. 내기를 할까?”

 

나쁘지 않은 여흥이 될 것이다. 진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마르그리드를, 그녀는 불안한 듯 올려보았다.

 

 

2.

 

마르그리드가 보는 또 한 명의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연구실에서 책상에 파묻힐 것 마냥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을 쉼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나 평소와 다른 바 없는 그녀의 모습에 마르그리드는 눈을 흘겼다. 재미가 없네. 마르그리드는 천천히 미끄러져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그녀가 몰두해있는 문서에 가득한 것은 마치 암호와 같은 수식들인데다 종이 한가득 흘겨 쓴 마르그리드의 필체로 까맣게 덥혀있었다. 하지만 종이 위의 점 하나까지도 마르그리드에게는 숨 쉬듯이 익숙한 것이었다.

 

소용돌이 관측지역과 케이오시움 농도에 대한 논문?”

 

아무런 기척도 없었을 터이지만 마르그리드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무덤덤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조금의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 그녀로 인해 마르그리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저답지 않은 비명을 지르곤 했다. 하지만 어떤 일이라도 반복되면 덤덤해지기 마련.

 

시시하네.”

도와줄 게 아니라면 좀 사라져 주세요.”

정말로? 안심할 수 있겠어? 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말이야.”

 

마르그리드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대답 없이 다시 시선을 논문 쪽으로 향하려 하는 그녀에게 마르그리드는 뒤편에서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왜 그래? 오늘따라 더 까칠하네.”

 

마르그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그리드는 그런 그녀의 오른팔에 제 팔을 엮으며 말했다. 쥐고 있던 펜이 떨어졌다.

 

초조해?”

 

작은 목소리이었지만 그녀의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는 마르그리드에겐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웃음기 가득한 그 목소리에 마르그리드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실패할 거야. 내가 거쳐 온 길인걸.”

 

기계소리가 크게 울렸다.

 

 

3.

 

늦은 시각, 긴 복도임에도 보이는 모든 방은 불이 꺼져있었다. 여느 때 같았다면 모두가 정리를 마치고 돌아간 시각이라도 마르그리드의 연구실만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은 복도 어느 곳으로도 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긴 마르그리드는 복도를 가로질러 문 안으로 들어가 또 다른 마르그리드를 찾았다. 그녀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손을 늘어뜨린 채 제 눈앞의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화면 가득 수식과 회로를 띄우고 있던 모니터는 두 연인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다가온 마르그리드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가득한 오래된 영화. 곧이어 화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화면 속의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이거.”

직접 복원했어요.”

 

분명 아무 기척도 없었을 터인데 그녀는 놀라지 않고 마르그리드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시선은 여전히 화면을 향한 채였다. 마르그리드도 화면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괜찮은 취향이네.”

 

마르그리드는, 마르그리드의 이야기에 그녀를 힐끔 돌아보더니 다시 모니터를 향하며 답했다.

 

, 그렇겠죠.”

그러네.”

 

배경음이 고조되며 긴장된 분위기 속에 화면에는 그 여자가 아이를 안은 채로 등장했다. 마르그리드가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죽을 거야.”

알아요. 이미 몇 번이나 본 영화예요.”

그래.”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거미 같은 여자라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

아니.”

 

 

 

 

4.

 

그 날 따라 그녀가 유독 기뻐 보였다. 그 모습에 괜히 또 기분이 나빠져 마르그리드는 퉁명스레 말을 붙였다.

 

드문 일이네.”

 

앞도 뒤도 잘린 그 한마디로 마르그리드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곤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내일이에요. 내가 이길 거예요.”

 

마르그리드는 잠시 아무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야기 탓이 아니었다. 그녀의 처음 보는 환하게 웃는 표정이, 마르그리드에게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렇게 웃은 적이 있었던가.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마르그리드에게 있어 몸과 함께 버린 무수한 파편들 중 하나일는지도 모른다. 마르그리드는 제 앞에 의뭉스런 표정이 떠오르고야 다시 한 번 그녀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녀 또한 마르그리드에게 앞뒤 사정과 함께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짐작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내기를 할까?

 

. 그래.”

 

동시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기억이었다. ‘이오시프였던가? , 당신 남편 말이야. 질 나쁜 남자였잖아.’ 한참 듣지 못한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큰 폭발과 함께 괴물들이 연구실에 난입했다는 진술이 있었다.’ 이상하리 만치 깨끗해진 기록을 복원하자 그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조각조각 잘린 것들을 이어 붙여 그려낸 그림에 내일의 광경이 있었다. 마르그리드는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분명 방금 표정이 흐트러졌다고. 하지만 들뜬 상대는 마르그리드의 표정은 보고 있지 않았다. 어느새 이미 돌아서 들떠서는 모니터에 떠오른 언어들을 점검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야기의 결말이 눈에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잠시 몸을 피한 후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돌아와, 이 세계의 그녀를 비웃어 주면 될 일이다.

 

마르그리드도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돌아섰다. 뒤편에 자리한 요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아이를 품을 요람. 자신의 기억에 찾아낸 정보는 아니었다. 이 또한 조각을 찾고 기워 맞춰 그려낸 그림의 일부였다. 일그러진 그림의 한가운데 그 기계가 있었다. 기분이 나빠져 오는 한편으로 참을 수 없이 우스워, 마르그리드를 눈썹을 찌푸린 채 웃었다. 그 또한 우스운 모습이었다.

 

 

5.

. 안 돼. 여기까지 왔으니까.

전원 구속한다. 그대로 엎드려.

마르그리드. 시키는 대로 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전부 화면 너머에서 보는 무대 같았다. 이미 대본을 넘겨다 본 그녀에게는 정말 시시한 무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곧이어 펼쳐지는 클라이맥스.

 

그렇군요. 당신이었군요.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마르그리드 또한 자신이 상정했던 상황과는 조금 빗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녀의 과거 같은 것이 아니다. 마르그리드가 이때의 마르그리드와 만나게 된 시점에서 이것은 과거가 아닌 또 하나의 가능세계였다. 그것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이상하다. 마르그리드는 생각했다. 저 여자는, 마르그리드는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그렇게나 어리석었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큰 흐름에 휩싸여 흘러가는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기분 나빴다. 선택받은 자.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것이 비꼬는 말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마르그리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마르그리드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마르그리드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너무 간과한 것은 아닐까? ‘마르그리드라고 하는 변수가 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컸던 것인가. 마르그리드는 생각을 계속했다. 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마르그리드는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그런데 왜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

 

마르그리드는 아이를 끌어안고 몸을 말았다.

 

총성이 긴장을 끊어냈다. 무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시에 마르그리드의 생각이 멈췄다.

 

실험실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 한가운데 마르그리드와 마르그리드 그리고 아이가 있었다. 총성은 금방 사그라졌다. 마르그리드의 눈은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눈을 가린 손은 마르그리드의 것이었다. 뒤에서 나타나 한 손으로 마르그리드의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르그리드 품 안의 아이를 지지했다.

 

결말은 대본과 다를 것이 없었다. 심연의 생물은 모든 것을 삼켰다. 아이와 그 아버지만을 제외하고. 마르그리드와 마르그리드는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마르그리드는 그 짧은 순간, 눈에 스친 벽을 기어오르는 거미를 보며 웃었다.

 

내가 이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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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언라2018. 8. 19. 22:11

 "......그렇게 된 거야."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끝을 맺는 이블린의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그녀는 슬며시 제 앞의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가만히 그 안을 내려보았다. 잠시였지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조금 더 이블린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그녀가 더는 다른 말이 없자 금새 다들 각자 관심을 여기저기로 돌리기 시작했다. 성유계도 지상세계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그들을 위해 마련된 짧은 티타임의 장소. 그 원탁을 에둘러 이블린 정 반대편, 도니타는 제 옆에서부터 원탁을 둘러 앉은 이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쉐리. 스테이시아. 네넴. 씨씨. 마르그리드. 샬롯. 나딘. 아인. 이블린. 샬롯. 파르모. 지시자. 레드그레이브. 그리고-


 흐응. 도니타는 제 왼편으로 몸을 내밀어 그곳에 앉은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가 싶더니 몸을 돌리고 팔짱을 끼며 다시 의자에 몸을 던졌다.


 "
짧은 머리는 이런 느낌이구나."


 그녀의 혼잣말에 대한 대꾸는 한 자리 건너에서 들려왔다.


 "
짐의 인형에게 무슨 관심이라도 있더냐."
 "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내게 훨씬 좋거든."


 두 사람이 입꼬리를 밀어 올린 채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짧게 쉐리와 쉐리 사이에 서로에 대한 위로의 눈빛이 오갔다. 짧은 한숨 뒤로는 졸고 있는 네넴을 바라보는 스테이시아가 있었다. 아인과 나딘, 파르모와 지시자는 한데 모여 이야기에 열중이었다.


 "
소란스럽네요."
 "
그러게."


 그 모습을 웃으며 가만히 바라보던 씨씨가 슬그머니 이야기하니 마르그리드 또한 가만히 답했다. 대답이 돌아왔다고는 하나 제 쪽은 보지도 않고 입술만 달싹이는 모습에 씨씨는 입을 삐죽였다.


 "
선배 좀-"


 불만에 찬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했다. 공간을 가득 울리는 웅장한 종소리는 벽을 치고 몇번이나 다시 귀로 돌아왔다. 씨씨 뿐 아니라 모두가 우뚝 멈춰서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내 소리는 사그라져 여음만 자르르 귀에 남았다. . 찻잔이 원탁에 부딪혀 긴장을 끊었다.


 "
, 일어날까."


 마르그리드의 한마디가 신호인 양 그녀의 반대편에 위치한 문이 저 혼자 스르르 열렸다. 별다른 무늬가 없음에도 그 크기에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듯 위압감이 느껴지는 문이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한 명 한 명 줄지어 문을 나섰다. 그렇게 줄의 끝에 선 지시자의 모습까지 문 너머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다시 빼꼼 문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까치발을 들어 문고리를 붙들곤 한 손가락을 가만히 제 손에 가져간다.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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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언라2014. 12. 10. 17:40

아무것도 아닌 공간에 마르그리드는 혼자였다. 그녀는 두 팔을 앞을 향해 뻗어보았다. 그리고 마르그리드는 가만히 눈을 감고 허공을 향해 웃음 지었다. 그녀의 위로 몸을 겹치듯 돌연 나타나, 심기가 불편한 듯 퉁명스레 물음을 던지는 이 또한 마르그리드였다.

“뭘 그렇게 웃고 있어?”

울고 나의 몸 커서 아이 웃는

그 자리에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 마르그리드의 대답은 조각조각 흩어져있었다. 이내 흐릿한 형체가 점점 분명해짐과 함께 그녀의 말 또한 뭉쳐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마냥 마르그리드에게 다시 전해져왔다.

나의 아이가 웃고 있어요.
“당신은 만족하는 거야?” 

마르그리드가 대답을 하는 듯 입을 움직이고, 조금 후에야 메아리친 소리가 반대쪽의 그녀에게 들려왔다.

“괜한 걸 물었네.”
그러게요. 이번엔 당신이 의미 없는 질문을 내게 했네요.
“당신은 실패했어. 내가 그랬듯이 말이야.”
하지만 나는 만족해요. 아마도 당신이 그렇듯이.
“이해할 수 없어.”
거짓말.

마르그리드는 웃고 있었다. 마르그리드는 뻗었던 두 팔로 그녀의 앞에 있는 자신을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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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언라2014. 12. 3. 21:47

1.


‘---야.’

누이. 나의 첫 기억은 누이가 나의 이름을 불러 준 것이랍니다. 너무 들여다보아 바래고 바랜 사진 마냥 흐릿할망정 그 목소리를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 날 이름으로 불러준 것이 누이가 처음이었기 때문일까요. 누이도 지금보다 조금 앳되어 달큰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던 것을 아무것도 모르던 옛적의 나도 퍽 좋다고 배시시 웃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아바마마의 여섯 번째 손이라는 위치를 이해할 때 즈음, 또 나와 누이의 어미가 다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나이 즈음이 되어서는 누이는 날 이름이 아니라 왕자라 불렀지요.

‘왕자. 공부는 잘되어가나요?’

누이가 그렇게 물어 올 때면 제가 무어라 대답했던가요. 누이의 목소리는 모두 기억하는데 제 대답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어린 치기에 여섯 번째 왕자가 공부는 해서 무엇하냐 했던가요. 아니. 아니겠죠. 나는 누이의 앞에선 언제고 착한 아이이고 싶어 했으니까요. 눈도 못 맞추고 또 바닥을 보며 오늘은 무얼 공부했다 이야기했겠죠. 누이의 칭찬을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또 유독 분명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습니다, 누이. 누이가 처음으로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린 날 말이에요. 결국, 끝까지, 지금까지도 누이는 나에게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았지요. 그저 내 손을 꼭 잡아 주며 몇 번이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몇 해 만에 누이의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들었는지요. 누이도 그 날을 기억하나요? 누이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날 누이가 내 이름을 불러준 횟수만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답니다. 내가 누이를 지키겠노라 말이에요.

하지만 누이, 누이도 알다시피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요 나의 오만이었습니다. 누이는 내 도움을 바라지 않을 만치 강한 여인이었어요.

‘왕자. 왕자가 왕이 되어요. 내가 왕자를 도울 거에요.’

한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왕자의 도움 아래 설정도로 야망이 없는 이도 아니었지요. 또 나는 누이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착한 왕자였고요.

덜 여문 제 머리에 아바마마께서 쓰셨던 금관은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왕좌에 앉은 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리고 손이고 주책없이 떨려와 잠시 앉아있겠노라 들어온 내 공부방에서 나갈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요. 밖에서는 시녀들이 어서 가야 한다며 닦달인 것을 고함을 냅다 질러다 쫓아내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추려 했습니다. 험한 말을 써가며 윽박지르는데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이 누이였어요. 달달 떠는 손을 누이가 꼭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분명 그 자리에서 도망쳤겠지요. 그것이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누이, 어째서 나는 아직도 이 관이 이리도 무거운 걸까요.

“나를 사랑했나요, 왕이시여. 무얼 바라고 내 앞에 섰나요.”

누이는 또 처연히도 웃는군요.

“왕자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나를 사랑했나요?”

재차 물어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어요, 누이. 그냥 날 보아 주세요. 나는 누이의 바람대로 허리를 펴고 가신을 내려보는 당당한 왕이 되었습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럼 모든 것은 누이의 뜻대로 될 것이에요.

“나의 작은 왕. 나를 사랑했나요?”

누이는 웃는다. 울듯이 웃는다.



2.


“고민이라도 있나요?”

멍하니 책자를 바라보다 서책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바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둥대고 있자니 누이가 다시 한 번 물어온다.

“아니면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나요? 표정이 좋지 않아요.”

“아니요. 그냥 조금 다른 생각을 했어요, 누이.”

누이가 또 무어라 이야기하기도 전에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혹시 내가 도움될 일이 있거든 말해주시게. 그대와 나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가 아닌가.“

그는 내 마주 편에 서서 말했다. 말인즉슨 그는 바로 누이의 옆자리에 서 있었다. 셋이 한 자리에 있을 적이면 나의 자리는 언제나 그와 누이가 나란히 선 건너편이었다.

“여러모로 말이야.”

나는 그의 웃음이 싫었다.

그는 큰 사내였다. 그가 말할 때면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당당함. 결단력. 내가 갖추지 못한 왕의 자격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내 누이의 시선 또한 가져가 버렸다. 등을 보고 있노라면 짓눌리는 기분에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그런 사내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누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선대의 때부터 황국의 관리로서 이곳, 궁에 머무르며 정치에 깊게 관여하고 있던 그는 누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누이는 나를 왕으로 만들었다.

누구도 앞에서 말해주지 않건만 뒤의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잘만 흘러들어온다. 허수아비 왕. 누이의 꼭두각시.

“황국과의 관계 유지는 이대로 할 것이고 백성들의 안정을 생각하여 개혁 정책의 시행은 천천히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누이의 뜻대로 하세요.”

누이의 뜻대로 하세요. 이 자리에 앉은 후로 내가 가장 많이 입에 담은 말이었다. 하나 아무래도 좋았다. 누이가 날 보아만 준다면 나는 언제나 누이의 나이 어린 왕자가 될 뿐이었다.

“나는 먼저 일어날게요, 누이.”

“그럼 또 보지.”

답을 한 것은 누이가 아니었다. 그가 먼저 인사를 하니 누이는 그저 살풋 웃으며 나를 보냈다. 나는 누이를 향한 그의 웃음이 싫었다. 또한, 그를 향한 누이의 웃음이 싫었다.



3.


모든 것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다 하여도 내가 줄 위의 광대가 되면, 그것으로 이 극은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는 것 아닌가? 큰일을 위해 작은 것들은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말이야.“

“짓궂네. 내가 나고 자란 궁은 이런 곳이라고 칭하는 건가요?”

허나 그 안일하였던 생각은 우연히 문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면서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동생은 이제 제 발로 설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말이야. 모든 것은 준비되어있어. 그대가 힘을 펼칠 자리가, 황궁에 말이지.”

본래부터 숨어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절로 숨이 멎어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것인가 생각하는 사이에 앞으로 나설 기회를 놓쳤을 뿐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보모 일이나 다름없지 않나.”

두 사람이 지금 무슨 이야길 하는 건가? 누이가 이 궁에서 떠난다는 것인가? 그럼 나는? 나는 무얼 위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지? 생각들이 맴돌았다. 제자리를 돌아 모든 생각은 하나로 모였다. 누이가 사라질 것이다. 손이 떨렸다. 수많은 문자들로 머릿속이 꽉 들어차 정작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판단하지 못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순간에 누이의 등 너머로, 누이와 입을 맞추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4.


발소리가 크게도 울린다. 돌벽에 닿는 손끝이 차다. 행여 누이가 춥지는 않을까. 계단을 오른다. 절로 굽는 허리를 다시 편다. 나는 왕이 될 것이다. 나는 그를 덮을 것이다. 뒤에서 맴도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5.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타박이며 조금 빠른 것이 답지 않게 서두르는 기색이 서려 있지만 아마도 누이의 것이리라.

“국왕!”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어서와요, 누이. 어인 일로 내 방을 찾았나요?”

나는 웃으며 누이를 맞는다.

“물을 것이 있습니다.”

“아니 잠깐만.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보아요, 누이.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정돈되지 않는 표정에, 드물게도 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게 되려나 싶었지만 역시나 누이는 잠깐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차분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에요.”

“안돼요. 내 이야기부터 들어요, 누이.”

장난스레 웃으며 이야기하는 나를 누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보고 있는 걸까요. 또 내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누이는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요? 분명 언제나의 그 변함없는 상냥한 미소와는 다른 것이겠죠. 누이는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하는군요.

“좋아요. 먼저 듣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누이는 황궁으로 가주세요. 이번에 제게 힘을 실어 주시겠다 약조하신 황궁의 관리분이 누이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누이는 큰 뜻을 지닌 분이 아니십니까? 저를 위해 황궁으로 가주세요.”

“지금 황궁이라 하셨습니까? 대체 누가-“

떠는가요? 누이가 제게 보여주는 표정은 그것인가요?

“그럼 그는… 그분은 어떻게….”

“그분?”

나는 예의 그 미소와 함께 이야기한다.

“그게 누구죠?”

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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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언라2014. 6. 3. 20:27
1.

밤이다. 어둡고, 물론 내가 앞을 못 볼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대단하거든. 이 정도도 분간못해서 휘청거리는 다른 인간 같은 것들은 불쌍해. 아 또 말이지 잔잔하고. 달도 밝고. 맞아, 춥지도 않네. 얼마전까지만 해도 꽤 추웠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때는 아무리 나라도 웅크리고 있는데도 몸이 오들오들 떨리더라니까? 그러니까 음... 뭐였지? 아, 그래. 밤이다. 슬슬 조금 움직여 봐도 좋겠네. 우선 일어나서 다리부터 허리까지 쭉 펴고, 목도 쭉 뻗어보고, 크게 한번 울지. 준비 끝. 여기서 뛰어 내려갈까 생각도 했는데, 물론 내 몸에 몇배나 되게 높기는 하지만 나는 대단하거든, 밑으로 걷다가 인간이나 다른 것들이랑 마주치면 귀찮으니까. 저 밑은 인간 하나면 꽉 차게 좁잖아. 이 위는 길이 좁기는 해도 나만 걸어가거든. 오늘 밤 산책은 이 담장 윗길로 하기로 결정했어. 나는 말이지 이번에 내가 자리 잡은 곳이 꽤나 맘에 들어. 내가 여길 좋아하는 이유? 그야 일단 조용하거든. 시끄러운 인간들이 적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높기만한 건물들 사이로 한낮에 절묘하게 해가 드는데, 그게 좋아. 낮잠 자기엔 최고의 장소잖아.

뭐, 가끔은 이렇게 시끄럽고 귀찮은 인간들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말이야. 이 정도는 참아줘야지. 하여튼 우충충한 얼굴로 내 영역에 들어 왔을 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지. 좀 가라 가. 가라. 귀찮으니까 좌절은 좀 다른 것에 가서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땅만 보고 걷길래 저렇게 그냥 가겠거니하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하필 딱 눈이 마주쳐서 이게 뭐하는 건지. 레드그레이브님인지 뭔지 모르겠고, 니가 꾸중 들은 얘기를 왜 나한테 늘어 놓는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만 좀 가버려! 이제 잘거니까 말이지, 눈 앞에다 대고 하품을 해주면 알아서 가버리지 않을까?

"너 날 위로해 주는거냐? 한낱 미물에게 위로를 받게 되다니..."

답이 없군. 웃지마. 기분 나빠.

"그래 알겠다. 실수를 했다면 차라리 레드그레이브님 앞에 무릎꿇고 벌을 받으라는거지?"

오, 이런.

"좋아. 그럼 난 이만 가보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등을 보고 있자니, 어휴, 맥이 빠졌어. 산책은 그만둘래.


2.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가. 먹을거? 있어? 놓고 가. 뭐야 없어? 그럼 가버려. 하여튼 꼬마들은 귀찮게 군다니까. 겨우 보냈-에이! 기껏 한 무리 가나 싶었더니 또 누구야? 어? 너냐 작은 여자. 이 녀석 또 왔네. 뭐, 이 녀석이야 빛을 가리는 것도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야, 야야야야야. 만지지는 마. 만지지 말라니까. 보고 있는 것 참아줬더니만 어딜 손을 뻗을라고 그래. 그래그래. 너 잘치운거야. 손 댔으면 물거였다고.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구나."

뭐 좋다고 웃는건지 모르겠네. 그만 가라. 기분 나빠졌어.

"역시 그와 닮았구나."

가라니까.

"그라이바흐..."


3.

거기 둘. 그런 건 좀 아무도 안보는데서 하지 그러냐? 여기 내가 보고 있잖아. 하암. 암컷이랑 수컷이 혈기왕성한 때인것 알겠다만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건데 말이지 인간들은 역시 이상해. 조금 아까는 조금 이상한 인간이 여길 지나갔는데 처음엔 털이 길어서 암컷인가 했더니 수컷이더라고. 표정은 꼭 어디 아픈것 같아서는. 구석에서 헉헉대더니 지 옷 꽉 잡고 울기 시작하는데 누구? 메리아? 뭐 그런걸 중얼거리면서 또 한참을 울더라. 돌아갈땐 시치미를 뚝 떼고 정색하는데, 이상한 인간이었어. 인간이니 이상한걸까? 그런것 보다 저 높은 탑이 없어지면 여기가 좀 더 좋아질 것도 같은데 말이야. 우선 해가 더 잘들테니까.

"너도 혼자니?"

이 인간 언제부턴지 날 빤히 쳐다보더니만 내 놓은 소리가 이거야. 그냥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가버리더라고. 그치만 '너도'냐니? 물론 나는 혼자지. 하지만 그 인간은, 그 인간 뒤에서 날 빤히 노려보고 있는게 분명 있었는데 말이야.

오늘은 구름이 가깝네. 나른하고, 평화롭고, 조용하고, 좋다. ...아무튼 말 끝나기 무섭게 나타나네. 인간이란 것들은 말이야. 저건 뭘까... 한 인간이 여기로 소란스럽게 뛰어들어오더니 말이지 저쪽 벽에 쭈그리고 앉아버리는 거야. 뭐하는 건가 하고 나도 모르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니까 찡긋거리면서 손가락을 자기 입에 가져다 대는데, 작은 것도 아니고 커다란 수컷이 저러니 과연 안어울리는군. 나 표정 찌푸렸다고 이봐.

어. 저건 뭐지? 저거, 저거, 저거, 저 동그란거. 저거, 저, 저거. 잡고 싶어. 잡고 싶- 놀랐어! 저 동그란거에서 빛이 나오더니 인간이 나타났어! 인간이란건 저런 것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었구나.

"미리안. 여기에요."

아니아니아니아니 정말로 놀랐어. 놀라있는 사이에 아까 그 수컷은 사라져 버렸더라고. 깜짝 나타난 인간은 날 빤히 보는데. 왜. 뭘봐.

"당신, 나와 닮았네. 인간을 보는 눈이 말이에요."

무슨 소리야. 그 이상한 여자 말이야 이상한 말만 하고 사라졌는데, 아니 나는 그렇게 나타나고 사라지지 못하는데. 역시 인간들은 이상해.


4.

저거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저 달 말이야. 하암. 저 빨간 망토 요즘 많이 보이는걸. 가만. 어제 울고 있던 그 인간도 저거 였던가? 내 알 바 아니긴 하지만. 그보다 또 왔네, 이 작은 인간. 인간? 아니 아무래도 좋지만. 아무튼 난 잘거니까 어서 가버려.

-

"...목표와 해야 할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건 살가드, 당신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이봐, 송. 일단 내 얘기를..."
"그만. 조금 기대했다만 역시 너도 어쩔 수 없는... 아니, 먼저 가지."

조용히 좀 해. 잠이 깼잖아. 또 너냐, 인간.

"또 네녀석에게 위로를 받게 되는구나."

아니 됐으니까 그냥 조용히 하라고.

"고맙다."


5.

몸 좀 쭉 펴고 꼬리도 좀 세우고 살랑살랑. 꼬맹이들은 귀찮아. 특히 시끄럽고 말이야. 눈에 안띄는게 상책이란 말이지. 아까부터 내 골목에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작은 인간들이 먼지나 일으키고 있거든. 직접 귀찮게 구는 것 보다야 낫지만. 어제 그 이상한게 붙어 있던 인간도 혹시나 저런걸 바란건가. 어찌됐든 꼬맹이들이 보기 전에 자리부터 옮겨야겠네. 가끔 땅이 흔들려. 인간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 말이야. 아 그래 인간. 인간? 아무튼 그런 것들말이야 너무 많지 않아? 이대로 눈 감고 걷다 보면 제일 먼저 부딪히는 건 틀림없이 인간일거야. 아니면 인간과 비슷한 그것들.


6.

또냐? 너 같이 유난인 인간도 오랜만이다. 안놀아줄거야. 그냥 가버어어어어- 이 냄새! 냄새! 먹을거지! 그치? 줘 ! 내놔! 그거 줘, 그거. 그거 나 주려고 가져온거야? 그치? 오 그렇지 거기거기 그렇게 좋아 내려놓고 물러나. 옳지. 그치그치. 가져왔으니 특별히 먹어주지. 제법 괜찮은 녀석이구나 작은인간. 어 뭐야 너 뭘 그렇게 보고 서있어? 너 가야 내려갈거야 나. 그렇게 보고 있어도 가까이 안갈거라니까. 야야, 손대지 마라. 먹을거 하나 가지고 뭘 바라는거야? 우리 아직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 어차피 갈거면서 말이야. 뭘 그렇게 웃냐. 좀, 미안하게 말이지. 어쨌든, 고맙다.


7.

뭔가 온다.

"어? 너 아직도 여기 있었네."

이 인간 갑자기 달려오더니 헥헥대면서 뭐라는거야. 난 너 같은 인간 몰라. 어, 어어어, 저거! 그때 그 여자가 나타났던 동그란 공 맞지? 그치? 아! 저 인간 그때 그 수컷이구나. 쭈그려 앉아있던.

"잠깐 실례 좀 하자."

야 야 누구 맘대로. 이 인간 뭐 하는거야. 왜 멋대로 내 담벼락을 기어오르는데. 저리가. 저리가라니까. 앞 발을 확 할켜버릴라.

"이크."

이번엔 또 뭐야. 새로운 인간이네. 귀찮아. 귀찮아. 좀 니들끼리 저기가서 놀아. 어? 저 빨간 망토, 그건가? 뭘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냐. 저녀석 골목길 입구에서 이쪽만 빤히 보고 있어. 어, 들어오네. 천천히 한발씩 들어오는데, 저녀석은 또 여기 무슨 일이지?

"맥스, 뭔가 찾았어?"

또 다른 인간이잖아. 어휴. 오늘은 무슨 날인가? 귀찮게 말이야. 새로 나타난 인간도 빨간 망토네. 먼저 와있던 녀석한테 말하는거 보니 둘이 아는사이인가? 볼 일 없으면 그냥 가지 그래? 그냥 가라니까? 왜 안가고 나랑 먼저온 녀석만 번갈아 가면서 보고 그래. 난 결백해. 잘못한거 없다니까. 그만 노려봐 임마. 먼저 온 녀석은 또 나만 빤히 보고 있고. 아니, 아닌가? 내가 아니라 이 벽 뒤에 있는 그 인간을 보는건가?

"여기 뭔가 있어?"

응. 있지. ...전부 다 조용해져서 나도 괜히 귀찮아질까봐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삑삑 울리더니 제일 나중에 온 망토 녀석이 품에서 뭔가 꺼냈어. 뭐냐 그건?

"-예. 알겠습니다. 바로 그쪽으로 가도록하겠습니다."

지 혼자 중얼거리더니 괜히 인상 쓰기는.

"가자, 맥스. 저쪽에서 놈들이 나타난 모양이야."

한 놈은 바로 돌아서 나가는데 나머지 한 인간은 계속 이 쪽만 보고 있더라고. 먼저 간 인간이 안보이게 되고 나서야 남아있던 그 망토 녀석도 움직였는데, 끝까지 돌아보더라. 거참. 그럴거면 말이라도 하던가. 아 근데 그러고 보니 인간이 아니었지 아까 그거. 아마 그럴거야.

"미리안 쪽이 성공한 모양이네요."

으힉! 이 여자! 언제 또 나타난거야! 남자쪽도 언제 나왔는지 위에 올라왔네.

"또 봐요."

아니 나는 사양하고 싶은데. 먼저 여자가 붕 내려가더니 남자쪽도 기지개 한번 켜고 씩 웃으면서 따라 내려갔어. 


8.

지금 자면 좋은 꿈을 꾸지 않을까? 이렇게 기분이 좋은걸. 인간만 피하면 귀찮은건 없어. 그러고보면 아주 어릴때 봤던 그거들은 다 어디로 간걸까? 어라? 저거, 그 녀석이네. 뒤에 이상한걸 달고있던 녀석 말이야. 

"싫어. 이젠, 그만. 다 그만두고 싶어."

아, 눈 마주쳤다. 뒤에 달린거랑 눈이 마주 쳤는데 씨익 웃네. 저번에도 느꼈지만, 역시 저거 위험해 보여. 인간 자체도 그렇지만 말이야.

어? 저녀석은! 또 왔냐? 뭐, 어제 그건 맛있었는데. 오늘도 있어? 먹을거 있냐? 넌 위험한 인간은 아닌 것 같으니까. 뭐 조금 더 가까이 와봐도 좋아. 그래. 내가 지금 먹을거에 눈이 팔린게 아니라 그냥 그런거야. 으음. 그래 내가 조금 가봐도 괜찮겠네. 에구구. 기다려봐. 몸 좀 펴고 내려갈테니까.

"맛이 괜찮더냐?"

응. 뭐. 나쁘진 않아.


9

"다음에 지상에 내려가는 일정이... 응. 그래. ...크레니히? 아이는 신경 쓰지 말게. 그 애도 이해해줄 나이야. 그래서..."

이쪽은 보지도 않고 휙 지나가네. 다른 인간들도 저려면 나도 좀 편할텐데.


10.

"먼저 지나가요."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지나갔으면 그냥 지나가면 될 것이지 저 이상한 여자는 왜 돌아서는거야. 역시 이상한 여자라니까.

"우리 아는 사이 아닌가요? 그 쪽 이름이 어떻게 되죠?
"네? 음... 죄송합니다만 기억이 잘 안나네요. 저는 크레니히라고 해요."

왜 말을 안해?

"그래요? 제 착각인가 보네요.

싱겁긴.

-

"안녕하세요, 고양이씨."

어? 너 이상한 여자! 가는거 봤는데 언제 내 옆에 온거야? 하긴 넌 원래 갑자기 나타나고 없어지고 그랬지.

"아까 그 아이 말이에요.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막상 보게 되니 저렇게 자랐구나 하는 감상 정도는 남네요."

뭐라는 거야.

"그래봐야 과거의 잔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말이에요. 그 뒤에 붙어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11.

오늘도 올까, 그 작은 인간?

이제 왔냐, 인간? 오늘은 좀 늦었네. 내려갈테니까 거기서 기다려. 어, 야, 너 손... 그래그래, 인심썼다. 한번 정도야 뭐 그동안 얻어 먹은것도 있고 하니 봐줄- 차가워!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너! 야!

"아. 미안하구나. 많이 놀랐더냐?"

뭐하려고 한거야 너! 가만히 있어 줬더니만 말이야. 엄청 차가웠다고! 어? 너 가냐? 그냥 가면 다야? 야! 야? 이씨... 너, 내일도 올거지?


12.

오늘은 안 와?


13.

여기도 너무 시끄러워졌어. 슬슬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지. 꽤 아까운 장소이긴 하지만 말이야.


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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