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러브라이브!2018. 10. 21. 01:26

특별히 기대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검토를 마친 서류를 옆으로 옮기고 처리해야 할 새 서류를 끌어다 앞으로 놓는다. 턱을 괸 채 툭툭 괜히 볼펜의 뒤 축을 괴롭히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에리는 차분하게 자신의 추론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았다.


첫째. 오늘은 1021일이다. 둘째. 며칠 전 린이 뭔가 갖고 싶은 것이 없냐며 넌지시 물어왔다. , 뮤즈 멤버들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 학생회에서 만났을 때 노조미가 어딘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린 것과 묘하게 평소와 다른 톤의 목소리까지 더해보면 이것은 분명-


에리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향해가던 와중에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은 우미’. 언제나처럼 <안녕하세요, 에리.>로 시작한 한껏 격식을 차린 메시지는 한참 이어져 <그럼 이만.>으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장장 서른 줄에 걸친 메시지는 요약하자면 지금, 부실로 와주세요.’였다. 드디어-인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에리는 앞에 있던 서류를 들어다 책상에 툭툭 쳐 정리해 뒤집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리는 부실의 문고리를 붙들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기를 두 번,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고 또 표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나서야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에서 들려온 우당탕 뭔가 무너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부실의 전반적인 상황으로 예상컨대, 의자와 함께 넘어져 앞으로 고꾸라진 호노카와 눈이 마주쳤다.


-헤헤헤. 생일 축하해, 에리쨩.”


잠시의 정적은 머쓱하게 내뱉은 호노카의 목소리가 깨뜨렸다.


--!”


바로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기세로 달려드는 우미와 그런 우미를 말리는 코토리의 모습에 그제야 에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부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직접 써서 붙인 것이 분명한 ‘happy birthday!’는 두세 명이 함께 준비한 것인지 글자마다 꾸민 모양이 달랐다. 테이프가 단단히 붙질 않아 바닥에 떨어진 풍선을 보아하니 급하게 준비한 티가 역력했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부터 에리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까지 준비를 마쳐야했으니 시간이 꽤 빠듯했던 셈이었다.


이제 노래할까?”


에리를 중심으로 전원이 둘러 모이니, 코토리가 구석에서 케이크를 꺼내오며 이야기 했다. 진한 초코 케이크의 자태에 맛을 상상하며 에리의 입에서 언제나의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하라쇼!”


케이크에 시선이 집중되어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다보니 코토리의 등 너머로 부실 창문에 비친 그림자가 보였다. 에리는 인영으로 보이는 실루엣만으로도 바로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림자는 금방 모습을 감췄다.


잠시만.”


에리는 곧장 코토리의 옆으로 돌아 나와 모두를 부실에 남겨두고 혼자 빠져나왔다. 부실을 나서자마자 그림자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돌 연구부의 팻말이 적힌 문, 그 바로 옆의 벽에 팔짱을 낀 채로 기대있는 모습은 에리에겐 너무나도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동시에 어딘지 낯설었다.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상대방은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이 썩 맘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먼저 입을 열며 뱉은 목소리는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시끌벅적하네.”

그래도 좋아하잖아, 저런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에리는 팔짱을 풀었다.


저게 정답이야?”


몸을 틀어 마주보며 물어오는 그녀의 표정 찌푸려져 있었다. 그 모습에 에리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저런 표정이었구나.


괜찮아. 그리고-”


가볍게 그녀의 미간사이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생일축하해.”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에리가 돌아보니 발레복 차림의 어린 아이가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에리는 쪼그려 앉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지금 행복해?”

.”


에리는 아이의 질문에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리고 아이는 그런 에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야기했다.


생일축하해!”


부실에서 들리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에리가 두사람을 문 밖에 남겨두고 다시 부실로 들어서는 순간 펑 폭죽 소리가, 그리고 바로 이어 호노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못 터뜨려서...”


호노카도 참. 웃으며 다시 모두의 사이로 들어가니 진동소리가 들렸다. 책상 위에 있는건가. 소리가 꽤 크네. 금방 꺼지겠지. 에리쨩 핸드폰 울리는데? 괜찮아 지금은-


-깨고 싶지 않으니까. . 지금. . 이겠구나. 꿈은 자각하고 나면 깨진다. 아직 눈은 뜨지 않았지만 에리가 있는 곳은 이제 오토노키가카 고교의 아이돌 연구부 부실이 아닌 자신의 방 침대였다. 눈치 없는 진동소리는 계속 울렸다. 에리는 엎드린 채로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다시 풀썩 배게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 싫다. 와중에도 진동소리는 울리고 있었다. 에리는 꾸물꾸물 이불에서 오른손만 꺼내다 침대 위쪽을 더듬거렸다. -- 울리고 있는 핸드폰의 앞면, 알람 끄기가 있을 익숙한 위치를 눌렀다. 하지만 계속 울리는 진동은 점점 커지는 것 같은 착각까지 일으켰다.


대체! 왜 안꺼지는거야!”


결국 폭발해 상체를 훅 일으킨 에리를 맞아준 것은 알람 화면이 아닌 전화 수신 화면, 그리고 화면에 찍힌 니코라는 이름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미안!’이라고 외친 후 10분 새 에리는 상당히 말끔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니코의 노성은 당연히 에리가 온전히 감당해야했다.


실컷 화내놓고 이제 와서 차분한 척 해봐도 늦었는데요, 니코니씨.”


핸드백에 지갑을 넣으며 궁시렁거려 봤다가, 에리는 고함소리에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핸드폰을 귀에서 멀찍이 떼어 내야했다.


. 미안해. ... 그러니까... 늦잠을 좀....”


다시 한번 핸드폰이 에리의 귀에서 멀어졌다.


. . 금방 갈테니까.”


핸드폰을 내려놓고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와이셔츠 깃을 만지고 핸드백을 들어다 어깨에 걸쳤다. 그렇게 바로 밖으로 나서려 움직이던 에리는 다시 뒤로 걸어갔다. 책장 위에 놓여있던 액자가 살짝 삐뚤어져 있어 바로 하고, 아홉명이 모여 학교 강당에서 ‘start dash!’ 공연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그 사진 속의 그녀에게 슬쩍 인사를 건넸다.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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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2018. 8. 19. 22:43

1.


  후후후. 그동안 정말로 고생도 많았지. 팔짱을 끼고 벽에 좀 더 깊이 기대며 그동안의 고생들을 떠올려봤다. 나같이 꼭 필요한 미끼… 아니, 인재도 제대로 판단을 못 하고 실수 좀 했다고 내쫓는 그런 녀석들 사이에서 눈치 보는 건 이제 끝이야! 아멜 녀석이 또 때리는 건 아닌지 짜증 내는 건 아닌지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나한테도 파트너가-정말로 날 위해주는-파트너가 생겼으니까!


  “오래 기다렸어?”


  기척도 못 느끼고 있었는데 옆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면서 말을 걸어와 순간 놀라 뒷걸음질을 쳐버렸다. 깜짝… 놀랐네. 그런 내 모습에 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금방 웃었다.


  “아니. 아니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그래?”


  니나는 내 손을 붑잡아 이끌며 말했다.


  “그럼 들어가자. 여기 커피가 맛이 좋다고 하더라고.”

 


***

 


  “마리아는 캐러멜 마키아토 맞지?"


  먼저 앉아서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니나가 커피를 받아 온 모양이었다.


  "!"


  니나는 우선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 두고, 커피 두잔 중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더니 다른 하나를 든 채로 맞은편 앉았다. 뭘 좋아하는지 기억도 해주고 내 파트너는 상냥하다니까. 맨날 벌이니 뭐니 하는 포악한 누구누구 씨랑은 달라! 필요 없어졌다고 바로 버리는 누구랑도 다르고 말이지! 좋아, 마리아. 넌 이제 다 된 거야. 이제 안정적으로 여기 있을 수 있는 거라고. 기분 좋은 생각에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는 그대로 두고, 니나에게 받을 때부터 꽂아져 있던 얇은 빨대를 살짝 물고 조심조심 빨아들였다. , 이거 맛있다. 어제 갔던 아이스크림 집도 맛있었는데 말이야. 다시 한 번, 방금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조금 대담하게 빨아보았다. ~. 달아.


  “맛있어?”

  “응! . 니나건 뭐야?”


  내 물음에 니나는 뚜껑을 열어뒀던 커피를 살짝 들면서 대답했다.


  “라떼야. 카페라떼.”

  “아! 그거 로네도 좋아하던 건데!”


  아. 그래서 뭐 어쩌려고. 그런 녀석 이제 아무래도 좋은데. 괜히 기분이 안 좋아져서 쟁반에 남아있던 빨대를 집어와 꼬깃꼬깃 접어버렸다. 정말! 정말로 그런 녀석 아무래도 좋은데 말이야. , 괜히 말 꺼내서 니나도 뭐라고 대꾸 못 하게 만들고. 이게 뭐야…….


  “로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니나가 작은 목소리로 되물어왔다. 슬쩍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표정을 살펴본다. . 니나도 이상한 표정이잖아. 기분이 안 좋은 걸까? 왠지 웃는 것 같기도 한데. 아 정말! 바보 같은 마리아!


  “그렇구나. 로네도 좋아하는구나.”

  “어……. . 좋아하더라고.”


  어쩐지 나한테 얘기하는 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일단 앞에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 대답하는 게 맞겠지. 웃는 걸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걸까. 다행이다. 왠지 눈이 마주치지 후다닥 표정이 변한 것도 같지만, 별거 아니겠지 뭐.


  “저기…. 마리아.”

  “응?”


  왠지 모르게 니나가 손가락을 꼼질꼼질 가만히 두질 못하고 있었다.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주저하지 말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니까!


  “그… 로네는….”


  로네?


  “음…. 로네는 어… 잘 챙겨줬었어?”


  내 걱정이었던 거야? 이럴 수가. 역시 니나는 천사라니까. 어차피 다 지난 일로 니나한테 걱정 끼칠 필요도 없겠지.


  “응. 나름대로, 그때는 되게 잘 챙겨줬었어. 다른 애들이 뭐라고 할 때 감싸준 적도 많고. 그랬으니 나도 그래서 좋아했던 거고.”


  좋은 파트너였지 그때는.


  “좋아…한…. 그렇구나…….”


  표정이 안 좋네…. 내가 뭔가 실수했나.


  “선물… 음….”


  앗. 혹시 니나가 또 내 선물이라던가 고민하고 있었던 건가? 그러느라 고민하는 표정이었던 거야? 그런 거 안 챙겨줘도 되는데 말이야. 너무 받은 게 많아서 미안할 정도고. 여기서는 어른스럽게 사양하는 게 맞겠지.


  “저기 있지. 마리아는 로네랑 오래 같이 있었으니까 잘 알고 있지 않아? 혹시 로네가 선물로 받으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응? 로네?

 




2.


  딱 어제 내가 니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벽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빨리도 나왔네. 혼자 나오라는 건 또 뭔지. 이제 리더도 파트너도 아니면서 오라 가라야. 아직도 내가 지네 말에 설설 기는 그런 애로 보이니까 이런 식으로 불러내는 거겠지.


  “무슨 일로 불러낸 거야?”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얼굴 좀 펴.”


  인상을 팍 쓰고 물어보는데 끝까지 생글거리는 것도 진짜 얄밉구나. 팔짱을 끼고 노려보다 계속 살살 웃는 표정에 기분이 이상해져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 들어가자. 여기 내가 추천하는 곳이거든.”

 


***

 


  “머리에 그거 처음 보는 거네.”


  자기 머리를 툭툭 치면서 얘기하길래 로네의 머리 위를 올려 봤다가 그제야 내 머리를 얘기하고 있는 걸 알아채고 다시 눈을 커피잔으로 돌렸다. 손으로 슬쩍 내 머리를 더듬어 보다 퍼뜩 생각이 났다.


  “아아. 이거.”


  기회다!


  “내 파...가 선물로 준 거야.”


  며칠 전이던가 니나랑 둘이 외출했을 때 선물로 받은 머리핀이다. 그러니까 말이지 로네 너랑 같이 안 있어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다 이거야. 새로운 파트너 덕분에. 흐흥. 표정이 좀 안 좋아진 것 같은데, 쌤통이다. 내가 너 아니면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았지? 계획대로 안돼서 어떡하냐.


  “아 그래? 니나가?”


  이, , 로네는 내가 잘 지내고 있는 게 그렇게 기분 나빴던 건가. 이렇게까지 반응이 바로 올 줄은 몰랐는데.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티가 팍팍 나는 저 표정은 대체 뭐냐고. 아니 뭐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군. 날 내친 걸 조금은 후회하고 있나. 후후후.


  “그래! 여기도 말이지 사실 니나가 먼저 데려와 줬었다고.”

  “니나가 말이지?”


  왜, 왜 기분 나쁘게 씨익 웃고 그런담. 니나 자랑 좀 더 하려고 했는데 한순간에 소름이 돋아 김이 팍 식어버릴 정도의 표정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네 정말. 원래 그렇게 잘 알겠는 애는 아니었지마는 말이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 틀렸었고. 나도 모르게 어깨가 내려가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졌어. 여기 왜 나온 거지 정말.


  “그래서, 정말 무슨 일로 부른 건데?”

  “무슨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이 팀에서 내보내긴 했지만 마리아 널 싫어한 건 아니란 거 알잖아.”

  “알기는 무슨….”


  아니란 건 잘 알고 있는데, 또 그때랑 똑같은 목소리로 기분을 풀어주니 괜시리 기분이 나쁘진 않다.


  “왜. 누가 또 나만큼 잘 알겠어. 네가 많이 노력했단 것도 알고 그동안 도움도 많이 됐었는걸.”


  흐, 흐응.


  “많이 안심했어. 니나랑, . 니나가 잘 챙겨주고 있는 모양이네.”

  “뭐 그렇지. 좋은 파트너야.”

  “응…. , 그렇지.”


  로네는 자기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조금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멜도 요즘도 종종 만나고 그래?”


  아멜- . 아하. 그렇구나. 아멜 얘기 캐내고 싶어서 만나자고 하고 이렇게 비위도 맞춰 주고 그런 거구나. 얼마나 바보로 본 거야 날. 입을 아예 꾹 다물어 버렸다. 아멜도 막 예쁘게 구는 건 아니지만 너한테 아멜 얘길 해줄 것 같아? 아멜 얘긴 절대 안 해줄 테니까. 어디 보자고.


  “니나가 요즘 뭐에 관심 있는지 알아?”


  응? 니나?

 




3.


  마리아 님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거든. 니나랑 로네가 그러니까 내 예전 파트너랑 지금 파트너가, 바로 얼마 전에 싸움도 있었던 두 사람이 어째서 한자리에 앉아서 그것도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거고, 나는 어째서 숨어서 그걸 엿듣고 있는 거야? . ! 진정하자 마리아. 차근차근 넌 생각할 수 있어. 이 상황을 파악해 낼 수 있어. 그러니까 처음이 먼저 그러니까 뭐였지. , 그래. 카페. 카페 카운터에 혼자 앉아 있었지.


  캐러멜 마키아토를 시켜서 혼자 우아하게 마시면서 잠시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고, 그때 고개를 돌리다 눈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고 생각됐다. 다시 돌아보니 니나가 카페로 들어오고 있었다. 역시 파트너. 통하는 게 있다니까.


  “니나-“


  벌떡 일어서서 소리 내 부르려다 뒤따라 들어오는 모습에 내 손으로 입을 확 막으면서 후다닥 다시 앉아버렸다. 니나가 왜 로네랑 같이 있지? 당황해 굳어있는 사이에 두 사람은 내 옆으로, 정확히는 카운터 앞으로 와버렸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일단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거의 숨도 멈추고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로네도 카페라떼 맞지?”

  “어떻게 알았어?”


  곁눈질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네가 몸을 돌려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 버렸다.


  “아, 저기 자리 있네.”


  이렇게 시끄러운 와중에도 내 심장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수 있구나. 속으로 백까지 센 후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옆에는 없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리다 뒤쪽으로. 소파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탐색을 계속하니 꽤 멀찍이 두 사람이 자리를 잡은 게 보였다. 어쩐다. 정말로 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 혹시 니나 협박당하고 있는 거 아니야? 협박은 아니라도 로네가 니나를 이용하려고 하는걸 수도 있고. 안돼. 파트너로서 이대로 있을 수 없지. 우선은 두 사람을 주시하다 둘의 뒷자리가 비어있는 걸 확인하고 컵을 들고 일어났다. 슬쩍 뒤를 한번 돌아보고, 후다닥 한자리 가까이로. 다시 한 번 일어서다 고개를 돌리는 로네의 모습에 놀라 모르는 인간의 옆에 앉아버리고. 그리고 다시 한 번 움직여서야 겨우 두 사람의 뒤, 정확히는 니나의 등 뒤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 어디 들어보자고. 혹시라도 로네가 뭔가 꾸미고 있다면 이 마리아 님이 파헤쳐서 니나를 구해주겠어.


  -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당연히 두 사람의 뒤에 앉아서 내가 듣게 된 대화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어제 마리아랑 만났어.”

  “만났던 거야? 얘긴 잘 나눴어?”

  “응. 잘 챙겨주고 있는 것 같더라.”

  “그야, 소중한 파트너니까.”

  “아- 그래?”

  “앗. 혹시… 방금 말 기분 안 좋았어? 그런 뜻이 아니고….”

  “나도 알아. 니나가 그럴 뜻 없었다는 거. 그냥- , 여기 마리아랑 왔었다면서?”

  “응 많이 좋아하더라.”

  “안 그래도 자랑하더라고. 여길 소개해줬던 게 나였던 건 몰랐던 모양이지만.”


  당연히 전혀 몰랐다.


  “아, 로네가 라떼를 좋아한다는 거 마리아한테 들었어.”


  그렇지. 내가 얘기해줬지.


  “내가 몰랐던걸 마리아를 통해서 알게 된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로네에 대해서 더 알게 돼서 좋았어.”


  아. 틀렸다. 힘이 빠져버렸다. 모르겠다. 뭐지. 마리아 님은 모르겠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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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2018. 8. 19. 22:22

가학적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너무 밝은 스포트라이트에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린다. 다시 돌아본 그 아래 덩그러니 놓인 의자. 타박타박. 걸음 소리 끝에 그 아래 앉는 것은 금발의 청년이다. 청년은 아이같이 웃는다. 이어 그는 다리를 꼬며 입을 연다. 그 목소리 역시 아이처럼 들떠있다.


. 이츠키 슈 맞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해봤자 너무 티가 나잖아, 이츠키군. 조금은 반가워해 줘. 그래도 어린 시절의 친구. 비슷한 거잖아? 어때? 좀 그리운 느낌이 들어? 정말 여전하구나, 그 오만한 태도는. 아니, 이츠키군이니 오만한 것이 아니라 도도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건 그리운 느낌이네.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 최선을 다해 비꼬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이야. 그래 봤자 달라질 것도 없잖아. 땅도 가신도 없이 제왕의 면모를 뽐내봤자 말이야. 아니 이츠키군의 경우라면 인형도, 실도 없이 인형극을 하는 꼴이라고 해야 할까? 발키리였던가? 그쪽도 그리운 표정이네. 그렇게 살벌한 표정 짓지 않아도 네 기특한 인형들을 부수진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그 아이들은 좀 더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느 쪽의 인형인지 내가 설명해 야해? . 말이 없어졌네. , 이거? 기다려봐. 과일 정도는 깎을 수 있게 됐거든. 칼 다루는 거 말이야. 꽤 익숙해졌어. 후후. ‘질린다 하는 눈초리네. 너무하잖아. , 이츠키군보다는 잘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 도련님 같은 느낌이었잖아? . 이번에는 '네가 할 소리냐. 맞지? 후후. 즐겁네. 아니. 놀리는 게 아니야. 요즘 영 즐거운 일이 없었으니까. , 정말로 이츠키군과 다시 만난 걸 즐거워하고 있어. 소중한 것을 다시 만났는데 기쁘지 않을 리 없잖아.


손을 입가에 가져가 입꼬리부터 곡선을 따라 훑어 내려온다. 그렇게 자신의 표정을 확인한다.


이상한 표정이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그러니까 말했잖아. 사랑한다고 말이야.




불이 꺼진다.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백은 잠시. 청년이 바라보던 맞은 편에 팟 조명이 들어온다. 그 아래에 서 있는 것은 작은 아이. 소년, 텐쇼인 에이치는 웃는다. 아이답게.


아이가 알고 있는 소중한 것을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손안에 꽉 쥐는 것이었다. 햇살을 품어 반짝이는 모래는 아이에게 충분히 특별한 것이었다. 잡히지 않는 것을 쥐기 위해 아이는 무던히도 애를 썼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감각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그 한 줌 한 줌을 흔적이나마 그러모아 방 한 쪽에 쌓아 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년의 왕국. 에이치는 그곳의 황제였다. 가지런히 정리된 빈 액자들은 붉은색 천으로 감싸 금실로 자수를 새긴 고급품이었다. 그 옆으로 늘어선 목제 병사 인형의 몸통 위로는 금화가 하나씩 놓였다. 어렴풋하게 들리는 음악 소리는 며칠 째 들리는 익숙한 곡인지라 정확히 들리지 않는 와중에도 아래층에서 연주하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음을 따라 흥얼거린다.


성의 한가운데에는 빈 장식장이 놓여있었다. 전면이 통으로 유리로 되어있어 안이 바로 들여다보이는 장식장이었다. 겉이 나무로 틀이 짜여있는데 어린 에이치의 안목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작은 손으로 유리를 쓸어보면 잔 흔적들이 손에 밟혀, 그렇게 버티고 서 있었던 시간을 짐작하게 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에이치의 기억 속에 장식장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에이치보다 먼저 방의 공간을 사용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 이전에 어떻게 쓰였는지, 누가 쓰던 물건인지,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것인지, 그리고 왜 빈 채로 계속 그렇게 남아있는지 모두 에이치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에이치가 안을 들여다보는 지금, 장식장의 안은 텅 비어있었다. 에이치가 그 바로 앞에 서 있자면 목을 한껏 꺾어야 그 꼭대기를 볼 수 있었다. 도로 시선을 내려 장식장에 바짝 붙어 안을 향하면 그 안에 담겨버린 제 그림자가 보였다. 아이는 그림자와 눈씨름을 하다 돌아서 유리창에 기댄 채로 주룩 주저앉았다. 다시 장식장 안은 비어버렸다.


똑똑.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로 딱 두 번 울리는 노크 소리에 대한 정답은 한 박자 후에 너무 경박하지도 너무 꾸민 것 같지도 않은 목소리로-


무슨 일인가요?”

-그렇게 답하는 것.

이동할 준비가 다 됐습니다.”


듣게 된 것이 비록 싫은 일이라도 감정을 드러내고 회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에이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당장 문을 열고 싶지는 않았다.


금방 준비를 마치고 나가죠.”


그렇게 말하곤 에이치는 일어서 옷장을 향하는 대신, 창문을 열어젖혔다. 웅얼거리듯 흘러들어오던 연주소리가 커졌다. 역시나 며칠 째 아래층의 악단이 연습하고 있는 곡이었다. 오늘은 바람이 안 부네. 조금 답답하려나. 아래로는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마부가 눈에 띄었다. 에이치는 바로 준비를 시작하지 않는 정도로는 잘못된 일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잠깐, 일을 미룬 것 뿐이다. 보통 그런 시간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다만 이번에는 그 큰 의미 없는 그 시간 끌기 덕에, 에이치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추락하고 있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저택엔 생각지 못했던 장점이 있었다. 아마 에이치는 근방의 누구보다도 먼저 그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처음 한순간은 빛무리가 만든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커지는 형체에 금방 무언가 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이내 지척을 지나갈 때가 되어서야 그것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이치는 그 순간 시간이 멈추었나 의심했다. 다음으로는 자신의 감각과 몸의 상태를 의심했다. 그것은 추락이라기엔 너무나도 느린 속도였다. 차라리 낙하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것의 등 뒤로 작은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쫓아 시선을 옮기다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이내 최대한 애를 써도 날개 끝자락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시 후 퉁, 거리감이 있는 것 치고는 꽤나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땅바닥으로 떨어진 건 아닌 모양이네. 들린 소리의 둔탁한 울림으로 그렇게 짐작해봄과 동시에 에이치는 바로 움직였다.


에이치는 언제고 스스로 운이 좋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혹자는 어린 나이에 비관적인 태도는 좋지 않다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에이치에게 그것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에이치는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조그마한 손발을 버둥대는 매 순간이 익숙했다. 손안에 남는 것이 지저분한 흔적뿐일지라도 아이는 언제고 반짝이는 모래를 그러쥐었다. 그런 에이치가 고집을 부려 모든 일정을 미뤄두고 자신의 앞에 그것을 가져다 놓은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거야?”


그렇노라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는 인부를 손짓으로 내보내고 에이치는 다시 천천히 제 앞에 놓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키는 자신과 엇비슷할까. 원래라면 단정하고 상당히 좋은 옷차림이었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여기저기 찢어져 어쩔 도리 없이 허름해 보이게 만들었다. 와중에도 그 자신만은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보라색 눈동자는 에이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온몸으로 털을 세운 짐승 마냥 경계하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조차 기품있다보이게 했다.


내게 바라는 게 뭐지?”

?”

뭘 바라고 날 여기로 데려온 거냐는 것이다. 내가 누군지 궁금한 것이냐. 그런 하잘 것 없는 호기심인가 아니면-.”

아니. 아니야. 네가 무엇인지는 알 바 아니야. 전혀 궁금하지 않아.”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는 목소리를 누르며 시선을 돌렸다. 방안을 탐색하는 눈짓을 같이 따라가다 보니 침대 머리 맡의 창을 지나 옷장을 스치고, 에이치 등 뒤의 방문을 잠시 응시하다 다시 서로에게 돌아왔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네녀석은 뭘 바라고 날 이곳에 데려온거지? 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난폭한 몸짓에 기분이 좋진 않으니 제대로 답을 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에이치는 그가 말을 이어가던 와중에 또 슬쩍 그 시선이 문을 향했다 돌아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 부족하네. 아쉬워.”

뭔가 말했나?”


반문에 답은 하지 않고, 에이치는 몸을 틀어 고개를 내밀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에이치의 손이 목적했던 날개에 닿기 전에 그가 먼저 몸을 빼내며 에이치의 손을 쳐냈다.


그래. 좋아. 앞으로 여기서 지내도록 해."


에이치가 악수를 건네며 하는 이야기는 제안보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슈는 한참을 가만히 그 손을 내려 보고만 있었다. 한숨과 함께였지만, 그래도 맞잡은 손에 에이치는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어느쪽으로 하겠어?”


물어보며 동시에 에이치의 손은 찻잎을 덜고 있었다. 슈는 그런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돌아보지 조차 않았다. 계속 등을 돌린 채 의자에 앉아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에이치 역시 슈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차를 우리는 일에 집중했다. 통과 수저를 내려놓고 익숙한 손길로 주전자의 손잡이에 헝겊을 얹은 뒤 한손으로 들어 찾잔 위에서 기울였다.


설탕?”

! 알고 있으면서 매번 태연스럽게 잘도 물어보는구나.”

하하. 이츠키군의 반응은 매번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난 이츠키군이 다즐링. 우유도 설탕도 필요없다.’고 말하는 걸 좋아하니까 말이야.”

. 안이하고, 또 꼴사나운 흉내구나. 전혀 닮지 않았다.”


두사람의 몸이 자란만큼 두사람 사이의 공기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단정하고 화려한 차림의 슈는 그 방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모습이 되어있었다. 슈는 책을 덮어두고 다가와 에이치가 우린 차를 입에 가져갔다. 그가 찻잔을 기울여 한모금을 들이키고 다시 잔을 내려놓는 과정을 에이치는 즐거운 표정으로 기다렸다.


, , . 그런 곪아 혓바닥 아래로 검을 물을 흘릴 것 같은 품성으로 이런 맛을 낸단 건 그 자체로 하나의 부조리로군.”

역시 이츠키군은 재밌는 말을 잘 하네.”

재밌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


. 주전자가 떨어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무릎을 꿇으며 서 있던 자리에 바로 주저 앉은 에이치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텐쇼인 네놈...”


두손으로 심장 부근을 꽉 부여잡고 버둥거려 간신히 벽에 기대는데 성공했다. 꼴사납네. 숨소리와 섞여 흘러나온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묻혀 스러질 것 같았다. 굳어있던 슈는 어색한 몸짓으로 다가와 몸을 낮추며 물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봐라. 불쾌하지만 특별히 들어주겠다는거다.”


쿨럭. 쿨럭. 계속 이어지는 기침에 입을 가린 한손은 떼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슈의 팔뚝을 붙들었다. 그대로 끌어내리는 손길에 응해 슈는 에이치의 앞에 돌아 앉았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으니 당황하지는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절묘히도 빛이 내리는 위치에 앉아 슈는 제 날개를 늘어뜨렸다. ‘순백이라 표현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깃 하나하나는 제 방향대로 쓸어 넘겨보았다. 빛을 받아 비늘과 같이 반짝이는 모습은 수없이 들여다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에이치는 생각만큼 부드럽지 않고 외려 까슬한 감촉도 즐겼다. 슈의 날개죽지에 단단히 붙은 날개 뿌리가 에이치의 손에 닿았다. 꾸욱 눌러보던 손을 떼며 입을 열었을 때 처음보다는 이미 기침소리가 많이 잦아들어 있었다.


역시 이츠키군은 괴물이구나.”


한 마디를 간신히 마치고 다시 쿨럭이는 기침소리가 한참을 이어졌다.


와중에도 불쾌한 소리는 잘도 하는구나.”

"후후. 그렇게 듣지마. 이래 보여도 이츠키군을 꽤나 좋아하고 있으니까. 아니 사랑하고 있단 쪽이 맞으려나?"

!”

. 생각했던 것보다 귀여운 반응인데?”

헛소리!”

일어나게 해줘.”


슈의 손을 붙들고 의지해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치는 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잡아끄는 손에 힘은 없었지만 슈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움직여주었다.


이츠키군. 거기. 그 앞에 서도록 해.”


에이치가 가리키는 것은 빈 장식장의 앞이었다. 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에이치의 지시에 따랐다.


펼쳐 봐.”

네놈...”

어서.”


뒤쪽에서 빛이 들어와 그림자가 슈의 표정을 지웠다. 그 모습에 에이치는 생각했다. 빛으로 그를 그 자리에 박제해 놓은 것 같다고.


여전한 악취미로구나, 텐쇼인.”


서린 목소리가 기억을 비집고 들어왔다.


. 그렇지.”

여긴 네놈의 방인가? 여전히 집착적으로 정리한 것 같으면서도 어수선한 것이 딱 네놈과 같은 꼴이구나.”

후후. 못 본 새에 이츠키군은 많이 수다스러워졌네.”

성격머리도 하나도 고치지 못한 모양이구나. 애석하게도.”


에이치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슈의 옆으로가 섰다. 한손으로 웃옷의 등 쪽을 끌어 올려 그대로 어깨를 짓눌렀다. 큿하고 흐리는 목소리는 무시했다. 등뼈의 옆길을 따라 더듬어 올라가 오른쪽 어깨죽지 언저리 우둘투둘하게 남은 흉터를 음미하듯 지분거렸다. 슈의 다리를 묶어둔 쩔그럭 거리는 소리 역시 무시한다.


미쳤군. 처음부터 그리고 언제나, 지금까지도 넌 정상이 아니야. ‘그 날이 올 것을 그 때도 진작 짐작하고 있었다. 몇 년을 방에 가둬 나가게 하지 않고 나를 길들이려 했지. 내 날개를 바라보던 번들거리던 눈빛을 모를래야 모를 수 있었겠느냐. 네놈은, 역시나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랄 뿐이겠지."

하하.”


에이치는 이를 악문 슈의 목소리만은 무시하지 않았다.


"너만 할까. 이츠키군은 괴물이잖아."


에이치는 생각했다. 기억이라는 녀석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사교 모임의 화젯거리라면 무엇이 되었건 파악은 해두어야 한다. 때문에 별달리 흥미도 없건만 향하게 된 인형사의 천막이었다. <valkyrie> 에이치는 천막의 입구에 걸린 바랜 황동의 팻말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작고 허름한 천막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이름이네. 살짝 머리를 숙이고 입구를 지나 텐쇼인이라는 이름을 대고 자리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무대와 객석이 모두 한눈에 보이는 자리. 그러면서도 무대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라고는 하나 최근 주목받는 극 답게 만석이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관객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이 무대를 하는 것 마냥 잔뜩 긴장하고 있단 것 정도였다.


인형놀이라...”


상당히 많은 돈을 지불한 만큼 좋은 의자였다. 극의 시작을 기다리며 의자 깊숙이 몸을 뉘이고 어쩌다 귀족들 사이에 이런 취미가 유행할 수 있었을까 고민해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의 정중앙에 나온 인형사의 선언을 시작으로 극은 시작되었다.


오늘의 너희는 과연 얼마나 이 나의 무대를, <valkyrie>의 인형들을 따라올 수 있을지 기대하지. , 기다리던 인형극의 시작이다.”


아마도 극을 진행하는 것은 단 세사람. 한명은 위에서 인형을 움직이며 전체적인 극을 실시간으로 조율하고 있었다. 또 한명은 무대 옆에 서서 노래로 마치 생명을 불어넣는 듯 했다. 마지막으로 그 사이에서 마치 톱니와 같이 모든게 맞물리도록 극을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에이치는 의외로 훌륭한 무대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클라이막스 즈음이었다.


날개달린 인간-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그것을 에이치는 너무 쉽게 또 완전히 기억 저편에 넘겨두고 잊고 있었다.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두 잊고 있었다. 심지어 어떻게 헤어졌는가는 다시 떠오르지 조차 않았다. 더 이상 빛나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관심에서 밀려났을 때, 그것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기억은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또 너무 간단히 돌아왔다. 인형들을 조종하는 실을 따라 시선을 올려 본 그 끝에 그가 있었다. 클라이막스를 연기하는 슈를 보며 에이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위해 의자의 팔을 꽉 붙들었다. 특별함은, 반짝임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별은 그 파편마저 반짝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와 악수를 나누며 맞잡았던 손이었다. 곧이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 이츠키 슈. 그리고 에이치가 떠올린 것은 그날의 기억이었다.


풀어라. 텐쇼인. 텐쇼인 에이치! 에이치는 바닥에 엎드려 발버둥 치는 슈를 내려보며 미리 묶어 둔 것이 정답이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하고 풀어줄 생각이었다면 묶지 않았겠지?”


네놈. 대체. 텐쇼인. 계속되는 슈의 고함소리에 에이치는 잠시 입도 막아두는 쪽이 더 확실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가볍게 반성하곤 슈의 허리에 올라타 몸으로 무게를 실어 움직임을 눌렀다. 오른손을 좀 더 꽉 쥐었다. ‘이런용도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 날은 상당히 잘 서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왼손으로 날개 뿌리를 잡으니 파들파들거리는 것이 전해져왔다. 나는 여기에 있구나. 그것은 좋은감각이었다. 우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아이의 힘으로 그것을 쟁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손을 오르내렸다. 단정한 결과도 아니었다. 손부터 시작해 방과 여러 물건, 그리고 아마도 제 얼굴에 까지 난잡하게 튀었을 피는 무시했다. 꺼져가는 목소리 역시 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인지, 신음을 흘리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무시했다. 양손으로 쟁취해낸 것을 소중히 쥐고 일어서 장식장 앞에 섰다. 창에서 빛이 바로 들어오는 위치에서 유리 앞에다 날개를 펼쳤다. 에이치는 그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그 풍경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에이치는 슈를 돌아보며 말했다.


고마워.”


아이는 티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명이 꺼진다. 막을 내린다. 커튼콜은 없었다. 이제 그를 향해 박수를 쳐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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