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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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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언라2019. 12. 17. 10:16

1.

 

저거.

 

언젠가의 그가 언제나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당신 같아.

 

그녀가 돌아보았을 때 그는 의욕 없이 엎드린 채로 한 팔만 들어다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손끝을 따라가니 한쪽 벽에 검은 거미 한 마리가 느긋하게 천장을 향해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의외의 센스가 있네, 당신. 거미는 분명 지혜로운 여성을 상징했지?

?

 

한마디에 쉽게도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모습이 그답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혜로운 여성? , ! 그냥 먹이를 기다리면서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꼴이 당신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쏘아붙인 끝에 그는 습관처럼 몇 번이고 반복했던 한마디를 더했다.

 

기분 나쁜 여자.

 

내가 당신 이야기에 동의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마르그리드는 듣지 못할 이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

아니, 이쪽 얘기야.”

 

마르그리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거울이라도 있는 양 똑같은 모습의 마르그리드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른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쪽은 끝자락에 얼굴이 묻은 흰색 실험복 차림에 초조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반면에 다른 한쪽은 엔지니어들의 가벼운 차림과 함께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얼굴, 체형 그리고 목소리 무엇 하나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의 상대방에게 두 사람은 서로 지독한 거부감을 느꼈다.

 

저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요. 누구, 당신?”

 

연구복 차림을 한 쪽의 마르그리드가 한 발 물러서며 경계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동의할게, 로쏘. 정말 기분 나쁜 여자네. 마르그리드는.’

 

한발 더 물러서더니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그녀는 한 팔을 펼쳐 들었다. 무엇인가를 보호하려는 듯 한 그녀의 몸짓에 마르그리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너머를 향했다. 희뿌옇게 시야 밖에 있던 배경은 기계가 그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시야를 따라 점점 거대해지는 모습은 분명 마르그리드의 기억 한편에 있었다. 끊임없이 웅웅 울어대는 소리는 그 기계의 것이었다. 정체는 좀처럼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마르그리드는 자신이 저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뿐이었다. 마르그리드는 다시 시선을 자신의 앞에 선 '마르그리드'에게로 돌렸다. 잔뜩 어깨를 굳힌 그녀를 바라보며 마르그리드는 생각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 몸이 굳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보이고 싶은 모양이라고. 그리곤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답을 주었다.

 

나는 당신이야.”

이해할 수 없어요.”

 

마르그리드의 이야기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거짓말.”

 

또다시 한 발을 물러서는 그녀에게 맞춰 마르그리드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이미 모든 판단을 내리고 생각하고 있잖아, 당신. 혹시 다시 한 번 말해주길 바라는 거야?”

 

두 사람의 눈동자는 미동 없이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이내 마르그리드의 눈이 보기 좋게 휘었다. 가늘게 뜬 눈초리로도 마르그리드는 그녀가 살짝 뒤로 뻗은 손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마르그리드야.”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마르그리드는 나예요. 당신이 마르그리드라고 하는 건.”

그거 자기가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발언인 거 아니야?”

그 말은.”

 

그녀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무니 기계소리가 더 크게 두 사람 사이를 매웠다. 다시 입을 열고도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그녀는 이내 쏘아붙이듯이 이야기했다.

 

아니. 아니에요. 나는, 나는 인정할 수 없어요.”

그래?”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스쳤다.

 

, 그래. 내기를 할까?”

 

나쁘지 않은 여흥이 될 것이다. 진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마르그리드를, 그녀는 불안한 듯 올려보았다.

 

 

2.

 

마르그리드가 보는 또 한 명의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연구실에서 책상에 파묻힐 것 마냥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을 쉼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나 평소와 다른 바 없는 그녀의 모습에 마르그리드는 눈을 흘겼다. 재미가 없네. 마르그리드는 천천히 미끄러져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그녀가 몰두해있는 문서에 가득한 것은 마치 암호와 같은 수식들인데다 종이 한가득 흘겨 쓴 마르그리드의 필체로 까맣게 덥혀있었다. 하지만 종이 위의 점 하나까지도 마르그리드에게는 숨 쉬듯이 익숙한 것이었다.

 

소용돌이 관측지역과 케이오시움 농도에 대한 논문?”

 

아무런 기척도 없었을 터이지만 마르그리드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무덤덤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조금의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 그녀로 인해 마르그리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저답지 않은 비명을 지르곤 했다. 하지만 어떤 일이라도 반복되면 덤덤해지기 마련.

 

시시하네.”

도와줄 게 아니라면 좀 사라져 주세요.”

정말로? 안심할 수 있겠어? 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말이야.”

 

마르그리드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대답 없이 다시 시선을 논문 쪽으로 향하려 하는 그녀에게 마르그리드는 뒤편에서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왜 그래? 오늘따라 더 까칠하네.”

 

마르그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르그리드는 그런 그녀의 오른팔에 제 팔을 엮으며 말했다. 쥐고 있던 펜이 떨어졌다.

 

초조해?”

 

작은 목소리이었지만 그녀의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는 마르그리드에겐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웃음기 가득한 그 목소리에 마르그리드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실패할 거야. 내가 거쳐 온 길인걸.”

 

기계소리가 크게 울렸다.

 

 

3.

 

늦은 시각, 긴 복도임에도 보이는 모든 방은 불이 꺼져있었다. 여느 때 같았다면 모두가 정리를 마치고 돌아간 시각이라도 마르그리드의 연구실만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은 복도 어느 곳으로도 빛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긴 마르그리드는 복도를 가로질러 문 안으로 들어가 또 다른 마르그리드를 찾았다. 그녀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손을 늘어뜨린 채 제 눈앞의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화면 가득 수식과 회로를 띄우고 있던 모니터는 두 연인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다가온 마르그리드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가득한 오래된 영화. 곧이어 화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화면 속의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이거.”

직접 복원했어요.”

 

분명 아무 기척도 없었을 터인데 그녀는 놀라지 않고 마르그리드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시선은 여전히 화면을 향한 채였다. 마르그리드도 화면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괜찮은 취향이네.”

 

마르그리드는, 마르그리드의 이야기에 그녀를 힐끔 돌아보더니 다시 모니터를 향하며 답했다.

 

, 그렇겠죠.”

그러네.”

 

배경음이 고조되며 긴장된 분위기 속에 화면에는 그 여자가 아이를 안은 채로 등장했다. 마르그리드가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죽을 거야.”

알아요. 이미 몇 번이나 본 영화예요.”

그래.”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거미 같은 여자라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

아니.”

 

 

 

 

4.

 

그 날 따라 그녀가 유독 기뻐 보였다. 그 모습에 괜히 또 기분이 나빠져 마르그리드는 퉁명스레 말을 붙였다.

 

드문 일이네.”

 

앞도 뒤도 잘린 그 한마디로 마르그리드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곤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내일이에요. 내가 이길 거예요.”

 

마르그리드는 잠시 아무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야기 탓이 아니었다. 그녀의 처음 보는 환하게 웃는 표정이, 마르그리드에게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렇게 웃은 적이 있었던가.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마르그리드에게 있어 몸과 함께 버린 무수한 파편들 중 하나일는지도 모른다. 마르그리드는 제 앞에 의뭉스런 표정이 떠오르고야 다시 한 번 그녀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녀 또한 마르그리드에게 앞뒤 사정과 함께 무슨 일인지 이야기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짐작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내기를 할까?

 

. 그래.”

 

동시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기억이었다. ‘이오시프였던가? , 당신 남편 말이야. 질 나쁜 남자였잖아.’ 한참 듣지 못한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큰 폭발과 함께 괴물들이 연구실에 난입했다는 진술이 있었다.’ 이상하리 만치 깨끗해진 기록을 복원하자 그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조각조각 잘린 것들을 이어 붙여 그려낸 그림에 내일의 광경이 있었다. 마르그리드는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분명 방금 표정이 흐트러졌다고. 하지만 들뜬 상대는 마르그리드의 표정은 보고 있지 않았다. 어느새 이미 돌아서 들떠서는 모니터에 떠오른 언어들을 점검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야기의 결말이 눈에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잠시 몸을 피한 후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돌아와, 이 세계의 그녀를 비웃어 주면 될 일이다.

 

마르그리드도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고 돌아섰다. 뒤편에 자리한 요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아이를 품을 요람. 자신의 기억에 찾아낸 정보는 아니었다. 이 또한 조각을 찾고 기워 맞춰 그려낸 그림의 일부였다. 일그러진 그림의 한가운데 그 기계가 있었다. 기분이 나빠져 오는 한편으로 참을 수 없이 우스워, 마르그리드를 눈썹을 찌푸린 채 웃었다. 그 또한 우스운 모습이었다.

 

 

5.

. 안 돼. 여기까지 왔으니까.

전원 구속한다. 그대로 엎드려.

마르그리드. 시키는 대로 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전부 화면 너머에서 보는 무대 같았다. 이미 대본을 넘겨다 본 그녀에게는 정말 시시한 무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곧이어 펼쳐지는 클라이맥스.

 

그렇군요. 당신이었군요.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마르그리드 또한 자신이 상정했던 상황과는 조금 빗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녀의 과거 같은 것이 아니다. 마르그리드가 이때의 마르그리드와 만나게 된 시점에서 이것은 과거가 아닌 또 하나의 가능세계였다. 그것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이상하다. 마르그리드는 생각했다. 저 여자는, 마르그리드는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그렇게나 어리석었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큰 흐름에 휩싸여 흘러가는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기분 나빴다. 선택받은 자.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것이 비꼬는 말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마르그리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마르그리드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마르그리드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너무 간과한 것은 아닐까? ‘마르그리드라고 하는 변수가 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컸던 것인가. 마르그리드는 생각을 계속했다. 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마르그리드는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그런데 왜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

 

마르그리드는 아이를 끌어안고 몸을 말았다.

 

총성이 긴장을 끊어냈다. 무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시에 마르그리드의 생각이 멈췄다.

 

실험실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 한가운데 마르그리드와 마르그리드 그리고 아이가 있었다. 총성은 금방 사그라졌다. 마르그리드의 눈은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눈을 가린 손은 마르그리드의 것이었다. 뒤에서 나타나 한 손으로 마르그리드의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르그리드 품 안의 아이를 지지했다.

 

결말은 대본과 다를 것이 없었다. 심연의 생물은 모든 것을 삼켰다. 아이와 그 아버지만을 제외하고. 마르그리드와 마르그리드는 심연 속으로 떨어졌다. 마르그리드는 그 짧은 순간, 눈에 스친 벽을 기어오르는 거미를 보며 웃었다.

 

내가 이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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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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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람 소리도 없이 벌떡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은 다이아의 눈은 아직 감겨있었다. 더듬더듬 침대를 밀어내고 크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야 눈이 뜨였지만, 아직 비몽사몽간인 듯 시야가 흐릿했다. 와중에도 몸에 익은 대로 세안을 마치고 교복을 갖춰 입은 후에 루비를 깨우고 나서야, 바깥사람들에게 익숙한 ‘쿠로사와 다이아’의 모습이 되었다. 학교를 향하기엔 조금 이른 시각이었지만 다이아는 현관을 향했다. 그러다 복도 한쪽에서 전신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는 한 가닥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어 핀을 다시 꼽았다. 교복 치마 주름을 가다듬고 마지막으로 타이를 바르게 매만졌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나서야 현관에서 검은 구두를 가지런히 꺼내 신고 뒤를 돌아본다.

 

  “다녀오겠습니다.”

 

  다이아는 집안을 향해 인사한 뒤 문을 나섰다. 날이 많이 선선해진 것을 느끼며 그는 자연스럽게 발이 향하는 길을 걸었다.

 

 

 

  같은 시각에, 같은 복장으로, 같은 길을 나서, 같은 장소에 도착한다. 학교란 공간은 좀처럼 변화가 없는 곳이다. 우치우라 정도의 시골 마을에 우라노호시 같은 작은 학교가 되면 더더욱 그러했다.

 

  “다이아쨩!”

 

  어쩐지 간지럽게 느껴지던 호칭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되고 이내 일상이 된다. 다이아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치카에게 다가가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나왔네요?”

  “수저 물고 조니까 미토 언니가 쫓아냈어…….”

 

  우물우물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치카의 어깨도 작게 쪼그라드는가 싶더니 금방 다시 ‘그런 것보다!’를 외치며 살아났다. 엊저녁에 시이타케가 이유 없이 짖었던 일과 작사로 머리를 싸매다 하나씩 입에 넣은 초콜릿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열댓 개가 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치카에게 다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는 추임새를 넣었다. 그가 추천해준 뮤즈의 무대를 보았단 얘기에는 다이아의 목소리도 눈에 띄게 높고 빨라졌다. 이른 시각, 짧은 등굣길, 언덕을 오르는 발걸음, 조금은 싸늘하게 느껴지는 아침 공기, 그리고 옆에서 웃는 치카까지 모두 조각조각 스미어 다이아의 일상이 되었다. 이전보다 조금 덜 반가워진 교문을 마주치게 되는 것도 일상의 하나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세요.”

 

  다이아의 배웅 후에도 치카는 왜인지 학교로 들어가지 않고 다이아를 가만히 올려보더니 급기야는 미간이 좁아졌다. 다이아는 딱, 그 순간 때맞춰 무슨 일인지 묻기 위해 입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치카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했다. 다이아가 인식한 것은 치카가 이미 그에게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뺨에 입을 맞춘 후에.

 

  “헤헤헷.”

 

  치카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이따 봐 다이아쨩!”

 

  그리곤 후다닥 교정을 가로질러 건물로 들어갔다. 문을 돌아가다 다시 빼꼼 나와서는 다이아에게 크게 한 번 더 손을 흔들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치카가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다이아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당신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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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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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라이브!2018. 10. 21. 01:26

특별히 기대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검토를 마친 서류를 옆으로 옮기고 처리해야 할 새 서류를 끌어다 앞으로 놓는다. 턱을 괸 채 툭툭 괜히 볼펜의 뒤 축을 괴롭히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에리는 차분하게 자신의 추론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았다.


첫째. 오늘은 1021일이다. 둘째. 며칠 전 린이 뭔가 갖고 싶은 것이 없냐며 넌지시 물어왔다. , 뮤즈 멤버들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 학생회에서 만났을 때 노조미가 어딘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린 것과 묘하게 평소와 다른 톤의 목소리까지 더해보면 이것은 분명-


에리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향해가던 와중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우미’. 언제나처럼 <안녕하세요, 에리.>로 시작한 한껏 격식을 차린 메시지는 한참 이어져 <그럼 이만.>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장장 서른 줄에 걸친 메시지는 요약하자면 지금, 부실로 와주세요.’였다. 드디어-인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에리는 앞에 있던 서류를 들어다 책상에 툭툭 쳐 정리해 뒤집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리는 부실의 문고리를 붙들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두 번,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고 또 표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나서야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에서 들려온 우당탕 뭔가 무너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부실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예상컨대, 의자와 함께 넘어져 앞으로 고꾸라진 호노카와 눈이 마주쳤다.


-헤헤헤. 생일 축하해, 에리쨩.”


잠시의 정적은 머쓱하게 내뱉은 호노카의 목소리가 깨뜨렸다.


--!”


바로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기세로 달려드는 우미와 그런 우미를 말리는 코토리의 모습에 그제야 에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부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직접 써서 붙인 것이 분명한 ‘happy birthday!’는 두세 명이 함께 준비한 것인지 글자마다 꾸민 모양이 달랐다. 테이프가 단단히 붙질 않아 바닥에 떨어진 풍선을 보아하니 급하게 준비한 티가 역력했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부터 에리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까지 준비를 마쳐야했으니 시간이 꽤 빠듯했던 셈이었다.


이제 노래할까?”


에리를 중심으로 전원이 둘러 모이니, 코토리가 구석에서 케이크를 꺼내오며 이야기 했다. 진한 초코 케이크의 자태에 맛을 상상하며 에리의 입에서 언제나의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하라쇼!”


케이크에 시선이 집중되어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다보니 코토리의 등 너머로 부실 창문에 비친 그림자가 보였다. 에리는 인영으로 보이는 실루엣만으로도 바로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림자는 금방 모습을 감췄다.


잠시만.”


에리는 곧장 코토리의 옆으로 돌아 나와 모두를 부실에 남겨두고 혼자 빠져나왔다. 부실을 나서자마자 그림자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돌 연구부의 팻말이 적힌 문, 그 바로 옆의 벽에 팔짱을 낀 채로 기대있는 모습은 에리에겐 너무나도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어딘지 낯설었다.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상대방은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이 썩 맘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먼저 입을 열며 뱉은 목소리는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시끌벅적하네.”

그래도 좋아하잖아, 저런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에리는 팔짱을 풀었다.


저게 정답이야?”


몸을 틀어 마주보며 물어오는 그녀의 표정 찌푸려져 있었다. 그 모습에 에리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저런 표정이었구나.


괜찮아. 그리고-”


가볍게 그녀의 미간사이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생일축하해.”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에리가 돌아보니 발레복 차림의 어린 아이가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에리는 쪼그려 앉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지금 행복해?”

.”


에리는 아이의 질문에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리고 아이는 그런 에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야기했다.


생일축하해!”


부실에서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에리가 두사람을 문 밖에 남겨두고 다시 부실로 들어서는 순간 펑 폭죽 소리가, 그리고 바로 이어 호노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못 터뜨려서...”


호노카도 참. 웃으며 다시 모두의 사이로 들어가니 진동소리가 들렸다. 책상 위에 있는건가. 소리가 꽤 크네. 금방 꺼지겠지. 에리쨩 핸드폰 울리는데? 괜찮아 지금은-


-깨고 싶지 않으니까. . 지금. . 이겠구나. 꿈은 자각하고 나면 깨진다. 아직 눈은 뜨지 않았지만 에리가 있는 곳은 이제 오토노키가카 고교의 아이돌 연구부 부실이 아닌 자신의 방 침대였다. 눈치 없는 진동소리는 계속 울렸다. 에리는 엎드린 채로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다시 풀썩 배게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 싫다. 와중에도 진동소리는 울리고 있었다. 에리는 꾸물꾸물 이불에서 오른손만 꺼내다 침대 위쪽을 더듬거렸다. -- 울리고 있는 핸드폰의 앞면, 알람 끄기가 있을 익숙한 위치를 눌렀다. 하지만 계속 울리는 진동은 점점 커지는 것 같은 착각까지 일으켰다.


대체! 왜 안꺼지는거야!”


결국 폭발해 상체를 훅 일으킨 에리를 맞아준 것은 알람 화면이 아닌 전화 수신 화면, 그리고 화면에 찍힌 니코라는 이름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미안!’이라고 외친 후 10분 새 에리는 상당히 말끔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니코의 노성은 당연히 에리가 온전히 감당해야했다.


실컷 화내놓고 이제 와서 차분한 척 해봐도 늦었는데요, 니코니씨.”


핸드백에 지갑을 넣으며 궁시렁거려 봤다가, 에리는 고함소리에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핸드폰을 귀에서 멀찍이 떼어 내야했다.


. 미안해. ... 그러니까... 늦잠을 좀....”


다시 한번 핸드폰이 에리의 귀에서 멀어졌다.


. . 금방 갈테니까.”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와이셔츠 깃을 만지고 핸드백을 들어다 어깨에 걸쳤다. 그렇게 바로 밖으로 나서려 움직이던 에리는 다시 뒤로 걸어갔다. 책장 위에 놓여있던 액자가 살짝 삐뚤어져 있어 바로 하고, 아홉명이 모여 학교 강당에서 ‘start dash!’ 공연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그 사진 속의 그녀에게 슬쩍 인사를 건넸다.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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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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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19. 22:43

1.


  후후후. 그동안 정말로 고생도 많았지. 팔짱을 끼고 벽에 좀 더 깊이 기대며 그동안의 고생들을 떠올려봤다. 나같이 꼭 필요한 미끼… 아니, 인재도 제대로 판단을 못 하고 실수 좀 했다고 내쫓는 그런 녀석들 사이에서 눈치 보는 건 이제 끝이야! 아멜 녀석이 또 때리는 건 아닌지 짜증 내는 건 아닌지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나한테도 파트너가-정말로 날 위해주는-파트너가 생겼으니까!


  “오래 기다렸어?”


  기척도 못 느끼고 있었는데 옆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면서 말을 걸어와 순간 놀라 뒷걸음질을 쳐버렸다. 깜짝… 놀랐네. 그런 내 모습에 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금방 웃었다.


  “아니. 아니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그래?”


  니나는 내 손을 붑잡아 이끌며 말했다.


  “그럼 들어가자. 여기 커피가 맛이 좋다고 하더라고.”

 


***

 


  “마리아는 캐러멜 마키아토 맞지?"


  먼저 앉아서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니나가 커피를 받아 온 모양이었다.


  "!"


  니나는 우선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 두고, 커피 두잔 중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더니 다른 하나를 든 채로 맞은편 앉았다. 뭘 좋아하는지 기억도 해주고 내 파트너는 상냥하다니까. 맨날 벌이니 뭐니 하는 포악한 누구누구 씨랑은 달라! 필요 없어졌다고 바로 버리는 누구랑도 다르고 말이지! 좋아, 마리아. 넌 이제 다 된 거야. 이제 안정적으로 여기 있을 수 있는 거라고. 기분 좋은 생각에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는 그대로 두고, 니나에게 받을 때부터 꽂아져 있던 얇은 빨대를 살짝 물고 조심조심 빨아들였다. , 이거 맛있다. 어제 갔던 아이스크림 집도 맛있었는데 말이야. 다시 한 번, 방금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조금 대담하게 빨아보았다. ~. 달아.


  “맛있어?”

  “응! . 니나건 뭐야?”


  내 물음에 니나는 뚜껑을 열어뒀던 커피를 살짝 들면서 대답했다.


  “라떼야. 카페라떼.”

  “아! 그거 로네도 좋아하던 건데!”


  아. 그래서 뭐 어쩌려고. 그런 녀석 이제 아무래도 좋은데. 괜히 기분이 안 좋아져서 쟁반에 남아있던 빨대를 집어와 꼬깃꼬깃 접어버렸다. 정말! 정말로 그런 녀석 아무래도 좋은데 말이야. , 괜히 말 꺼내서 니나도 뭐라고 대꾸 못 하게 만들고. 이게 뭐야…….


  “로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니나가 작은 목소리로 되물어왔다. 슬쩍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표정을 살펴본다. . 니나도 이상한 표정이잖아.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왠지 웃는 것 같기도 한데. 아 정말! 바보 같은 마리아!


  “그렇구나. 로네도 좋아하는구나.”

  “어……. . 좋아하더라고.”


  어쩐지 나한테 얘기하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일단 앞에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 대답하는 게 맞겠지. 웃는 걸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걸까. 다행이다. 왠지 눈이 마주치지 후다닥 표정이 변한 것도 같지만, 별거 아니겠지 뭐.


  “저기…. 마리아.”

  “응?”


  왠지 모르게 니나가 손가락을 꼼질꼼질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있었다.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주저하지 말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니까!


  “그… 로네는….”


  로네?


  “음…. 로네는 어… 잘 챙겨줬었어?”


  내 걱정이었던 거야? 이럴 수가. 역시 니나는 천사라니까. 어차피 다 지난 일로 니나한테 걱정 끼칠 필요도 없겠지.


  “응. 나름대로, 그때는 되게 잘 챙겨줬었어. 다른 애들이 뭐라고 할 때 감싸준 적도 많고. 그랬으니 나도 그래서 좋아했던 거고.”


  좋은 파트너였지 그때는.


  “좋아…한…. 그렇구나…….”


  표정이 안 좋네…. 내가 뭔가 실수했나.


  “선물… 음….”


  앗. 혹시 니나가 또 내 선물이라던가 고민하고 있었던 건가? 그러느라 고민하는 표정이었던 거야? 그런 거 안 챙겨줘도 되는데 말이야. 너무 받은 게 많아서 미안할 정도고. 여기서는 어른스럽게 사양하는 게 맞겠지.


  “저기 있지. 마리아는 로네랑 오래 같이 있었으니까 잘 알고 있지 않아? 혹시 로네가 선물로 받으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응? 로네?

 




2.


  딱 어제 내가 니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벽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빨리도 나왔네. 혼자 나오라는 건 또 뭔지. 이제 리더도 파트너도 아니면서 오라 가라야. 아직도 내가 지네 말에 설설 기는 그런 애로 보이니까 이런 식으로 불러내는 거겠지.


  “무슨 일로 불러낸 거야?”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얼굴 좀 펴.”


  인상을 팍 쓰고 물어보는데 끝까지 생글거리는 것도 진짜 얄밉구나. 팔짱을 끼고 노려보다 계속 살살 웃는 표정에 기분이 이상해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 들어가자. 여기 내가 추천하는 곳이거든.”

 


***

 


  “머리에 그거 처음 보는 거네.”


  자기 머리를 툭툭 치면서 얘기하길래 로네의 머리 위를 올려 봤다가 그제야 내 머리를 얘기하고 있는 걸 알아채고 다시 눈을 커피잔으로 돌렸다. 손으로 슬쩍 내 머리를 더듬어 보다 퍼뜩 생각이 났다.


  “아아. 이거.”


  기회다!


  “내 파...가 선물로 준 거야.”


  며칠 전이던가 니나랑 둘이 외출했을 때 선물로 받은 머리핀이다. 그러니까 말이지 로네 너랑 같이 안 있어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다 이거야. 새로운 파트너 덕분에. 흐흥. 표정이 좀 안 좋아진 것 같은데, 쌤통이다. 내가 너 아니면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았지? 계획대로 안돼서 어떡하냐.


  “아 그래? 니나가?”


  이, , 로네는 내가 잘 지내고 있는 게 그렇게 기분 나빴던 건가. 이렇게까지 반응이 바로 올 줄은 몰랐는데.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티가 팍팍 나는 저 표정은 대체 뭐냐고. 아니 뭐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군. 날 내친 걸 조금은 후회하고 있나. 후후후.


  “그래! 여기도 말이지 사실 니나가 먼저 데려와 줬었다고.”

  “니나가 말이지?”


  왜, 왜 기분 나쁘게 씨익 웃고 그런담. 니나 자랑 좀 더 하려고 했는데 한순간에 소름이 돋아 김이 팍 식어버릴 정도의 표정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네 정말. 원래 그렇게 잘 알겠는 애는 아니었지마는 말이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 틀렸었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내려가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졌어. 여기 왜 나온 거지 정말.


  “그래서, 정말 무슨 일로 부른 건데?”

  “무슨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이 팀에서 내보내긴 했지만 마리아 널 싫어한 건 아니란 거 알잖아.”

  “알기는 무슨….”


  아니란 건 잘 알고 있는데, 또 그때랑 똑같은 목소리로 기분을 풀어주니 괜시리 기분이 나쁘진 않다.


  “왜. 누가 또 나만큼 잘 알겠어. 네가 많이 노력했단 것도 알고 그동안 도움도 많이 됐었는걸.”


  흐, 흐응.


  “많이 안심했어. 니나랑, . 니나가 잘 챙겨주고 있는 모양이네.”

  “뭐 그렇지. 좋은 파트너야.”

  “응…. , 그렇지.”


  로네는 자기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조금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멜도 요즘도 종종 만나고 그래?”


  아멜- . 아하. 그렇구나. 아멜 얘기 캐내고 싶어서 만나자고 하고 이렇게 비위도 맞춰 주고 그런 거구나. 얼마나 바보로 본 거야 날. 입을 아예 꾹 다물어 버렸다. 아멜도 막 예쁘게 구는 건 아니지만 너한테 아멜 얘길 해줄 것 같아? 아멜 얘긴 절대 안 해줄 테니까. 어디 보자고.


  “니나가 요즘 뭐에 관심 있는지 알아?”


  응? 니나?

 




3.


  마리아 님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거든. 니나랑 로네가 그러니까 내 예전 파트너랑 지금 파트너가, 바로 얼마 전에 싸움도 있었던 두 사람이 어째서 한자리에 앉아서 그것도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거고, 나는 어째서 숨어서 그걸 엿듣고 있는 거야? . ! 진정하자 마리아. 차근차근 넌 생각할 수 있어. 이 상황을 파악해 낼 수 있어. 그러니까 처음이 먼저 그러니까 뭐였지. , 그래. 카페. 카페 카운터에 혼자 앉아 있었지.


  캐러멜 마키아토를 시켜서 혼자 우아하게 마시면서 잠시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고, 그때 고개를 돌리다 눈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고 생각됐다. 다시 돌아보니 니나가 카페로 들어오고 있었다. 역시 파트너. 통하는 게 있다니까.


  “니나-“


  벌떡 일어서서 소리 내 부르려다 뒤따라 들어오는 모습에 내 손으로 입을 확 막으면서 후다닥 다시 앉아버렸다. 니나가 왜 로네랑 같이 있지? 당황해 굳어있는 사이에 두 사람은 내 옆으로, 정확히는 카운터 앞으로 와버렸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일단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거의 숨도 멈추고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로네도 카페라떼 맞지?”

  “어떻게 알았어?”


  곁눈질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네가 몸을 돌려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 버렸다.


  “아, 저기 자리 있네.”


  이렇게 시끄러운 와중에도 내 심장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수 있구나. 속으로 백까지 센 후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옆에는 없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리다 뒤쪽으로. 소파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탐색을 계속하니 꽤 멀찍이 두 사람이 자리를 잡은 게 보였다. 어쩐다. 정말로 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 혹시 니나 협박당하고 있는 거 아니야? 협박은 아니라도 로네가 니나를 이용하려고 하는걸 수도 있고. 안돼. 파트너로서 이대로 있을 수 없지. 우선은 두 사람을 주시하다 둘의 뒷자리가 비어있는 걸 확인하고 컵을 들고 일어났다. 슬쩍 뒤를 한번 돌아보고, 후다닥 한자리 가까이로. 다시 한 번 일어서다 고개를 돌리는 로네의 모습에 놀라 모르는 인간의 옆에 앉아버리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움직여서야 겨우 두 사람의 뒤, 정확히는 니나의 등 뒤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 어디 들어보자고. 혹시라도 로네가 뭔가 꾸미고 있다면 이 마리아 님이 파헤쳐서 니나를 구해주겠어.


  -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당연히 두 사람의 뒤에 앉아서 내가 듣게 된 대화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어제 마리아랑 만났어.”

  “만났던 거야? 얘긴 잘 나눴어?”

  “응. 잘 챙겨주고 있는 것 같더라.”

  “그야, 소중한 파트너니까.”

  “아- 그래?”

  “앗. 혹시… 방금 말 기분 안 좋았어? 그런 뜻이 아니고….”

  “나도 알아. 니나가 그럴 뜻 없었다는 거. 그냥- , 여기 마리아랑 왔었다면서?”

  “응 많이 좋아하더라.”

  “안 그래도 자랑하더라고. 여길 소개해줬던 게 나였던 건 몰랐던 모양이지만.”


  당연히 전혀 몰랐다.


  “아, 로네가 라떼를 좋아한다는 거 마리아한테 들었어.”


  그렇지. 내가 얘기해줬지.


  “내가 몰랐던걸 마리아를 통해서 알게 된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로네에 대해서 더 알게 돼서 좋았어.”


  아. 틀렸다. 힘이 빠져버렸다. 모르겠다. 뭐지. 마리아 님은 모르겠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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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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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19. 22:22

가학적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너무 밝은 스포트라이트에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린다. 다시 돌아본 그 아래 덩그러니 놓인 의자. 타박타박. 걸음 소리 끝에 그 아래 앉는 것은 금발의 청년이다. 청년은 아이같이 웃는다. 이어 그는 다리를 꼬며 입을 연다. 그 목소리 역시 아이처럼 들떠있다.


. 이츠키 슈 맞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해봤자 너무 티가 나잖아, 이츠키군. 조금은 반가워해 줘. 그래도 어린 시절의 친구. 비슷한 거잖아? 어때? 좀 그리운 느낌이 들어? 정말 여전하구나, 그 오만한 태도는. 아니, 이츠키군이니 오만한 것이 아니라 도도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건 그리운 느낌이네.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 최선을 다해 비꼬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이야. 그래 봤자 달라질 것도 없잖아. 땅도 가신도 없이 제왕의 면모를 뽐내봤자 말이야. 아니 이츠키군의 경우라면 인형도, 실도 없이 인형극을 하는 꼴이라고 해야 할까? 발키리였던가? 그쪽도 그리운 표정이네. 그렇게 살벌한 표정 짓지 않아도 네 기특한 인형들을 부수진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그 아이들은 좀 더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느 쪽의 인형인지 내가 설명해 야해? . 말이 없어졌네. , 이거? 기다려봐. 과일 정도는 깎을 수 있게 됐거든. 칼 다루는 거 말이야. 꽤 익숙해졌어. 후후. ‘질린다 하는 눈초리네. 너무하잖아. , 이츠키군보다는 잘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 도련님 같은 느낌이었잖아? . 이번에는 '네가 할 소리냐. 맞지? 후후. 즐겁네. 아니. 놀리는 게 아니야. 요즘 영 즐거운 일이 없었으니까. , 정말로 이츠키군과 다시 만난 걸 즐거워하고 있어. 소중한 것을 다시 만났는데 기쁘지 않을 리 없잖아.


손을 입가에 가져가 입꼬리부터 곡선을 따라 훑어 내려온다. 그렇게 자신의 표정을 확인한다.


이상한 표정이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그러니까 말했잖아. 사랑한다고 말이야.




불이 꺼진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백은 잠시. 청년이 바라보던 맞은 편에 팟 조명이 들어온다. 그 아래에 서 있는 것은 작은 아이. 소년, 텐쇼인 에이치는 웃는다. 아이답게.


아이가 알고 있는 소중한 것을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손안에 꽉 쥐는 것이었다. 햇살을 품어 반짝이는 모래는 아이에게 충분히 특별한 것이었다. 잡히지 않는 것을 쥐기 위해 아이는 무던히도 애를 썼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감각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그 한 줌 한 줌을 흔적이나마 그러모아 방 한 쪽에 쌓아 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년의 왕국. 에이치는 그곳의 황제였다. 가지런히 정리된 빈 액자들은 붉은색 천으로 감싸 금실로 자수를 새긴 고급품이었다. 그 옆으로 늘어선 목제 병사 인형의 몸통 위로는 금화가 하나씩 놓였다. 어렴풋하게 들리는 음악 소리는 며칠 째 들리는 익숙한 곡인지라 정확히 들리지 않는 와중에도 아래층에서 연주하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음을 따라 흥얼거린다.


성의 한가운데에는 빈 장식장이 놓여있었다. 전면이 통으로 유리로 되어있어 안이 바로 들여다보이는 장식장이었다. 겉이 나무로 틀이 짜여있는데 어린 에이치의 안목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작은 손으로 유리를 쓸어보면 잔 흔적들이 손에 밟혀,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던 시간을 짐작하게 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에이치의 기억 속에 장식장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에이치보다 먼저 방의 공간을 사용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 이전에 어떻게 쓰였는지, 누가 쓰던 물건인지,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것인지, 그리고 왜 빈 채로 계속 그렇게 남아있는지 모두 에이치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에이치가 안을 들여다보는 지금, 장식장의 안은 텅 비어있었다. 에이치가 그 바로 앞에 서 있자면 목을 한껏 꺾어야 그 꼭대기를 볼 수 있었다. 도로 시선을 내려 장식장에 바짝 붙어 안을 향하면 그 안에 담겨버린 제 그림자가 보였다. 아이는 그림자와 눈씨름을 하다 돌아서 유리창에 기댄 채로 주룩 주저앉았다. 다시 장식장 안은 비어버렸다.


똑똑.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딱 두 번 울리는 노크 소리에 대한 정답은 한 박자 후에 너무 경박하지도 너무 꾸민 것 같지도 않은 목소리로-


무슨 일인가요?”

-그렇게 답하는 것.

이동할 준비가 다 됐습니다.”


듣게 된 것이 비록 싫은 일이라도 감정을 드러내고 회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에이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당장 문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


금방 준비를 마치고 나가죠.”


그렇게 말하곤 에이치는 일어서 옷장을 향하는 대신, 창문을 열어젖혔다. 웅얼거리듯 흘러들어오던 연주소리가 커졌다. 역시나 며칠 째 아래층의 악단이 연습하고 있는 곡이었다. 오늘은 바람이 안 부네. 조금 답답하려나. 아래로는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마부가 눈에 띄었다. 에이치는 바로 준비를 시작하지 않는 정도로는 잘못된 일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잠깐, 일을 미룬 것 뿐이다. 보통 그런 시간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다만 이번에는 그 큰 의미 없는 그 시간 끌기 덕에, 에이치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추락하고 있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저택엔 생각지 못했던 장점이 있었다. 아마 에이치는 근방의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처음 한순간은 빛무리가 만든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커지는 형체에 금방 무언가 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내 지척을 지나갈 때가 되어서야 그것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이치는 그 순간 시간이 멈추었나 의심했다. 다음으로는 자신의 감각과 몸의 상태를 의심했다. 그것은 추락이라기엔 너무나도 느린 속도였다. 차라리 낙하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것의 등 뒤로 작은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쫓아 시선을 옮기다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이내 최대한 애를 써도 날개 끝자락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시 후 퉁, 거리감이 있는 것 치고는 꽤나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땅바닥으로 떨어진 건 아닌 모양이네. 들린 소리의 둔탁한 울림으로 그렇게 짐작해봄과 동시에 에이치는 바로 움직였다.


에이치는 언제고 스스로 운이 좋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혹자는 어린 나이에 비관적인 태도는 좋지 않다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에이치에게 그것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에이치는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조그마한 손발을 버둥대는 매 순간이 익숙했다. 손안에 남는 것이 지저분한 흔적뿐일지라도 아이는 언제고 반짝이는 모래를 그러쥐었다. 그런 에이치가 고집을 부려 모든 일정을 미뤄두고 자신의 앞에 그것을 가져다 놓은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거야?”


그렇노라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는 인부를 손짓으로 내보내고 에이치는 다시 천천히 제 앞에 놓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키는 자신과 엇비슷할까. 원래라면 단정하고 상당히 좋은 옷차림이었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여기저기 찢어져 어쩔 도리 없이 허름해 보이게 만들었다. 와중에도 그 자신만은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보라색 눈동자는 에이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온몸으로 털을 세운 짐승 마냥 경계하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조차 기품있다보이게 했다.


내게 바라는 게 뭐지?”

?”

뭘 바라고 날 여기로 데려온 거냐는 것이다. 내가 누군지 궁금한 것이냐. 그런 하잘 것 없는 호기심인가 아니면-.”

아니. 아니야. 네가 무엇인지는 알 바 아니야. 전혀 궁금하지 않아.”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는 목소리를 누르며 시선을 돌렸다. 방안을 탐색하는 눈짓을 같이 따라가다 보니 침대 머리 맡의 창을 지나 옷장을 스치고, 에이치 등 뒤의 방문을 잠시 응시하다 다시 서로에게 돌아왔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네녀석은 뭘 바라고 날 이곳에 데려온거지? 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난폭한 몸짓에 기분이 좋진 않으니 제대로 답을 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에이치는 그가 말을 이어가던 와중에 또 슬쩍 그 시선이 문을 향했다 돌아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 부족하네. 아쉬워.”

뭔가 말했나?”


반문에 답은 하지 않고, 에이치는 몸을 틀어 고개를 내밀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에이치의 손이 목적했던 날개에 닿기 전에 그가 먼저 몸을 빼내며 에이치의 손을 쳐냈다.


그래. 좋아. 앞으로 여기서 지내도록 해."


에이치가 악수를 건네며 하는 이야기는 제안보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슈는 한참을 가만히 그 손을 내려 보고만 있었다. 한숨과 함께였지만, 그래도 맞잡은 손에 에이치는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어느쪽으로 하겠어?”


물어보며 동시에 에이치의 손은 찻잎을 덜고 있었다. 슈는 그런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돌아보지 조차 않았다. 계속 등을 돌린 채 의자에 앉아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에이치 역시 슈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차를 우리는 일에 집중했다. 통과 수저를 내려놓고 익숙한 손길로 주전자의 손잡이에 헝겊을 얹은 뒤 한손으로 들어 찾잔 위에서 기울였다.


설탕?”

! 알고 있으면서 매번 태연스럽게 잘도 물어보는구나.”

하하. 이츠키군의 반응은 매번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난 이츠키군이 다즐링. 우유도 설탕도 필요없다.’고 말하는 걸 좋아하니까 말이야.”

. 안이하고, 또 꼴사나운 흉내구나. 전혀 닮지 않았다.”


두사람의 몸이 자란만큼 두사람 사이의 공기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단정하고 화려한 차림의 슈는 그 방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되어있었다. 슈는 책을 덮어두고 다가와 에이치가 우린 차를 입에 가져갔다. 그가 찻잔을 기울여 한모금을 들이키고 다시 잔을 내려놓는 과정을 에이치는 즐거운 표정으로 기다렸다.


, , . 그런 곪아 혓바닥 아래로 검을 물을 흘릴 것 같은 품성으로 이런 맛을 낸단 건 그 자체로 하나의 부조리로군.”

역시 이츠키군은 재밌는 말을 잘 하네.”

재밌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


. 주전자가 떨어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무릎을 꿇으며 서 있던 자리에 바로 주저 앉은 에이치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텐쇼인 네놈...”


두손으로 심장 부근을 꽉 부여잡고 버둥거려 간신히 벽에 기대는데 성공했다. 꼴사납네. 숨소리와 섞여 흘러나온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묻혀 스러질 것 같았다. 굳어있던 슈는 어색한 몸짓으로 다가와 몸을 낮추며 물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봐라. 불쾌하지만 특별히 들어주겠다는거다.”


쿨럭. 쿨럭. 계속 이어지는 기침에 입을 가린 한손은 떼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슈의 팔뚝을 붙들었다. 그대로 끌어내리는 손길에 응해 슈는 에이치의 앞에 돌아 앉았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으니 당황하지는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절묘히도 빛이 내리는 위치에 앉아 슈는 제 날개를 늘어뜨렸다. ‘순백이라 표현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깃 하나하나는 제 방향대로 쓸어 넘겨보았다. 빛을 받아 비늘과 같이 반짝이는 모습은 수없이 들여다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에이치는 생각만큼 부드럽지 않고 외려 까슬한 감촉도 즐겼다. 슈의 날개죽지에 단단히 붙은 날개 뿌리가 에이치의 손에 닿았다. 꾸욱 눌러보던 손을 떼며 입을 열었을 때 처음보다는 이미 기침소리가 많이 잦아들어 있었다.


역시 이츠키군은 괴물이구나.”


한 마디를 간신히 마치고 다시 쿨럭이는 기침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와중에도 불쾌한 소리는 잘도 하는구나.”

"후후. 그렇게 듣지마. 이래 보여도 이츠키군을 꽤나 좋아하고 있으니까. 아니 사랑하고 있단 쪽이 맞으려나?"

!”

. 생각했던 것보다 귀여운 반응인데?”

헛소리!”

일어나게 해줘.”


슈의 손을 붙들고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치는 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잡아끄는 손에 힘은 없었지만 슈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움직여주었다.


이츠키군. 거기. 그 앞에 서도록 해.”


에이치가 가리키는 것은 빈 장식장의 앞이었다. 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에이치의 지시에 따랐다.


펼쳐 봐.”

네놈...”

어서.”


뒤쪽에서 빛이 들어와 그림자가 슈의 표정을 지웠다. 그 모습에 에이치는 생각했다. 빛으로 그를 그 자리에 박제해 놓은 것 같다고.


여전한 악취미로구나, 텐쇼인.”


서린 목소리가 기억을 비집고 들어왔다.


. 그렇지.”

여긴 네놈의 방인가? 여전히 집착적으로 정리한 것 같으면서도 어수선한 것이 딱 네놈과 같은 꼴이구나.”

후후. 못 본 새에 이츠키군은 많이 수다스러워졌네.”

성격머리도 하나도 고치지 못한 모양이구나. 애석하게도.”


에이치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슈의 옆으로가 섰다. 한손으로 웃옷의 등 쪽을 끌어 올려 그대로 어깨를 짓눌렀다. 큿하고 흐리는 목소리는 무시했다. 등뼈의 옆길을 따라 더듬어 올라가 오른쪽 어깨죽지 언저리 우둘투둘하게 남은 흉터를 음미하듯 지분거렸다. 슈의 다리를 묶어둔 쩔그럭 거리는 소리 역시 무시한다.


미쳤군. 처음부터 그리고 언제나, 지금까지도 넌 정상이 아니야. ‘그 날이 올 것을 그 때도 진작 짐작하고 있었다. 몇 년을 방에 가둬 나가게 하지 않고 나를 길들이려 했지. 내 날개를 바라보던 번들거리던 눈빛을 모를래야 모를 수 있었겠느냐. 네놈은, 역시나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랄 뿐이겠지."

하하.”


에이치는 이를 악문 슈의 목소리만은 무시하지 않았다.


"너만 할까. 이츠키군은 괴물이잖아."


에이치는 생각했다. 기억이라는 녀석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사교 모임의 화젯거리라면 무엇이 되었건 파악은 해두어야 한다. 때문에 별달리 흥미도 없건만 향하게 된 인형사의 천막이었다. <valkyrie> 에이치는 천막의 입구에 걸린 바랜 황동의 팻말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작고 허름한 천막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이름이네. 살짝 머리를 숙이고 입구를 지나 텐쇼인이라는 이름을 대고 자리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무대와 객석이 모두 한눈에 보이는 자리. 그러면서도 무대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라고는 하나 최근 주목받는 극 답게 만석이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관객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이 무대를 하는 것 마냥 잔뜩 긴장하고 있단 것 정도였다.


인형놀이라...”


상당히 많은 돈을 지불한 만큼 좋은 의자였다. 극의 시작을 기다리며 의자 깊숙이 몸을 뉘이고 어쩌다 귀족들 사이에 이런 취미가 유행할 수 있었을까 고민해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의 정중앙에 나온 인형사의 선언을 시작으로 극은 시작되었다.


오늘의 너희는 과연 얼마나 이 나의 무대를, <valkyrie>의 인형들을 따라올 수 있을지 기대하지. , 기다리던 인형극의 시작이다.”


아마도 극을 진행하는 것은 단 세사람. 한명은 위에서 인형을 움직이며 전체적인 극을 실시간으로 조율하고 있었다. 또 한명은 무대 옆에 서서 노래로 마치 생명을 불어넣는 듯 했다. 마지막으로 그 사이에서 마치 톱니와 같이 모든게 맞물리도록 극을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에이치는 의외로 훌륭한 무대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클라이막스 즈음이었다.


날개달린 인간-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그것을 에이치는 너무 쉽게 또 완전히 기억 저편에 넘겨두고 잊고 있었다.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두 잊고 있었다. 심지어 어떻게 헤어졌는가는 다시 떠오르지 조차 않았다. 더 이상 빛나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관심에서 밀려났을 때, 그것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기억은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또 너무 간단히 돌아왔다. 인형들을 조종하는 실을 따라 시선을 올려 본 그 끝에 그가 있었다. 클라이막스를 연기하는 슈를 보며 에이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위해 의자의 팔을 꽉 붙들었다. 특별함은, 반짝임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별은 그 파편마저 반짝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와 악수를 나누며 맞잡았던 손이었다. 곧이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이츠키 슈. 그리고 에이치가 떠올린 것은 그날의 기억이었다.


풀어라. 텐쇼인. 텐쇼인 에이치! 에이치는 바닥에 엎드려 발버둥 치는 슈를 내려보며 미리 묶어 둔 것이 정답이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하고 풀어줄 생각이었다면 묶지 않았겠지?”


네놈. 대체. 텐쇼인. 계속되는 슈의 고함소리에 에이치는 잠시 입도 막아두는 쪽이 더 확실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가볍게 반성하곤 슈의 허리에 올라타 몸으로 무게를 실어 움직임을 눌렀다. 오른손을 좀 더 꽉 쥐었다. ‘이런용도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 날은 상당히 잘 서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왼손으로 날개 뿌리를 잡으니 파들파들거리는 것이 전해져왔다. 나는 여기에 있구나. 그것은 좋은감각이었다. 우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아이의 힘으로 그것을 쟁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손을 오르내렸다. 단정한 결과도 아니었다. 손부터 시작해 방과 여러 물건, 그리고 아마도 제 얼굴에 까지 난잡하게 튀었을 피는 무시했다. 꺼져가는 목소리 역시 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인지, 신음을 흘리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무시했다. 양손으로 쟁취해낸 것을 소중히 쥐고 일어서 장식장 앞에 섰다. 창에서 빛이 바로 들어오는 위치에서 유리 앞에다 날개를 펼쳤다. 에이치는 그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그 풍경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에이치는 슈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마워.”


아이는 티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명이 꺼진다. 막을 내린다. 커튼콜은 없었다. 이제 그를 향해 박수를 쳐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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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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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언라2018. 8. 19. 22:11

 "......그렇게 된 거야."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끝을 맺는 이블린의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그녀는 슬며시 제 앞의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가만히 그 안을 내려보았다. 잠시였지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조금 더 이블린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그녀가 더는 다른 말이 없자 금새 다들 각자 관심을 여기저기로 돌리기 시작했다. 성유계도 지상세계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그들을 위해 마련된 짧은 티타임의 장소. 그 원탁을 에둘러 이블린 정 반대편, 도니타는 제 옆에서부터 원탁을 둘러 앉은 이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쉐리. 스테이시아. 네넴. 씨씨. 마르그리드. 샬롯. 나딘. 아인. 이블린. 샬롯. 파르모. 지시자. 레드그레이브. 그리고-


 흐응. 도니타는 제 왼편으로 몸을 내밀어 그곳에 앉은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가 싶더니 몸을 돌리고 팔짱을 끼며 다시 의자에 몸을 던졌다.


 "
짧은 머리는 이런 느낌이구나."


 그녀의 혼잣말에 대한 대꾸는 한 자리 건너에서 들려왔다.


 "
짐의 인형에게 무슨 관심이라도 있더냐."
 "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내게 훨씬 좋거든."


 두 사람이 입꼬리를 밀어 올린 채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짧게 쉐리와 쉐리 사이에 서로에 대한 위로의 눈빛이 오갔다. 짧은 한숨 뒤로는 졸고 있는 네넴을 바라보는 스테이시아가 있었다. 아인과 나딘, 파르모와 지시자는 한데 모여 이야기에 열중이었다.


 "
소란스럽네요."
 "
그러게."


 그 모습을 웃으며 가만히 바라보던 씨씨가 슬그머니 이야기하니 마르그리드 또한 가만히 답했다. 대답이 돌아왔다고는 하나 제 쪽은 보지도 않고 입술만 달싹이는 모습에 씨씨는 입을 삐죽였다.


 "
선배 좀-"


 불만에 찬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했다. 공간을 가득 울리는 웅장한 종소리는 벽을 치고 몇번이나 다시 귀로 돌아왔다. 씨씨 뿐 아니라 모두가 우뚝 멈춰서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내 소리는 사그라져 여음만 자르르 귀에 남았다. . 찻잔이 원탁에 부딪혀 긴장을 끊었다.


 "
, 일어날까."


 마르그리드의 한마디가 신호인 양 그녀의 반대편에 위치한 문이 저 혼자 스르르 열렸다. 별다른 무늬가 없음에도 그 크기에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듯 위압감이 느껴지는 문이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한 명 한 명 줄지어 문을 나섰다. 그렇게 줄의 끝에 선 지시자의 모습까지 문 너머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다시 빼꼼 문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까치발을 들어 문고리를 붙들곤 한 손가락을 가만히 제 손에 가져간다.


 쉿.


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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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덥네.”


봄이 오는데 걸린 날에 비해 여름이 다가오는 속도는 한 달음이었다. 다가오는 러브라이브 예선에 연습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동시에 더워지는 날에 모두는-심지어는 그 카난도-지친 기색을 보였다. 잠시 가지는 휴식에 가장 먼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하나마루부터, 다들 볼이 발개진 채로 가빠진 호흡을 내뱉으며 땀을 닦았다.


카난은 제 무릎에 두 손을 짚은 채로 숨을 크게 한번 몰아쉰 후에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비는 호흡도 채 돌아오지 않아 보였지만 옆의 다이아에게 자신의 동작을 확인받고 있었고, 치카와 요시코는 부실에 두고 와버린 두 사람 몫의 수건을 누가 챙겨오는가를 걸고 진지하게 가위바위보가 한참이었다. 카난의 시선은 이내 요우가 리코에게 물병을 건네고 있는 방향을 향했다. 무슨 생각인지 그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양쪽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 표정으로 요우 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 요즘 만날 시간도 없는 거 아니야?”

“응?”


요우는 제 어깨를 툭 건들며 건네오는 카난의 말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먼저 반응한 것은 반대편에서 하나마루의 동작을 고쳐주던 마리 쪽이었다.


“잠깐, 카난?”


마리가 돌아보며 곤란한 표정으로 카난을 제지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카난이 다시 입을 여는 쪽이 더 빨랐다.


“응? 두 사람, 사귀고 있잖아.”

“카난 씨!”


급히 달려온 다이아와 마리가 카난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서야 카난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닫았다. 그리곤 경악한 1학년과 치카의 표정을 마주하고 머쓱하게 웃었다. 잠시 모두가 침묵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카난은 뒷목을 긁적이며 덧붙였다.


“혹시 비밀이었어?”

“에?!”


네 명에게서 동시에 터져 나온 소리는 옥상에서부터 근처의 산 구석까지 퍼져나갔다. 카난에게 집중됐던 시선은 동시에 슬쩍 뒤로 빠져 있던 요우와 리코에게로 향했다. 그사이 요우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고, 치카의 ‘요시코 쨩’에 반응한 요시코가 빠르게 그 퇴로를 차단했다.


“저, 우리…… 그, 슬슬 연습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2.


우선은 급히 도망가려던 요우를 치카와 요시코가 양쪽에서 붙잡았다. 그리고 요우가 붙잡혀 추궁당하는 사이 분위기를 살피다 슬쩍 빠져나가려던 리코는 하나마루가 끌어안아 버려 붙잡혔다. 그렇게 두 사람 모두 탈출은 실패했고 연행당하다시피 부실로 끌려갔다.


요시코가 마지막으로 들어오면서 좌우로 밖을 살펴본 뒤, 문을 닫았고 순식간에 요우와 리코를 둘러싼 작은 청문회장이 만들어졌다. 나란히 앉힌 두 사람의 건너에 치카가 앉아 두 사람을 빤히 노려봤고, 그 나머지는 세 사람을 둘러싸고 서 있어 자연스럽게 그림자가 졌다. 턱을 괴고 앉아 찌푸린 치카의 표정이 그 덕에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럴듯한 모습에 외려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요우와 리코는 앞으로 자신들 앞에 놓일 상황을 생각하니 긴장이 더 크게 앞섰다.


“일단…… 불부터 끌까?”

“자! 심연의 소리에 귀를 귀 기울이도록!”


요시코의 말이 시작됨과 동시에 루비가 부실의 불을 끄고 마리가 어디서 찾았는지 스탠드를 책상에 올려놓으며 스위치를 켰다.


“oh! mysterious!”


눈을 반짝이는 마리를 돌아보며 요우가 울상인 표정으로 올려봤다.


“마리 쨩은 우리 편 아니었어?”

“요우 쨩은 시끄러워! 시끄러워! 자. 그럼 지금부터 제1회 요우 쨩과 리코 쨩에게 진실을 촉구하는 질문 타임이 있겠습니다!”


‘1회?’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요우의 외침은 모두 무시하고 치카가 말을 이었다.


“그럼 첫 번째 질문은-”

“me! me! 나! 나부터 할래!”

“마리 선배?!”

“그치마안 마리도 궁금한 건 많았는걸.”


한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는 마리를 바라보며 입을 뻐끔뻐끔하던 요우의 항의는 치카에 의해 제지됐다.


“자, 그럼 청문회 시작이야!”

“이거 청문회야?!”

 

Q1. 자 어쨌든 그럼 마리 먼저! 두 사람 진도는 어디까-아! 아! 아파 다이아 아프다고! 알겠어. 알겠어. 그럼 음……. 어디보자…….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어? 아, 정말! 다이아 때문에 완~전 재미없는 질문이 됐잖아. 아무튼, 그래서 일주일 전에 누마즈에서 둘이 머리핀 고르고 있을 때? 아니면 사흘 전에 둘이 shiny-한 새벽 바닷가에서 손잡고 있었을 때쯤?

A1. 마, 마마마마리 쨩 그거 다 본 거야? 전부? 아아아아……. 분명히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보고 있었어? 어? 뭘…… 했진 않았지 물론. 특별히. 어. 그치. 아 정말 너무해! 그만 놀려, 마리 쨩! 아, 응. 그건 바닷가 쪽이 맞습니다. 네. 항복 항복. 와타나베 씨는 벌써 너덜너덜해져 버렸어요. -앗 그렇구나. 다녀와요 다이아 선배. 역시 힘들구나, 학생회장은. 아, 혹시 도울 일이 있으면 나도- 네.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응? 스, 킨쉽? 다이아 씨 가자마자 이러기야? -음……. 그. 손, 정도는 잡았어요. 끝! 정말 끝!

 

Q2. 아, 내 차례? 음……. 뭐로 할까. 아까 그거? 두 사람 만날 시간은 있, 겠구나. 어떻게든 하는 거지 역시 그런 건. 응응. 그럼, 두 사람 데이트는 주로 어디서 해? 아, 방금 얘기한 그런 곳들이려나? 그러고 보니 그날 말 걸려다 다이아랑 마리한테 붙잡혔었는데, 비밀이어서 그랬구나.

A2. 그때 다 같이 본 거였어? 하아……. 그렇지. 사실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기도 하고 둘이 낼 수 있는 시간도 넉넉하진 않았으니까. 그나마 여유가 있으면 시내로 나가거나, 아 그것도 몇 번 안 됐고, 아니면 근처 산책 정도였지. 그러게요. 그러면서 안 들키길 바랐던 게 너무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Q3. 왜! 왜왜왜 비밀로 한 거야? 왜 말 안 해줬어? 왜 나한테까지 비밀로 했던 거야! 왜 숨긴 거야?!

A3. 미안, 치카 쨩! 요우 쨩도 나도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그냥 타이밍이 조금 안 맞았어. 아무래도 시기가……. 말하려다가도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 지금은 괜히 얘기했다 집중만 흐트러뜨리고 안 좋은 영향이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다 보니 하루하루 지나서- 아, 다이아 씨 오셨어요?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네. 아무.튼 음. 그래서, 그니까 대회 후에 얘길 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정말로! 계속 얘기 안 할 생각은 아니었고, 서운하게 만들 생각은 더더욱 없었어. 정말! 정말이야! 그래도…… 미안해, 치카 쨩.

 

Q4. 루비도 궁금한 게 있는데 다음은 루비가 해도 될까요? 저기, 요우 선배랑 리코 선배랑 둘 중에서 누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했나요?

A4. 아. 그건 물론 나였지.


“-응?”


단언하며 바로 답을 한 요우는 리코의 시선과 함께 돌아온 반응에 자기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

“아니아니, 요우 쨩. 그건 아니잖아.”

“응?”

“먼저 좋아한 게 요우 쨩이라고?”

“응. 그렇잖아.”

“언젠데? 말해봐.”


주변에 자신들이 있단 걸 잊어버린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모두 슬쩍슬쩍 시선을 교환해가며 눈치를 살폈다.


“아니 그건-“

“거봐. 말 못 하잖아. 근데 어떻게 확신해?”

“그런 얘기 아니었잖아. 리코 쨩, 화난 거야?”

“아니야. 요우 쨩이야말로 지금 그런 얘기하자는 게 아니잖아.”


뭐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 것 같지? 어떡하지. 계속 있다가 괜히 리코 쨩한테 혼날 것 같은데. 슬슬 마리랑 모두는 빠져줄까? 은밀하게 입 모양과 시선으로 의견을 주고받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루비부터 차례로 부실을 빠져나갔다.

 

 

 

 

3.


마지막으로 도착했을 거라 생각하며 문을 열었는데, 부실에는 리코 쨩이 혼자 앉아있었다.


“아. 다이아 선배네랑 카난 선배 쪽에 급한 일이 생겨서 회의는 다음에 하기로 했어. 치카 쨩이 연락 안 했어?”


핸드폰을 열어봤지만, 메일도 부재중 내역도 새로운 것은 없다며 ‘0’으로 떠 있었다. 혹시 잘못해서 눌렸으려나, 하고 확인해 보았지만 역시 와있는 연락은 없었다.


“응. 안 왔네. 뭔가 엇갈렸나 봐.”

“나도 슬슬 갈까 하고 있었는데. 그럼 마침 마주쳐서 다행이네.”


리코 쨩이 웃어, 마주 웃었다. 아하하. 역시 조금 어색한가. 어서 와. 그리고 다녀왔어. 두 마디가 서로의 사이에 있던 많은 것을 허물었지만, 막상 둘이 있자니 조금 어색했다. 아니, 부끄러운 쪽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니 수화기 너머에서 우는 것을 들켜버린 일 이후로 단둘이 있는 것은 처음이네.


“아. 그렇지.”


응? 방금 리코 쨩 목소리 조금 떨렸나? 순간 생각이 스쳤지만, 잠깐이었고 내 착각이겠거니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기, 잠깐 시간 괜찮을까?”


고개를 끄덕이니, 리코 쨩은 곧장 팔을 붙잡아 끌며 부실을 나섰다. 어쩐지 조금 평소보다 걸음이 빠르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며 뒤를 따라가다 보니 도착한 곳은 음악실이었다.


“요우 쨩에게는 한 번쯤 들려주고 싶었어.”


피아노를 만지작거리며 옅게 웃는 모습에 반기며 답했다.


 “와! 나도 보고 싶어!”


잘 보이는 자리를 잡고 앉아 리코 쨩을 바라보니 눈을 한번 마주쳐주고 리코 쨩도 피아노 의자를 당겨 앉았다.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입을 꾹 다물고 첫 건반을 누른다. 동시에 잠시 호흡을 잊었다. 가끔 혼자 생각에 잠길 때 잠깐씩 엿보았던 조금 가라앉은 표정으로, 경직된 채 움직이는 팔과 어깨. 리코 쨩은 저렇게 싸운 거구나.  멋있다. 감탄은 눈에서 귀로 옮겨갔다. 선명하게 울리는 소리는 수영장의 가장 바닥에서 느끼는 것과 닮아있었다. 그 전부가 온몸을 이끌었다. 음악실은 연주회장이 되었고, 나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의 무대를 올려 보는 관객이 되었다.


저 애는 특별해.


손이 건반에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박수로 연주자에게 존경을 표했다.


“무슨 박수를 그렇게 열심히 쳐. 조금 부끄럽네.”


리코 쨩의 목소리에 음악실로 돌아왔다. 연주를 마무리하는 정중한 인사는 없었다. 관객도, 스포트라이트도, 화려한 드레스도, 막을 내리는 커튼도 없었다.


“아.”


음악실에는 리코 쨩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아. 와. 정말. 진짜 정말 좋았어! 진짜로. 정말로! 와. 나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진짜진짜 너무 좋았어.”


그다음 장면의 ‘조금 부끄러워하며 입을 여는 리코의 목소리’는 요란스러운 알람 소리가 끊어버렸다. 연주회장도, 학교의 음악실도 아닌 내 방의 침대 위.


아. 알았다. 리코쨩을 좋아하게 된 날.


왜인지 정답을 찾은 것 치곤 썩 개운한 기분이 아니었다.

 

 

 

 

 

4.


선명한 꿈을 꾼 탓일까. 등교 길부터 몸이 무거워 요우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요우 쨩, 좋은 아침!”

 “요소로! 좋은 아침, 치카 쨩!”


치카를 보며 인사하다 그 옆의 리코와 눈이 마주쳤다. 스치는 시선에 웃어주어 마주 웃는 두 사람의 사이로 치카가 슬쩍 끼어 들어왔다.


“지이이. 두 사람은 당분간 자숙기간이야! 알고 있지?”

“아하하. 치카 쨩 너무 그러지 말고-“


아. 그렇구나.


“치카 쨩, 아직 삐져있는 거였어?”

“삐진 게 아니지 이건!“


저 애는 특별해. 진짜야.


치카와 대화를 나누며 웃는 리코의 표정 위로 자신의 목소리가 겹쳤다. 내뱉은 적은 없지만, 분명 머릿속에 맴돌았던 자신의 것이 맞았다. 어딘지 찝찝한 기분이 드는 이유의 끝자락을 잡았다. 퍼즐이 맞아 들어갈수록 보이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은 그림이었다. 부끄러워.


“요우 쨩? 어디 안 좋아?”


걱정스런 시선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식도 못 한 채로 어물어물 둘러대다 보니 시선이 더 짙어졌다. 지금 좀 어색해 보이지 않을까. 눈길을 피해 시선을 사선으로 돌리고, 뻣뻣하게 움직이다 그대로 내달렸다. 이래서는 어색했는지 아닌지 고민할 것도 없잖아. 그렇게 속으로 자신을 책망하며 요우는 일단 내달렸다. 어차피 교실에서 다시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 건 교실 문 앞에 서서야였다.

 

 

 

5.


“앗! 요우 쨩이다! 요우 쨩! 리코 쨩이 찾고 있었어.”


교문 근처에서 치카가 먼저 요우를 발견하고 크게 팔을 흔들며 소리쳐 불러왔다. 요우가 쉬는 시간마다 리코를 피해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실을 뛰쳐나와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들어가기를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치카와도 별달리 대화를 나누지 못한 하루였다. 그리고 요우는 마주 인사하려다 리코가 찾고 있었단 소식에 치카도 눈치챌 정도로 굳어버렸다.


“혹시 어제 일 때문이야? 그럼 치카가 미안해.”

“앗. 아니야.”


두 사람은 같이 길을 걸어 내려가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애써 이야기를 돌리며 둘러대다 보니 내리막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리코 쨩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붉은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요우는 반사적으로 뒤돌아 도망쳐버렸다.

 


***

 


한숨을 내쉬고 리코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언제나의 하교 시간은 한참도 전에 훌쩍 넘겨 평소라면 집에 귀가했을 시간이었다. 음악실을 주욱 둘러 살피던 시선은 피아노 근처에서 잠시 머무르다 떨어졌다. 저벅저벅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걸어가 음악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문턱에 서서 돌아보며 툭 내뱉는다.


“요우 쨩.”


덜컹거리는 책상 쪽을 빤히 바라보자 새빨개진 얼굴을 부여잡고 요우가 기어 나오며 일어섰다.


“찾았잖아.”

“미안.”

“힘들었다고. 막 뛰어다니고.”

“미안해…….”

“왜 도망간 거야? 어제 일 때문이야?”


요우는 목이 꽉 들어차 막히는 감각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열심히 가로저었다. 바보 요우. 별것도 아닌데 이러면 더 이상해지잖아. 슬쩍 올려보았다 눈이 마주쳐 급히 다시 내렸지만, 이미 리코의 표정이 뇌리에 새겨진 후였다.


“나!”


반사적으로 터져 나왔지만 다음을 잇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나 기억났어. 리코 쨩은 좋아하게 된 거. 그 날 음악실에서 였던 거야. 그 때 리코 쨩이 정말 대단해 보였어. 정말, 정말 대단해서 그 옆에 있던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될 정도로. 나는, 리코 쨩의 특별함에 기대고 싶었던 거야.”


돌아온 건 요우의 이마를 가격한 리코의 손가락이었다. 감싸 쥐고 당황한 표정으로 올려보니, 자기가 더 아파하며 손가락을 흔들 던 리코는 요우와 눈이 마주치니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내가 이겼네.”

“응?”

“요우쨩이 나한테 반한 거 그때란 거잖아.”


둘 중 누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한 거에요? 루비의 질문 뒤에 나누었던 대화를 요우는 그제야 떠올렸다. 살짝 입을 벌린 요우의 반응에 리코는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혹시 아직도 그 날 단둘이 있었던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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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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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라이브!2018. 8. 19. 21:55

좋아해요.”

 

음절 하나 그리고 또 하나에 힘을 실어 토해내는 목소리에도 그것을 듣는 에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

 

우미가 내뱉은 짧은 문장은 에리의 귓가 어디에 걸려있을 뿐이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은 의식 없이 입가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보다 한 박자 느리게 고개가 따라 돌아갔다. 그렇게 에리의 시선이 우미에게 닿았을 때 우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절해, 에리는 채 몸을 다 돌리지 못한 그대로 멈춰 서버렸다. 슬픈 것인지 혹은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이었지만 그래도 우미는 에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가 작게 떨렸다. 그리고 이내 우미의 미간이 구겨졌다. 에리의 표정이 달라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우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던가, 에리는 확실하게 보지 못했다. 우미가 한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리더니 고개를 푹 숙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모습 그대로 쥐어짜 내듯 한 번 더 목소리를 밀어냈다.

 

좋아해요, 선배.”

 

작게 오르내리며 떨리는 어깨에, 후배의 그런 약한 모습에 에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에리는 뻗은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기 직전에 이해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그녀는 그제야 이해했다. 손이 작게 떨렸다. 뻗을 때보다 느리게 팔을 다시 물렸다. 그와 같이 걸음도 두어 걸음 물러나 우미와 거리를 두었다. 표정도 바뀌었다. 우미는 계속 무너진 그대로였다. 에리는 가만히 우미의 숙인 뒷머리를 내려보다 오른손을 제 등 뒤로 감췄다. 손에 힘이 빠지고,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아무 말 없는 두 사람 사이를 찢었다. 그 때 순간 렌즈에 스친 것은 경멸이 섞인 표정이었다. 조금 내려간 화면은 에리의 눈을 보여주지 않았다. 한마디 뭐라고 입을 움직였지만 모양뿐이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수고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조금 후에야 에리와 우미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지막이라며 전부 끝내자는 감독의 욕심에 꽤나 길어진 촬영이었다. 우미와 에리 뿐만 아니라 현장 모두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에리씨. 곁에 다가온 스태프의 부름에 에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화를 이어갔다. 대부분은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간단하게 부탁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우미는 두 사람 쪽을 잠시 바라보다 마무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선은 다시 그 가운데를 향했다. 가만히 온갖 생각과 함께 눈동자만 움직이는 와중에도 몸에 밴 습관으로 허리는 꼿꼿했다.

 

, 우미.”

 

에리는 어느새 뒤로 다가와 일어날 생각을 못 하는 우미에게 수건을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우미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바로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왜 아무것도 없는 쪽을 바라보고 있나 하고 에리가 우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 끝에 바닥에 부서진 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 아까 소리가 저. 한참 버티더니 결국 마지막에 부서졌네. 아쉬워라. 예뻤는데.”

에리! , 감사합니다.”

 

놀란 반응으로 보아 주변에 에리가 다가온 것을 정말로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화들짝 에리쪽을 돌아보며 우미 멍하니 한쪽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그제야 에리가 건네는 수건을 눈치채곤 받아들였다. 에리는 땀을 닦아내는 우미를 바라보다 새삼스레 머쓱해져 여기저기로 눈을 돌렸다.

 

두 사람 다 이쪽. 확인해 보겠어?”

 

때 맞춰 둘을 부르는 감독의 목소리에 에리와 우미는 !’ 동시에 대답하고 슬쩍 서로를 향해 돌아보다 눈이 마주쳤다. 에리가 생긋 웃어 보이니 우미 쪽에서 먼저 시선을 돌려버렸다. 도망친 것 같다. 에리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기분 탓이라며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평소보다 눈을 조금 낮게 뜬 채로 만들어진 동작을 한다. 화면에 비친 본인의 모습은 어딘지 낯설었다. 거울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구나. 에리는 새삼 신기해하며 모니터링을 계속했다. 화면 속의 그녀가 몸을 한 바퀴 돌리더니 유리 너머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저기 서있는 나는 춤을 추고 있는 것과 비슷할지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니까.”

 

감독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시선은 계속 모니터를 향했다. 그 때 화면이 바뀌었다. 웃고 있는 우미의 표정이 화면을 한가득 매워 어딘지 부끄러운 기분이 돼버렸다. 감독이 계속 무어라 자기 감상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에리는 힐끗 우미를 돌아봤다. 우미의 눈은 계속 화면에  고정돼있었다. 역시 우미. 대단한 집중력이네. 화면을 따라 움직이는 우미의 눈동자를, 다시 에리가 따라간다. 작게 오물거리는 입은 아마도 했던 대사를 안으로 따라 반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일순 우미의 표정이 변했다. 많이 티를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가라앉은 눈으로 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럴까하고 에리가 화면을 돌아보니, 때맞춰 보이는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가 내비친 표정이었다. 연기라지만 본인을 향한 것이니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화면이 검게 변했다.

 

이걸로 끝이네. 그동안 수고했어요, 두 사람 다.”

 

. 악수를 건네는 손을 맞잡으며 에리는 그제야 그 단어를 실감했다. 길다기에도 짧다기에도 미묘한 삼 주간의 시간이 끝이 났다고 한다. 어떤 기분인지 정리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에리에 이어 우미에게 악수를 건네는 감독 뒤로는 설치해둔 기구들의 정리가 한창이었다. 분주하게 뒷정리를 하는 스텝들을 보며 에리를 문득 삼 주전, 일의 시작을 떠올렸다.

 

 

***

 

 

-3학년 아야세 에리 학생은 이사장실로 와주세요.

 

방송을 듣곤 의아한 표정이 되어 에리는 부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마침 멀지 않은 복도에 있었다. 노크를 두번.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익숙한 이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하곤 에리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익숙한 하나가 아니었다. 이미 안에는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 부원도, 학교 관계자도 아니었다. 여대생일까. 정장 차림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다. 일단 꾸벅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하며 누구일까 고민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서와요, 아야세양.”

이야기 중이시면 밖에서 기다릴까요?”

 

에리의 물음에 답하기 전에 이사장과 그 손님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요. 아야세양과 관련된 분이니 들어오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에리는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장실의 문은 언제나 꽤나 큰 소리와 함께 닫혔다.

 

 

***

 

 

"영화출연?“

 

여덟 명 분의 놀란 목소리가 겹쳐 부실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가장 먼저 눈빛이 변해서는 이야기를 이어간 것은 니코였다.

 

"과연! 조금 늦기는 했지만 드디어 이 니코니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나타난 거구나!“

 

당황한 기색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니코의 한마디를 시작으로 모두 조금씩 상기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두셋씩 서로 눈을 맞추어 가며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부실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적극적인 것은 단연 니코였다.

 

"그래서 장르는? 내 배역은?"

"잠시만. 잠시만. 하나씩 설명해줄게.“

 

에리가 두 손을 내저으며 니코를 진정시키는 사이, 그런 그녀의 뒤에 가만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가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부턴 내가 설명할게.“

 

처음 보는 얼굴에 다들 어렴풋이 짐작은 하면서도 누구인가 궁금해 하던 참이었다. 말을 꺼내자마자 소란은 가라앉았다. 부실을 한 바퀴 둘러보아 모두의 집중이 자신에서 쏠린 것을 확인하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우선 나는 이번에 일을 제안한 사람명함은 학생회장님 통해서 전해뒀으니 나중에 확인해봐. 우선 이것부터 확실히 할게. 내가 영화 출연을 부탁하고 싶은 건 저쪽의 두 사람이야.”

 

그녀가 두 손을 들어 가리킨 손의 끝에는 각각 에리와 우미가 있었다. 모두, 특히나 에리와 우미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은 채로 굳어버린 와중에 니코만 냉정해진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장르가 어떻게 되는데요? 본격적인 얘기 전에 대본은 확인해 볼 수 있는 건가요?"

"자자, 하나씩 설명해 줄 테니까. , 우선 하나씩 받아줘요.“

 

그녀는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한 뭉치의 종이 다발을 꺼내 들었다. 하나씩 하나씩 옆으로 전달해 부실의 모두가 전달 받고 보니 니코가 언급했던 대본이었다. 모두 받아들고 바로 읽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참 사륵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리더니 어느 순간 비슷한 때에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대본을 내려놓는 이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조금씩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 모습들을 감독은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 여유롭게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괜찮은기가?”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노조미였다.

 

신중히 결정해야 하긴 하겠지만 나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정작 당사자인 에리는 대본을 덮어 내려놓으며 비교적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를 받았다.

 

괜찮을까, 정말?”

뮤즈의 이미지에 문제는 없는 거야?”

당사자인 에리와 우미만 괜찮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각자 한마디 씩 보태는 와중에 감독이 나서며 설명을 시작했다.

 

다들 봤겠지만, 주인공인 여자아이와 그녀가 짝사랑하는 여자아이의 얘기야. 각각의 역할을 아야세양와 소노다양이 맡아줬으면 하는 거고. 이 후의 얘기는 이 점을 확실히 알아둔 채로 진행해줘. 일단 기획사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리려나. 작은 독립영화를 찍-”

 

파렴치합니다!”

 

갑자기 감독의 말을 끊으며 외친 것은 우미였다. 한순간에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옮겨갔다. 우미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대본에 얼굴을 묻을 듯이 있었다. 이제는 모두 내려놓은 대본을 마지막 까지 정독한 모양이었다. 이내 그 마지막 페이지를 쫙 펼쳐 테이블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확고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는, 절대! 절대 못해요!”

 

 

***

 

 

곤란한걸.”

 

감독이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이야기에도 단호한 표정의 우미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미의 이야기에 뮤즈의 모두 다시 대본을 펼쳐 들었다. 문제는 마지막 장면에 있었다.

 

, 키 키스라니! 그런 파렴치한! 저는, 절대로, 못 합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있는 힘껏 고개를 휘두르는 우미의 표정은 단호했다. 입을 꾹 다물고 조심스럽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전부 눈을 감아 차단해버린 지금도 생각에는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런 우미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리가 나서 대표로 해야 할 이야기를 꺼냈다.

 

죄송하지만 저희 멤버의 입장이 저렇다면 저희 쪽에서는 무리하게 진행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 감독은 금방 답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제 턱 주변을 감싸 쥐고 눈을 감더니 생각에 잠겨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는 감독은 조금 후련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하지. 개인적으로 놓치고 싶지 않아. 대본을 수정한다면 괜찮겠어?”

 

 

***

 

 

그렇게 키스하는 장면을 지우고 대대적으로 대본을 수정하고도, 긴 설득 끝에 시작할 수 있었던 촬영은 의외로 순탄하게 끝이 났다. 삼 주간 매일 같이 에리와 우미 둘이 함께 돌아가던 길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귀갓길은 한산했다. 보도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드문드문 옆으로 차가 한 대씩 지나갈 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자니 두 발소리가 겹쳐 들리다 쌩 지나가는 차 소리에 묻힌다.

 

어떻게 무사히 끝났네.”

그러게요.”

 

우미는 웃으며 에리의 이야기에 답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며 동시에 웃음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우미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계속 신경이 쓰이던 그 표정이었다. 슬쩍 곁눈질로 그런 우미를 살피던 에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어쩐지 아쉬운걸.”

?”

 

우미는 에리가 멈추어 선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혼자 두어 걸음 앞 서 나가다 에리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에리는 손목의 시계를 내려 보았다. 여섯시를 조금 넘긴 시각. 이르진 않지만 해가 꽤나 길어져 아직 주변은 밝은 편이었다.

 

아직 시간은 괜찮은 것 같은데.”

 

에리는 일단 우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통보했다.

 

, 가자.”

? 저기 에리? 무슨-“

자자, 그러지 말고.”

 

억지로 이끄는 손길이었지만 우미는 저항하지 않았다.

 

 

***

 

 

정말이지. 지쳤습니다.”

그렇게 말은 해도 말이지. 우미가 나보다 훨씬 즐긴 거 아니야?”

 

실제로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앞으로 쭉 기지개를 켜는 에리의 표정은 우미에 비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에 발갛게 볼이 상기되어 있던 우미는 후다닥 표정을 감추며 무표정을 가장했다. 그런 우미를 향해 에리는 제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덧붙였다.

 

마지막에 게임센터에서 우미, 무서웠다니까.”

아니, 그런, 그건! 에리야말로 쇼핑할 때는 갑자기 사라지기까지 했잖습니까?”

, 그건-“

 

에리는 반사적으로 대꾸를 하려다 말고 슬쩍 자신의 교복 치마 주머니 안쪽을 뒤적였다. 그리곤 잡히는 것을 손 안에서 조금 굴리다 놓아주곤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미안, 미안.”

정말이지. 말 없이 사라지면 걱정되잖아요.”

그치만 그렇게 따지면 우미도 별로 할 말은 없잖아.”

 

늦은 밤 귀갓길은 그 저녁의 이야기로 한 가득이었다. 저녁으로 한참의 고민 끝에 결정한 카레집. 이후의 장소들은 왜인지 에리의 독단으로 결정되었다. 옷가게, 악세사리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에는 들어선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한 우미였다. 그곳을 빠져나올 때 즈음엔 이미 기운을 거의 다 탈진한 것처럼 보였다. 이어서 향한 게임센터에서도 역시 처음에는 별로 달갑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승부욕에 불타올라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에리 쪽에서도 물러 설 용의가 없어 결국은 게임센터를 나서면서 까지도 최종적으로 누구의 승리인지 날을 세웠다. 그렇게 뛰고, 웃고, 떠들고 저녁시간은 금방도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새 귀갓길의 갈림길이었다. 한적한 골목길에 가로등이 하나. 이전까지의 귀가시간에는 꺼져있던 가로등이 오늘은 밝게 길을 밝히고 있었다.

 

여기서 우미는 저쪽이었지?”

? , . 그렇네요. 오늘은 에리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 잠시만.”

 

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에리는 조그마한 머리핀을 하나 꺼내들었다. 단순한 검은 몸체에 꽃모양으로 올라간 푸른 보석. 익숙한 모양이었다.

 

이거 우미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 깨져서 아쉬웠거든.”

 

직접 머리에 핀을 꼽아주는 것을 가까이에서 올려보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린다. 한계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쉽게. 우미의 표정이 무너져버렸다. 다됐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한걸음 물러나고서야 에리는 우미의 표정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우미?”

에리는치사해요.”

우미? 우는 거야?”

 

우미는 대답은 않고 고개를 똑바로 들며 에리를 향했다. 눈을 바로 마주치는 우미의 모습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마주했던 그 표정이었다.

 

좋아해요.”

 

. 먹먹한 목을 간신히 비집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우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우미의 뒤로는 가로등 불빛에 뿌옇게 먼지가 끼어있었다. 손을 가볍게 말아 쥐고 있었다. 핀은 머리색과 잘 어울렸다. 그제야 에리는 우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에리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우미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리고 왜 그녀 자신이 그렇게나 우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는지.

 

좋아해요, 에리.”

 

말이 더 필요하지는 않았다. 에리는 우미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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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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