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러브라이브!2016. 12. 12. 01:15

왜 울고 있는 거야, 마키쨩?

한숨을 내쉰다.
가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어.

문이 닫혔다. 마키는 혼자 울고 있었다. 소매로 눈물을 훔쳐보지만 금세 다시 넘쳐버려 아무 소용 없었다. 눈만 붉게 달아올라 연한 살이 쓰리고 매워질 뿐이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려 앉아서는 손에 잡히는 원피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하지만 해결할 방법은커녕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삐- 삐- 작게 귀에 맴도는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작은 몸에 본인은 무엇인지도 몰랐던 것이 숨을 쉬기가 벅찰 정도로 들어찼다. 숨을 몰아쉬면서 점점 커지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몸을 있는 대로 움츠리고, 호흡을 잊어 간간이 터져 나오는 숨을 격하게 몰아쉰다. 금방이라도 그렇게 무언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삐- 귀에 아른거리던 소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마키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떠나지 않고 귀를 파고들었다. 감고 있던 눈꺼풀을 더 강하게 꾸욱 눌렀다. 한계다.

삐--.

마키는 눈을 떴다. 울어대는 핸드폰을 열어 기계적으로 알람을 껐다. 다시 감기려는 눈을 힘겹게 떠서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10시를 조금 넘겨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알람은 꽤 오래 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체를 일으킨다. 좁은 커튼 사이로는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아직 불을 켜지 않은 방을 조금이나마 밝히고 있었다. 마키는 가만히 눈을 깜박깜박 천천히 감았다 떠 보았다. 다시 눕고 싶다. 실제로 그녀의 어깨는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이른 시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주말인데 조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며 마키는 자신 안에서 들리는 유혹의 소리에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은 저항해보지만, 그 결과가 매번 패배였음을 마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내려가던 어깨가 베개에 닿았을 때, 진동이 울렸다. 짧게 울리고 끝나는 것을 보아하니 문자가 온 모양이었다.

귀찮아. 싫은데….

아예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묻어버리고 애써 외면하고 있자니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한번은 무시했지만 두 번째에 또 곧장 이어 울리는 세 번째 진동음에 이르러서는 마키도 별수 없이 슬렁슬렁 뒤집혀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이름에 그제야 잠이 깼다.



마키는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면서 문이 닫히기 직전에 다시 벌컥 열어젖혔다. 급하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만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손에 휴대전화가 들려있었다. 현관 앞에 멈춰 서서 빠르게 손가락으로 패드 위를 움직여 문자 하나를 보내두었다.

<지금 나가>

이제 막 보낸 문자를 받을 상대도, 아침부터 마키의 잠을 깨운 문자의 주인도 우미였다. 세 번에 나눠 온 장문의 메세지였지만 요약하자면 오늘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시작한 문자는 거듭 사과를 반복했다.

<이렇게 당일이 되어서 급한 연락을 받게 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라며 끝을 맺는 것을 보니, 마키는 딱딱한 우미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져 혼자 한참을 웃고 나서야 답장을 위해 휴대전화를 집어 들 수 있었다. 여러 마디를 썼다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하더니 겨우 보낸 답장은 한마디뿐이었다.

<지금 준비하고 나갈게>

그렇게 집을 나서 마키는 우미와 만나기로 한 카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꿈, 기분 나빴던 것 같은데. 멍하니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문득 생각이 났다. 일어나자마자는 아른거리며 남아있었던 꿈은 그사이 휘발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는 꿈이었다’라며 깨어서 생각했던 것만 남아있어 찝찝한 느낌이었다. 걸음도 멈추어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퍼뜩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왜 울고 있는 거야, 마키쨩?’

목소리를 따라 꿈의 끝자락이 끌려 나왔다. 마키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생각했다. 한숨. 왜 울고 있었지? 닫힌 문. 그리고 따라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은 방안에서 침대 위에 앉아, 손으로 까슬 거리는 레이스 자락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언제였더라. 생각하고 있자니 카페 간판이 눈에 띄었다. 어느새 목적지였다.




먼저 카페에 와 있던 우미는 웃으며 마키를 반겼다.

“이번 곡도 느낌이 좋던데요? 요즘 컨디션이 좋은가 봐요, 마키.”
“별로.”
“그런가요.”

둘이서만 만나는 것만 해도 벌써 수차례. 우미는 하하 웃으며 능숙하게 마키의 퉁명스런 말을 받아넘겼다.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던 마키가 슬쩍 다시 우미 쪽으로 시선을 향하니, 우미는 눈을 마주치곤 슬쩍 웃어 보였다. 얼굴이 달아올라 버렸다. 마키는 시선을 돌려버리며 괜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서 가사는?”
“아, 아! 그렇죠. 여기 있습니다.”

마키의 서투른 말 돌리기에도 우미는 그녀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주었다. 우미가 가방에서 꺼내 드는 투명한 파일은 마키가 몇 주 전 그녀에게 건넨 것이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음표마다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 쓴 가사가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을 닮아 그녀의 고지식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글씨는 지웠다 다시 쓴 흔적 하나 없이 정갈했다. 가장 앞 페이지부터 가사를 읽어나가는 마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 음이 따라붙어 노래가 되어 울렸다. 마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며 가사에 집중했고 우미는 그 건너에서 그녀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끝까지 가사를 따라간 후에야 마키는 손에 들고 있던 악보를 내려놓았다.

“괜찮은가요?”
“좋은데? 생각했던 그대로 가사가 된 것 같아. 역시 우미…. 대단하네.”
“최고의 칭찬이네요.”

가볍게 받는 우미였지만 마키의 이야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처음 우미가 그녀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주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매번 신기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따로 언질을 주거나 그녀의 생각을 전달한 것도 아닌데, 우미의 가사는 언제나 마키가 곡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을 그대로 글로 옮기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
“왜 그러시죠?”

묻혀있던 기억은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하니 한꺼번에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다. 어린 시절에 가끔씩 아무도 왜인지 알지 못해 답답해하는, 펑펑 울어버리는 날들이 있었다. 그 날도 같았다. 마키는 연주를 위해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그리고 연주 도중에 마키는 참을 수 없이 슬퍼졌다. 건반을 누르는 것이 힘들었고 어서 그 자리를 내려오고 싶었다. 자신이 만들어 제 귀로 돌아오는 소리가 가슴에 응어리져 스스로를 꾸욱 짖눌러 왔다. 간신히 끝낸 연주회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무대를 내려가 가장 먼저 가까이 다가오는 부모님께 매달려 울어버리고 싶었다. 진심을 담아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슬픔은 그대로 두려움이 되었다. 그 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두려움은 주변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키…?”

마키가 혼자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미안 오늘 할 일은 이걸로 끝인가?”
“네. 일단은….”
“그럼 가봐야겠네.”
“네. 그렇죠.”
“저기, 우미.”
“뭔가 할 말이 있으신가요?”

우미는 가만히 마키를 응시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마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둘 사이의 침묵 뒤에 마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아니야. 나 잠깐 있다 갈게. 먼저 가. 잘가!”

몰아치듯 마구 인사를 건네는 마키에게 떠밀려 한두마디 더 인사를 나눈 뒤 우미가 먼저 카페를 나섰다. 천천히 자리로 돌아와 마키 혼자 남은 자리에 한숨이 내려앉았다. 마키는 이야기를 나누며 늘어놓았던 악보를 하나하나 순서대로 모아 쥐었다, 그러다 힘이 풀린 손에서 악보들이 빠져나가 처음보다 더 엉망으로 흐트러져버렸다. 마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숙여 그 위에 슬그머니 엎드렸다. 악보 위에서 사랑을 하고, 선율을 따라 키스를 하고, 노랫말을 곱씹으며 홀로 이별한다. 그리고 다시 악보 위에서 사랑을 시작했다. 마키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우미가 나선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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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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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5. 00:43

"잠깐만. 잠깐잠깐. 이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저기, 코사카씨?"

"그러니까, 레이나."


몸을 바짝 붙여오는 레이나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힘을 줘 밀어 보았지만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라고 했잖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만 슬쩍 올려보며 말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린다. 지금 뒤를 넘겨보면 꼬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래서, 정말로 곤란해?"


그렇게 똑바로 보는 건 반칙이야. 시선을 쭉 빼 달아나 보았다. 그러다 슬쩍 곁눈질로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도 레이나는 여전히 그대로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건 애초에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얇은 이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열이 올랐다. 시야는 금방금방 뒤집혔다. 누구의 목소리였지, 방금? 부드럽구나, 레이나는--

--눈을 깜박였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곤란해? 정말로?- 문자가 되어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로부터 얼굴이, 장면이 끌려 나왔다. 퍼뜩 일어나 급히 좌우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익숙한 구조에 익숙한 물건들. 익숙한 내 방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꿈인가.


"아... 저질러버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면 좋을 텐데. 그만그만그만. 어차피 꿈이잖아. 생각을 멈추면 금방 잊어버릴 거야!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멋대로 똑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뿌옇던 기억은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점점 선명해졌다. 곤란해? 그만. 정말로? 그만. 레이나는-


"일어났으면 빨리 준비하지~?"

"-그만!"


양쪽 팔을 번쩍 든 채로 굳어버렸다. 먼저 다시 입을 열기도 난감한 상황에 방 안이 너무 심하게 조용했다. 차라리 웃어 주시죠. 뭐라고 말이라도 하던가.


"뭐해, 너?"


그렇게 아침부터 언니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



햇살이 강하다.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걷자니 금새 얼굴이 달아 올랐다. 머리 위로 두 손을 모아 가려보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다리는 계속 움직이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맞기나 한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빙빙 도는 것 같은 기분으로 그냥 일단은 걷고 있었다. 매미소리가 멀게 들렸다. 주변 소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길이 힘겹게 느껴졌다. 학교에 가고 있었지, 나.  욥. 쿠미코. 주저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얼 해야겠다, 내지는 무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다리를 들어다 앞으로 놓는다. 덥다. 와중에도 머릿속에는-곤란해, 쿠미코?- 그만! 들어가! 쿠미코 표정이 이상해. 아 정말이지 길에서 생각나도 괜찮은 게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그러니까… 레이나는 부드러웠던가. 아니. 아니아니아니. 아. 이러다 죽어버릴지도. 이대로 집에 가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꿈도 그런데 레이-


"꿈?"


뭔가 눈 앞에 불쑥 나타나 뒷걸음질 치고 보니 하즈키가 서있었다. 아니 잠깐.


"있었어, 하즈키? 아, 아니 그보다 나 입 밖으로 말하고 있었어?"

"몰랐던 거냐."


하즈키는 뚱하게 얼굴을 찌푸리더니 금새 표정을 바꾸며 물어왔다.


"아, 맞아. 꿈은 무슨 얘기였던 거야?"


이건…조금 위험할지도.


"아니, 아,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러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오오 쿠미코 딱딱해졌어."


눈을 피해본다. 그러니까, 어떻게, 아, 그래. 도망갈까?


"어, 쿠미코 지금 그렇게 뛰면-"


그렇다. 현기증이 난다.



***



"쿠미코 말이야. 엄청 이상했다고?"


네, 네. 미도리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하즈키의 목소리는 한쪽으로 흘러나가 버렸다. 책상에 한쪽 귀를 대고 엎드려 있는데도 두 사람은 내 자리 옆을 떠나지 않았다. 선풍기가 목이 돌아가며 터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잠시 동안 물러나는 더위는 두어 걸음 뒤에서 눈치를 보다 금새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미도리! 저번에 봤던 그 가게 열었던 것 같던데?"

"정말인가요?"


고개를 들었다 반대쪽으로 돌려 다시 책상에 기댄다. 타이밍 좋게 바람이 뒷머리를 살짝 흔들어 놓더니 그대로 멀어졌다. 정말이지 더운 날이다. 창틀 위로 하늘이 보였다. 눈만 깜빡, 깜빡 감았다 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첫 수업이 뭐더라.


"맞아 쿠미코 말이야, 그 뭐더라 꿈? 얘길 하더니 막 갑자기 달리기도 하고."

"꿈이요?"


--곤란해 쿠미코?


"응. 꿈이라고 했어."


부드럽구나, 레이나는--


"아아아! 그만! 그만! 레이나는 이제 됐잖아, 레이나는!"

"내가 왜?"


위에서 레이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으왁!"


정확히는 어느샌가 책상 앞쪽에 서서는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 반응이 그게 뭐야?"

"레, 레레레이나가 여기 왜 있어?"


레이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하게도,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맥락도 없이 꿈 속의 레이나가 지었던 표정이 떠올라버렸다. 여우일까 싶었던 그 미소와 눈 앞의 모습이 겹쳐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쿠미코, 어디 아파?"


아니. 그건 아닌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천장으로, 창 밖으로 시선을 피하려는데 레이나는 용납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양쪽 볼을 붙잡고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눈동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좋아. 그건 됐어. 그보다 쿠미코, 키스를 하자."

"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그러니까... 레이나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뭐라고? 음. 그러니까 일단 뭐라고 한 건지 레이나한테 다시 물어봐야겠지?


"므아므므."


다가온다? 다가옵니다? 다가오는 건가. 다가오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그러니까 뭐가, 무슨, 아니 그니까 레이나가, 다가온다. 아니, 레이나? 눈이, 에. 입술. 에- 아까 레이나가 뭐라고 했지?

--키스를 하자.

키스?


"에? 에에에? 에?!"


흠. 흠흠.

아무래도 수업이 한창이었던 것 같다. 꽤 큰소리를 내버린 모양이다. 선생님은 정확히 내 방향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린 채로 헛기침을 하고 계셨다. 지금 무슨 시간? 그러니까 방금 뭐지? '사실은 꿈이었습니다.'라니. 요즘은 싸구려 소설에서도 안쓸거야, 그런거. 걱정스럽게 돌아보는 미도리와 눈이 마주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줬다. 정말 무슨 일인 걸까 오늘은. 아침부터 말이야. 뒤에서 쿡쿡거리는 하즈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 덥다.



***



수업은 계속 진행됐다. 집중이 될 리가. 책 한 귀퉁이에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동그라미를 한참 그리다 무슨 짓인가 싶어져 지우개를 들었다. 막상 지우자니 거기 들어가는 힘도 아까워 슬쩍 내려놓고 그냥 다시 샤프를 집었다. 시대상과… 작품은… 꿈… 그러네 꿈. 하즈키랑 미도리는 슬슬 잊어버렸겠지. 아니 거기도 꿈이었을까? 레이나는… 응, 그치. 이따 레이나는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한 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트 한쪽 구석에 ‘레이나’가 쓰여 있었다. 곧장 지우개를 들어 최대한 자국이 남지 않도록 지웠다. 덥다. 조금 어지럽고, 졸릴지도. 정확히는 눈이 무거워.


"쿠미코, 일어나."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레이나?"


아. 그런가. 나 자고 있었구나.


"깨워줘서 고마워."

"일어났어? 잠은 깬 거야?"

"응. 덕분에."

"좋아. 그럼."


저기. 레이나씨 조금 가까운 것 같은--

--또, 인가.


"쿠미코, 오늘 피곤했나요? 날이 많이 덥긴 하지만…."

"그렇네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책상에 다시 엎드리려다 하즈키에게 손목이 붙들려 억지로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졌다. 그리곤 뒤에서 등을 미는 통에 그대로 떠밀려 다리가 움직였다.


"자자. 그만 부실에 가자고."



***



“그치? 오늘 이상하지?”

“아무래도 그렇죠?”


다 들리는데요…. 부실로 향하는 길에 날 앞세워 놓고 하즈키와 미도리는 조금 뒤에서 수군거리며 뒤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해주고 배려 해주는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지. -하하하. 별일 없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친구들아! 사실 그냥 오늘 조금 이상한 꿈을 꿔서 잠자리가 안 좋았나봐!-정도로 이야기하고 정리하면 서로 좋을 일일텐데. 전혀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덕분에 그냥 못들은 척 부실을 향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더위 때문일까? 한풀 꺾일 시간이 되었는데도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으엑.”


부실 문을 열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이거 이거. 여기도 만만치 않은데요.”


뒤이어 들어오며 중얼거리는 미도리의 말마따나 부실도 꽤나 후끈거리는 것이 복도나 교실 이상인 것 같기도 했다. 부실의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 표정들이었다. 그래보아야 금방 부실에 들이닥쳐 언제나와 같은 상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타키 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연습이 시작됐다.


레이나와 눈이 마주칠 뻔 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던 전날의 일은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약속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말할 기분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조금도 들지 않았다. 둘 만 기억하는 조각이라는 건- 아차차차. 방금거 꽤 큰 실수였는데. 슬쩍 보인 아스카 선배의 눈초리가 무서워 황급히 시선을 악보에 좀 더 가까이 모았다. 당황해서 마우스피스에서 입을 떼버릴 뻔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귀 뒤를 타고 목덜미를 따라 땀이 흐르는 자국이 느껴졌다. 어지러워. 귀에 닿는 소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흐리멍덩해 지는 기분. 악보의 음표들이 멋대로 둥둥 떠다닌다. 삐-------------- 긴 이탈음 끝에 저편에서 레이나가 벌떡 일어섰다. 다짜고짜 내 자리 쪽으로 사람들 자리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가까워져서는-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할까. 욕구불만인가 나는? 연습 중에 가볍게 잠깐 의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봐야 30초가 될까 말까 한 남짓이었던 것 같지만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기엔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미코 몸이 안좋으면 무리하지 않는게 좋아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미도리 외에도 다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날 둘러싸고 있느라 연습도 중단하고 웅성거리기를 한참. 결국은 부활동 자체가 중단됐다. 타키 선생님도 이 날씨에 나 같은 사례가 나온 이상 이대로 연습을 계속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고, 그대로 일단은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하즈키와 미도리의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을 힘겹게 만류하고 선약이 있던 두 사람의 등을 떠밀어 보낸 뒤에 느긋하게 하교를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하아.”


교문까지 내려와서야 뭔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가방을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아무래도 악보를 부실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돌아갈까, 그냥 가버릴까. 혼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차라리 평소 같았다면 눈을 꼭 감고 그냥 교문 밖으로 나가 버릴 텐데 오늘 연습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은 방향을 돌렸다.


“안 되는 날이라는 거 있는 모양이네 아무래도.”


부실에는 레이나가 혼자 있었다. 레이나? 또 그건가?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 정도로 원 패턴이면 질려버린다고.


“쿠미코? 왜 돌아 온거야? 아. 몸은 좀 괜찮아?”


정말 오늘은 무슨 날인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대체, 그러니까 아침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수업 중간에. 또 부실에서. 그리고 또인거야? 아. 그래. 정말 차라리 확 해버리기라도 했으면 몰라. 이거 억울하네.


“쿠미코?”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꿈을 한 낮에 네 번이나 겪지. 생각할수록 화나네. 어차피 꿈이면 그냥 기회 있을 때, 해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러게. 그렇네. 그러면 되는 거겠네.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일단 어깨를 붙잡았다. 도망가면 곤란해. 그럼 또 깨버리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지?


“쿠미코? 쿠미코 잠깐만. 너 지금 좀 이상해.”


역시 오늘은 더운 날이다. 누가 학교를 끓이고 있는 게 아닐까? 뇌까지 끓어버릴 것 같아.


“쿠미코!”


머리가 조금 울려. 아무래도 좋다. 어깨를 조금 내렸다. 무릎을 조금 구부렸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깨지 않아?

레이나의 어깨를 놓아주고 두 손을 들었다.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잠깐. 잠깐잠깐잠깐.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이 봤다면 별다를 건 없었겠지만.


정말이지 전부 더위 탓이다. 레이나도, 나도 얼굴이 붉어져 버린 것도 전부 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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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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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라이브!2016. 5. 21. 23:31

그림자에 대하여

 

노조미의 자리는 창가 바로 옆이었다. 코트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 놓고 자리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정면으로 보이는 시계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여섯 시, 그리고 분침은 삐걱대며 숫자 9를 향해가고 있었다. 교실 시계가 평소 3분 정도가 빨랐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노조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을 만하네.

이유 없이 조금 일찍 눈이 떠지는 날, 어쩐지 준비도 평소보다 일찍 끝나버리는 그런 날이 있다. 바로 오늘이 노조미에게는 그렇게 하루가 조금 일찍 시작되어버린 날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현관에 서 있으니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괜히 마음이 동해 그대로 일찍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당연하게도 평소보다는 훨씬 이른 시각. 교실에 노조미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다. 그렇게 혼자 창문 바로 옆에 앉아있자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창 너머로 향했다. 이른 시각에도 학생들은 한 명씩 띄엄띄엄 교문을 지나고 있었다. 교문 언저리에서 맴돌며 지나는 한명 한명을 세어 보더니 돌아온 시선은 그녀의 앞자리 책상을 향했다. 책상 위에 엎드리더니 슬쩍 눈동자만 시계를 올려보았다. 똑딱거리는 초침에 맞추어 손가락을 까딱이며 수를 세어본다. 하나. . . . 스물도 되지 않아 노조미는 다시 일어나며 오른손으로 턱을 괬다. 나 너무 참을성이 없는 건 아닐까. 자연스럽게 다시 창밖을 향해 돌아가는 자신의 고개에, 노조미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혼자서 등교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지만, 두셋씩 짝을 지어 교문을 넘는 이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와중에 이쪽저쪽을 오가는 노조미의 시선은 명백히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보아도 찾는 이가 보이지 않자 이내 다시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노조미는 그대로 지나가려던 시선을 다시 돌려 자신의 오른손을 향했다. 정확히는 책상 위, 오른손의 새끼손가락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미는 것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그것은 마치 노조미의 시선을 느낀 양 살랑거리며 슬쩍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노조미는 가만히 내려보더니 그것이 손목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가볍게 두어 번 손을 털었다. 가볍게 흩어지며 날아간 그것은 형체도, 무게도, 경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거기에 존재했다. 그것을 노조미는 그림자라 불렀다.

기억을 천천히 감아 올라간다. 뮤즈와 만난 날의 기억. 오토노키자카로 전학을 온 날의 기억.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어린 날에 내려보았던 발의 끝.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기 위해 발돋움을 했을 때.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은 어느 순간 뚝 끊어진다. 그 끝자락에도 그림자는 노조미의 곁에 있었다. 작은 손을 쥐락펴락할 때 그 위에서 그림자는 천천히 모여들었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살짝 서늘한 기분에 노조미는 그것을 퍽 재미있다 여겼다. 어린 노조미에게 그림자는 작은 친구와 다를 바 없었다

언제부터 그것을 그림자라 불렀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은 그림자로서 언제나 노조미의 옆에 존재했다. 오히려 언제부터 그것이 ‘보통의 그림자’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는가를 고민해본다. 아마 무언가 잘못되었다 느끼기 시작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림자를 가리키면 모두 같은 표정을 보였다. 초등학교의 담임선생님도, 부모님도, 친구들도.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의아해하던 그 표정은 이내 하나같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으응.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 표정이 두려워 노조미는 그 이상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해 보지 못했다. 그렇게 부정하고, 조금만 가만히 버티고 서있으면 금세 노조미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지고, 다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림자는 그렇게 혼자 멈추어 선 노조미를 천천히 감아 올라갔다.

‘그림자가 아니라면, 그럼 이건 뭐지?

그때 노조미는 처음으로 제 팔을 기어오르는 서늘한 감각이, 그림자가 무섭다고 느꼈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털어냈던 그림자가 다시 슬금슬금 노조미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씩 움직이다 노조미의 시선이 향하자 뚝 멈추어 선 것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쿡쿡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어?"

반가운 목소리에 돌아보니 에리가 몸을 기대오고 있었다.

"에릿치! 언제 왔나?"

"방금?"

에리의 대답을 들으며 곁눈질로 돌아보았을 때 그림자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래서-"

에리는 슬쩍 노조미의 어깨 너머로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거야?"

당연하게도 에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가 이쪽저쪽을 탐색하더니 에리는 퍼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에리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노조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혹시…. 그게 있는거야?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떠오른 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아니레이. 기냥 에릿치를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나서 말이여."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야기했을 때, 에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예상한 대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에리를 향해 노조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럼 우선 차례대로 자기소개라도 해볼까?

최악이다. 오늘 하루만 노조미가 같은 생각을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다만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의 다음에는 더 최악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 돌아왔다.

첫 등굣길이었다. 처음 가는 길은 아니었지만 낯설어 조금 헤매 버렸다. 덕분에 교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남은 자리는 가장 뒷자리 딱 하나뿐이었다. 남아있는 자리에 앉기 위해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낼 때 스스로에게 쏠린 시선에 노조미는 생각했다. 최악이다. 두 번째 최악도 금방 찾아왔다. 소름 끼치게 익숙한 서늘한 감각에 노조미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한동안 근처로 다가오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을 터였다. 왜 하필 오늘이지. 보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느끼지 말자.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최악의 상황으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하는 자기소개가 주어졌다.

와중에 등 뒤로 느껴지는 감각은 아래쪽에서 점점 위로 올라왔다.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노조미는 더 강하게 되뇌었다. 보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반응하지 말자. 혼자 다른 세계로 점점 가라앉는 듯한 느낌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다. 머리 위를 넘어 눈앞으로 그림자의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차례가 돌아와 노조미의 앞사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된 건가. 어떡하지. 지금 혹시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노조미는 혼자 생각에 잠겨 드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야세 에리라고 합니다.

순간 노조미는 앞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 흔들리지 않아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야 노조미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올려 본 시선 끝에 눈썹을 찌푸린 금발의 ‘아야세 에리’가 보였다. 그것이 노조미가 본 에리의 첫 모습이었다.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에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노조미는 한 몸에 온 교실의 시선을 받아버렸다. 하지만 그 시선들 가운데 에리와 눈이 마주쳐, 그 상황은 노조미에게 최악이 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에리는 교실에서 나가 버렸다. 내내 그녀를 신경 쓰고 있던 노조미는 당연히 에리가 문을 나서는 뒷모습 또한 보고 있었지만, 곧장 따라나서진 못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따라가야 해’가 맞았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떠오른 ‘왜?’는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누구의 것이었는지 모를 기억 속의 차게 가라앉은 눈도 스믈스믈 기어 나와 노조미를 붙잡았다. 그런 노조미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하지만’이었다.

결심하자마자 복도에 나와 좌우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에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노조미는 먼 곳에서부터 다시 모여드는 그림자를 느꼈다. 복도에 서 있는 몇몇이 이야기하는 와중에 들린 에리의 이름에 일단 무작정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섯 걸음 정도 뒤일까. 모여든 그림자는 노조미를 따라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다만 걸음은 조금 빨라졌다. 복도의 끝자락에 와서는 이미 거의 뛰는 것에 가까웠다. 그림자와의 거리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계단을 거의 날 것 마냥 뛰어 내려가다 우뚝 멈추었다. 노조미의 등 바로 뒤까지 뻗어 온 그림자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뛰어 내려온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노조미는 에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저기!

“넌 누구야?

에리가 돌아보는 시선과 함께 노조미의 등 뒤로 몰려오던 그림자는 일순간에 흩어졌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분명하게 노조미는 에리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나…”

노조미는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어버렸다.

“내는 토죠 노조미!

***

 

“노조미!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에리의 표정에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가 뒤따를 것이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조금은 그녀를 경험하게 된 노조미는 달랐다.

“나, 파르페란 걸 먹어보고 싶어.

덕분에 노조미는 이어지는 이야기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에리는 의아할 정도로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이런 상황은 노조미에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해보지 못한 일들을 노조미이기에 넌지시 청해오는 것이 그녀로서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여가 괜찮다카더라.

귀갓길에는 이미 노조미가 두 사람의 목적지를 정해두었다. 의외로 이런 부분에 서툰 에리 탓에 대부분의 준비는 노조미의 몫이었다. 노조미가 핸드폰 화면을 내밀며 이야기하면, 에리는 감탄하며 그녀를 따랐다. 그런 식으로 몇 번씩이나 둘이서 처음 찾는 길을 지났다. 그 좁은 골목길도 그중 하나였다.

두 사람이 지나기에는 길이 좁아 에리가 앞서가고 노조미가 그 바로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노조미의 발걸음이 늦어졌다.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노조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왜 지금’이었다. 지금까지는 에리와 함께 있으면 괜찮았을 터였다. 느려지던 걸음은 아예 멈춰버렸다.

“노조미?

돌아보는 에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노조미는 자신의 시선이 그녀를 지나쳐 그 뒤를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에리의 등 뒤로 그림자가 밀려오고 있었다. 크다. 한번 옮겨간 시선은 거기에 박혀버렸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림자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단지 가까워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노조미로서는 그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왜 그래? 괜찮아?

바로 뒤. 뒷걸음질 칠 수 없었다. 에리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노조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는 위에서부터 천천히 에리를 삼켜 들어갔다.

“괜찮은 거야?

이미 그림자가 에리의 얼굴의 반을 삼켜 노조미는 그녀의 입이 움직이는 모양만 볼 수 있었다. 에리가 무언가 말했다. 귀로 들리는 목소리와 입이 움직이는 모양, 모두 듣고 또 보고 있지만, 그 뜻이 머릿속에 들어 오지 않았다.

‘나 지금 제대로 웃고 있나?

목을 지나쳐, 가슴께, 허리, 에리의 온 몸이 그림자 안에 갇혔다. 노조미는 그 순간, 그 장소에 혼자였다.

“노조미!

그림자 안에서 뻗어 나온 손이 굳어 있던 노조미의 팔을 낚아챘다.

“듣고 있어? 나는 어두운 걸 싫어해.

에리의 손이 나온 곳을 중심으로, 그림자가 걷혔다.

“아니, 사실 무서워해. 나한텐 이게 아무한테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치만.

에리 자신도 당황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노조미에겐 분명히 전해지고 있었다. 노조미는 제 팔의 떨림이 멎는 것으로, 스스로가 떨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림자는 모두 걷혔다. 노조미는 에리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노조미는 머지않아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에리에게 웃어줄 수 있었다.

 

 

 

 

16.5.21. 어나더스테이지

Present by hon_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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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an_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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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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