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언라2014. 12. 3. 21:47

1.


‘---야.’

누이. 나의 첫 기억은 누이가 나의 이름을 불러 준 것이랍니다. 너무 들여다보아 바래고 바랜 사진 마냥 흐릿할망정 그 목소리를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 날 이름으로 불러준 것이 누이가 처음이었기 때문일까요. 누이도 지금보다 조금 앳되어 달큰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던 것을 아무것도 모르던 옛적의 나도 퍽 좋다고 배시시 웃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아바마마의 여섯 번째 손이라는 위치를 이해할 때 즈음, 또 나와 누이의 어미가 다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나이 즈음이 되어서는 누이는 날 이름이 아니라 왕자라 불렀지요.

‘왕자. 공부는 잘되어가나요?’

누이가 그렇게 물어 올 때면 제가 무어라 대답했던가요. 누이의 목소리는 모두 기억하는데 제 대답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어린 치기에 여섯 번째 왕자가 공부는 해서 무엇하냐 했던가요. 아니. 아니겠죠. 나는 누이의 앞에선 언제고 착한 아이이고 싶어 했으니까요. 눈도 못 맞추고 또 바닥을 보며 오늘은 무얼 공부했다 이야기했겠죠. 누이의 칭찬을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또 유독 분명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습니다, 누이. 누이가 처음으로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린 날 말이에요. 결국, 끝까지, 지금까지도 누이는 나에게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았지요. 그저 내 손을 꼭 잡아 주며 몇 번이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몇 해 만에 누이의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들었는지요. 누이도 그 날을 기억하나요? 누이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날 누이가 내 이름을 불러준 횟수만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답니다. 내가 누이를 지키겠노라 말이에요.

하지만 누이, 누이도 알다시피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요 나의 오만이었습니다. 누이는 내 도움을 바라지 않을 만치 강한 여인이었어요.

‘왕자. 왕자가 왕이 되어요. 내가 왕자를 도울 거에요.’

한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왕자의 도움 아래 설정도로 야망이 없는 이도 아니었지요. 또 나는 누이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착한 왕자였고요.

덜 여문 제 머리에 아바마마께서 쓰셨던 금관은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왕좌에 앉은 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리고 손이고 주책없이 떨려와 잠시 앉아있겠노라 들어온 내 공부방에서 나갈 생각을 못 하고 있었지요. 밖에서는 시녀들이 어서 가야 한다며 닦달인 것을 고함을 냅다 질러다 쫓아내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추려 했습니다. 험한 말을 써가며 윽박지르는데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이 누이였어요. 달달 떠는 손을 누이가 꼭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분명 그 자리에서 도망쳤겠지요. 그것이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누이, 어째서 나는 아직도 이 관이 이리도 무거운 걸까요.

“나를 사랑했나요, 왕이시여. 무얼 바라고 내 앞에 섰나요.”

누이는 또 처연히도 웃는군요.

“왕자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나를 사랑했나요?”

재차 물어도 나는 대답할 수가 없어요, 누이. 그냥 날 보아 주세요. 나는 누이의 바람대로 허리를 펴고 가신을 내려보는 당당한 왕이 되었습니다.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럼 모든 것은 누이의 뜻대로 될 것이에요.

“나의 작은 왕. 나를 사랑했나요?”

누이는 웃는다. 울듯이 웃는다.



2.


“고민이라도 있나요?”

멍하니 책자를 바라보다 서책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바로 반응을 하지 못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둥대고 있자니 누이가 다시 한 번 물어온다.

“아니면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나요? 표정이 좋지 않아요.”

“아니요. 그냥 조금 다른 생각을 했어요, 누이.”

누이가 또 무어라 이야기하기도 전에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혹시 내가 도움될 일이 있거든 말해주시게. 그대와 나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가 아닌가.“

그는 내 마주 편에 서서 말했다. 말인즉슨 그는 바로 누이의 옆자리에 서 있었다. 셋이 한 자리에 있을 적이면 나의 자리는 언제나 그와 누이가 나란히 선 건너편이었다.

“여러모로 말이야.”

나는 그의 웃음이 싫었다.

그는 큰 사내였다. 그가 말할 때면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당당함. 결단력. 내가 갖추지 못한 왕의 자격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내 누이의 시선 또한 가져가 버렸다. 등을 보고 있노라면 짓눌리는 기분에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그런 사내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누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선대의 때부터 황국의 관리로서 이곳, 궁에 머무르며 정치에 깊게 관여하고 있던 그는 누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누이는 나를 왕으로 만들었다.

누구도 앞에서 말해주지 않건만 뒤의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잘만 흘러들어온다. 허수아비 왕. 누이의 꼭두각시.

“황국과의 관계 유지는 이대로 할 것이고 백성들의 안정을 생각하여 개혁 정책의 시행은 천천히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누이의 뜻대로 하세요.”

누이의 뜻대로 하세요. 이 자리에 앉은 후로 내가 가장 많이 입에 담은 말이었다. 하나 아무래도 좋았다. 누이가 날 보아만 준다면 나는 언제나 누이의 나이 어린 왕자가 될 뿐이었다.

“나는 먼저 일어날게요, 누이.”

“그럼 또 보지.”

답을 한 것은 누이가 아니었다. 그가 먼저 인사를 하니 누이는 그저 살풋 웃으며 나를 보냈다. 나는 누이를 향한 그의 웃음이 싫었다. 또한, 그를 향한 누이의 웃음이 싫었다.



3.


모든 것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다 하여도 내가 줄 위의 광대가 되면, 그것으로 이 극은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는 것 아닌가? 큰일을 위해 작은 것들은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말이야.“

“짓궂네. 내가 나고 자란 궁은 이런 곳이라고 칭하는 건가요?”

허나 그 안일하였던 생각은 우연히 문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면서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동생은 이제 제 발로 설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말이야. 모든 것은 준비되어있어. 그대가 힘을 펼칠 자리가, 황궁에 말이지.”

본래부터 숨어 엿들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절로 숨이 멎어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것인가 생각하는 사이에 앞으로 나설 기회를 놓쳤을 뿐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보모 일이나 다름없지 않나.”

두 사람이 지금 무슨 이야길 하는 건가? 누이가 이 궁에서 떠난다는 것인가? 그럼 나는? 나는 무얼 위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지? 생각들이 맴돌았다. 제자리를 돌아 모든 생각은 하나로 모였다. 누이가 사라질 것이다. 손이 떨렸다. 수많은 문자들로 머릿속이 꽉 들어차 정작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판단하지 못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순간에 누이의 등 너머로, 누이와 입을 맞추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4.


발소리가 크게도 울린다. 돌벽에 닿는 손끝이 차다. 행여 누이가 춥지는 않을까. 계단을 오른다. 절로 굽는 허리를 다시 편다. 나는 왕이 될 것이다. 나는 그를 덮을 것이다. 뒤에서 맴도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5.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타박이며 조금 빠른 것이 답지 않게 서두르는 기색이 서려 있지만 아마도 누이의 것이리라.

“국왕!”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어서와요, 누이. 어인 일로 내 방을 찾았나요?”

나는 웃으며 누이를 맞는다.

“물을 것이 있습니다.”

“아니 잠깐만.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보아요, 누이.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정돈되지 않는 표정에, 드물게도 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게 되려나 싶었지만 역시나 누이는 잠깐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차분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이에요.”

“안돼요. 내 이야기부터 들어요, 누이.”

장난스레 웃으며 이야기하는 나를 누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보고 있는 걸까요. 또 내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누이는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요? 분명 언제나의 그 변함없는 상냥한 미소와는 다른 것이겠죠. 누이는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하는군요.

“좋아요. 먼저 듣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누이는 황궁으로 가주세요. 이번에 제게 힘을 실어 주시겠다 약조하신 황궁의 관리분이 누이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누이는 큰 뜻을 지닌 분이 아니십니까? 저를 위해 황궁으로 가주세요.”

“지금 황궁이라 하셨습니까? 대체 누가-“

떠는가요? 누이가 제게 보여주는 표정은 그것인가요?

“그럼 그는… 그분은 어떻게….”

“그분?”

나는 예의 그 미소와 함께 이야기한다.

“그게 누구죠?”

Posted by 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