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러브라이브!2016. 12. 23. 17:35

. 삑삑삑삑. 익숙한 박자로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는 역시나 언제나처럼 중간에 한 번 멈췄다. 삑삑. 아직도 못 외웠나. 니코가 속으로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뒤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에리의 언제나와 같은 '다녀왔습니다'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보던 인터넷 창을 껐고 잠시 마우스가 멈추는가 싶었지만, 이내 니코는 돌아보지 않고 다시 새 인터넷 창을 열었다. 팬페이지 링크와 동영상 사이트 링크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마우스는 선택을 마치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온 에리의 목소리에 붙잡혀버렸다.


"다녀왔습니다."


니코는 돌아보지 않고 폴더를 열어 자료함을 뒤적이며 답했다.


"왔어?"

"오늘 춥더라."

"."


대화 사이 잠깐의 공백은 코트를 벗어 걸어놓는 소리와 딸각 이는 마우스 소리로 채워졌다.


"이제 좀 있으면 코트로 안 되겠어."

"."

"! 오늘 갔던 카페 괜찮더라. 다음엔 같이 가자."

"그래."

"노조미가 안부 전해달래."


인터넷 창을 끄고 바탕화면에서 방황하던 마우스는 다시 인터넷 아이콘을 향했다.


"그래."


건조하게 이어지는 대답에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에리는 니코의 옆으로 서서는 책상 위에 비닐봉지를 올려두며 말했다.


". 하겐다즈."

"니코가 엄청엄~청 기다린 거 알지?"


니코가 그제야 돌아보자 에리의 얼굴엔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활짝 웃던 니코도 순간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뭔데 그 표정은?"

"아니. 진지하게 귀엽다고 느껴져서 나 괜찮은 걸까 싶어서."


곧장 주먹이 에리를 향해 날아왔다. 힘껏 쥐고 힘껏 휘두른 주먹은 제대로 들어가 꽂혔다. 아야야. 에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니코가 친 팔을 문질렀다. 그러다 또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 노조미도 보고 싶다고 했고."

"……. 아니다. 니코는 너희같이 이상한 애들이랑 달라서."


니코는 더 할 말이 없다고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자르고 다시 의자를 돌려 컴퓨터를 향하려 했다. 그런 니코의 팔을 붙잡고 다시 돌려놓으며 에리는 곧장 니코에게 입을 맞췄다. 가볍게 니코를 헤집어 놓고 떨어지며 에리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러면 나는 노조미랑 간접 키스한 셈인가?"


곧장 명치를 향해 뻗어오는 주먹을 에리는 반사적으로 붙잡았다이내 바로 놓아주며 항복의 표시 마냥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해. 심술이 심했어."

"멍청이가."

"정말 미안해."


니코는 대답 없이 홱 의자를 돌려 다시 모니터를 향했다. 니코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 미안."


그런 니코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더니 에리는 말 한마디만 남겨두고 방을 나갔다. 에리가 나가고 나서야 니코는 에리가 책상 위에 올리고 나간 비닐봉지를 뒤적여 아이스크림의 뚜껑을 화풀이 대상인 양 뜯어냈다. 그리고 니코는 작은 플라스틱 수저를 입에 물곤 중얼거렸다.


"말차맛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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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글/러브라이브!2016. 12. 12. 01:15

왜 울고 있는 거야, 마키쨩?

한숨을 내쉰다.
가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어.

문이 닫혔다. 마키는 혼자 울고 있었다. 소매로 눈물을 훔쳐보지만 금세 다시 넘쳐버려 아무 소용 없었다. 눈만 붉게 달아올라 연한 살이 쓰리고 매워질 뿐이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쭈그려 앉아서는 손에 잡히는 원피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하지만 해결할 방법은커녕 그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삐- 삐- 작게 귀에 맴도는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작은 몸에 본인은 무엇인지도 몰랐던 것이 숨을 쉬기가 벅찰 정도로 들어찼다. 숨을 몰아쉬면서 점점 커지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몸을 있는 대로 움츠리고, 호흡을 잊어 간간이 터져 나오는 숨을 격하게 몰아쉰다. 금방이라도 그렇게 무언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삐- 귀에 아른거리던 소리는 이제 노골적으로 마키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떠나지 않고 귀를 파고들었다. 감고 있던 눈꺼풀을 더 강하게 꾸욱 눌렀다. 한계다.

삐--.

마키는 눈을 떴다. 울어대는 핸드폰을 열어 기계적으로 알람을 껐다. 다시 감기려는 눈을 힘겹게 떠서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10시를 조금 넘겨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알람은 꽤 오래 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체를 일으킨다. 좁은 커튼 사이로는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아직 불을 켜지 않은 방을 조금이나마 밝히고 있었다. 마키는 가만히 눈을 깜박깜박 천천히 감았다 떠 보았다. 다시 눕고 싶다. 실제로 그녀의 어깨는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이른 시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주말인데 조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며 마키는 자신 안에서 들리는 유혹의 소리에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은 저항해보지만, 그 결과가 매번 패배였음을 마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내려가던 어깨가 베개에 닿았을 때, 진동이 울렸다. 짧게 울리고 끝나는 것을 보아하니 문자가 온 모양이었다.

귀찮아. 싫은데….

아예 엎드려 얼굴을 베개에 묻어버리고 애써 외면하고 있자니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한번은 무시했지만 두 번째에 또 곧장 이어 울리는 세 번째 진동음에 이르러서는 마키도 별수 없이 슬렁슬렁 뒤집혀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이름에 그제야 잠이 깼다.



마키는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면서 문이 닫히기 직전에 다시 벌컥 열어젖혔다. 급하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만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손에 휴대전화가 들려있었다. 현관 앞에 멈춰 서서 빠르게 손가락으로 패드 위를 움직여 문자 하나를 보내두었다.

<지금 나가>

이제 막 보낸 문자를 받을 상대도, 아침부터 마키의 잠을 깨운 문자의 주인도 우미였다. 세 번에 나눠 온 장문의 메세지였지만 요약하자면 오늘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신가요?>

그렇게 시작한 문자는 거듭 사과를 반복했다.

<이렇게 당일이 되어서 급한 연락을 받게 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라며 끝을 맺는 것을 보니, 마키는 딱딱한 우미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져 혼자 한참을 웃고 나서야 답장을 위해 휴대전화를 집어 들 수 있었다. 여러 마디를 썼다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하더니 겨우 보낸 답장은 한마디뿐이었다.

<지금 준비하고 나갈게>

그렇게 집을 나서 마키는 우미와 만나기로 한 카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꿈, 기분 나빴던 것 같은데. 멍하니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문득 생각이 났다. 일어나자마자는 아른거리며 남아있었던 꿈은 그사이 휘발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는 꿈이었다’라며 깨어서 생각했던 것만 남아있어 찝찝한 느낌이었다. 걸음도 멈추어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퍼뜩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왜 울고 있는 거야, 마키쨩?’

목소리를 따라 꿈의 끝자락이 끌려 나왔다. 마키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생각했다. 한숨. 왜 울고 있었지? 닫힌 문. 그리고 따라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은 방안에서 침대 위에 앉아, 손으로 까슬 거리는 레이스 자락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언제였더라. 생각하고 있자니 카페 간판이 눈에 띄었다. 어느새 목적지였다.




먼저 카페에 와 있던 우미는 웃으며 마키를 반겼다.

“이번 곡도 느낌이 좋던데요? 요즘 컨디션이 좋은가 봐요, 마키.”
“별로.”
“그런가요.”

둘이서만 만나는 것만 해도 벌써 수차례. 우미는 하하 웃으며 능숙하게 마키의 퉁명스런 말을 받아넘겼다.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던 마키가 슬쩍 다시 우미 쪽으로 시선을 향하니, 우미는 눈을 마주치곤 슬쩍 웃어 보였다. 얼굴이 달아올라 버렸다. 마키는 시선을 돌려버리며 괜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서 가사는?”
“아, 아! 그렇죠. 여기 있습니다.”

마키의 서투른 말 돌리기에도 우미는 그녀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주었다. 우미가 가방에서 꺼내 드는 투명한 파일은 마키가 몇 주 전 그녀에게 건넨 것이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음표마다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 쓴 가사가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주인을 닮아 그녀의 고지식함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글씨는 지웠다 다시 쓴 흔적 하나 없이 정갈했다. 가장 앞 페이지부터 가사를 읽어나가는 마키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 음이 따라붙어 노래가 되어 울렸다. 마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며 가사에 집중했고 우미는 그 건너에서 그녀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끝까지 가사를 따라간 후에야 마키는 손에 들고 있던 악보를 내려놓았다.

“괜찮은가요?”
“좋은데? 생각했던 그대로 가사가 된 것 같아. 역시 우미…. 대단하네.”
“최고의 칭찬이네요.”

가볍게 받는 우미였지만 마키의 이야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처음 우미가 그녀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주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매번 신기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따로 언질을 주거나 그녀의 생각을 전달한 것도 아닌데, 우미의 가사는 언제나 마키가 곡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을 그대로 글로 옮기고 있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
“왜 그러시죠?”

묻혀있던 기억은 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하니 한꺼번에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다. 어린 시절에 가끔씩 아무도 왜인지 알지 못해 답답해하는, 펑펑 울어버리는 날들이 있었다. 그 날도 같았다. 마키는 연주를 위해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그리고 연주 도중에 마키는 참을 수 없이 슬퍼졌다. 건반을 누르는 것이 힘들었고 어서 그 자리를 내려오고 싶었다. 자신이 만들어 제 귀로 돌아오는 소리가 가슴에 응어리져 스스로를 꾸욱 짖눌러 왔다. 간신히 끝낸 연주회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무대를 내려가 가장 먼저 가까이 다가오는 부모님께 매달려 울어버리고 싶었다. 진심을 담아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슬픔은 그대로 두려움이 되었다. 그 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두려움은 주변 이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키…?”

마키가 혼자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미안 오늘 할 일은 이걸로 끝인가?”
“네. 일단은….”
“그럼 가봐야겠네.”
“네. 그렇죠.”
“저기, 우미.”
“뭔가 할 말이 있으신가요?”

우미는 가만히 마키를 응시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마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둘 사이의 침묵 뒤에 마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아니야. 나 잠깐 있다 갈게. 먼저 가. 잘가!”

몰아치듯 마구 인사를 건네는 마키에게 떠밀려 한두마디 더 인사를 나눈 뒤 우미가 먼저 카페를 나섰다. 천천히 자리로 돌아와 마키 혼자 남은 자리에 한숨이 내려앉았다. 마키는 이야기를 나누며 늘어놓았던 악보를 하나하나 순서대로 모아 쥐었다, 그러다 힘이 풀린 손에서 악보들이 빠져나가 처음보다 더 엉망으로 흐트러져버렸다. 마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숙여 그 위에 슬그머니 엎드렸다. 악보 위에서 사랑을 하고, 선율을 따라 키스를 하고, 노랫말을 곱씹으며 홀로 이별한다. 그리고 다시 악보 위에서 사랑을 시작했다. 마키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우미가 나선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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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
2016. 11. 5. 00:43

"잠깐만. 잠깐잠깐. 이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저기, 코사카씨?"

"그러니까, 레이나."


몸을 바짝 붙여오는 레이나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힘을 줘 밀어 보았지만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라고 했잖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만 슬쩍 올려보며 말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린다. 지금 뒤를 넘겨보면 꼬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미소였다.


"그래서, 정말로 곤란해?"


그렇게 똑바로 보는 건 반칙이야. 시선을 쭉 빼 달아나 보았다. 그러다 슬쩍 곁눈질로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도 레이나는 여전히 그대로 가만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건 애초에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얇은 이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열이 올랐다. 시야는 금방금방 뒤집혔다. 누구의 목소리였지, 방금? 부드럽구나, 레이나는--

--눈을 깜박였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곤란해? 정말로?- 문자가 되어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로부터 얼굴이, 장면이 끌려 나왔다. 퍼뜩 일어나 급히 좌우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익숙한 구조에 익숙한 물건들. 익숙한 내 방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꿈인가.


"아... 저질러버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면 좋을 텐데. 그만그만그만. 어차피 꿈이잖아. 생각을 멈추면 금방 잊어버릴 거야!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멋대로 똑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뿌옇던 기억은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점점 선명해졌다. 곤란해? 그만. 정말로? 그만. 레이나는-


"일어났으면 빨리 준비하지~?"

"-그만!"


양쪽 팔을 번쩍 든 채로 굳어버렸다. 먼저 다시 입을 열기도 난감한 상황에 방 안이 너무 심하게 조용했다. 차라리 웃어 주시죠. 뭐라고 말이라도 하던가.


"뭐해, 너?"


그렇게 아침부터 언니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



햇살이 강하다.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걷자니 금새 얼굴이 달아 올랐다. 머리 위로 두 손을 모아 가려보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다리는 계속 움직이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맞기나 한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빙빙 도는 것 같은 기분으로 그냥 일단은 걷고 있었다. 매미소리가 멀게 들렸다. 주변 소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 남지 않은 길이 힘겹게 느껴졌다. 학교에 가고 있었지, 나.  욥. 쿠미코. 주저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얼 해야겠다, 내지는 무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다리를 들어다 앞으로 놓는다. 덥다. 와중에도 머릿속에는-곤란해, 쿠미코?- 그만! 들어가! 쿠미코 표정이 이상해. 아 정말이지 길에서 생각나도 괜찮은 게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그러니까… 레이나는 부드러웠던가. 아니. 아니아니아니. 아. 이러다 죽어버릴지도. 이대로 집에 가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꿈도 그런데 레이-


"꿈?"


뭔가 눈 앞에 불쑥 나타나 뒷걸음질 치고 보니 하즈키가 서있었다. 아니 잠깐.


"있었어, 하즈키? 아, 아니 그보다 나 입 밖으로 말하고 있었어?"

"몰랐던 거냐."


하즈키는 뚱하게 얼굴을 찌푸리더니 금새 표정을 바꾸며 물어왔다.


"아, 맞아. 꿈은 무슨 얘기였던 거야?"


이건…조금 위험할지도.


"아니, 아,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러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오오 쿠미코 딱딱해졌어."


눈을 피해본다. 그러니까, 어떻게, 아, 그래. 도망갈까?


"어, 쿠미코 지금 그렇게 뛰면-"


그렇다. 현기증이 난다.



***



"쿠미코 말이야. 엄청 이상했다고?"


네, 네. 미도리를 붙잡고 이야기하는 하즈키의 목소리는 한쪽으로 흘러나가 버렸다. 책상에 한쪽 귀를 대고 엎드려 있는데도 두 사람은 내 자리 옆을 떠나지 않았다. 선풍기가 목이 돌아가며 터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주 잠시 동안 물러나는 더위는 두어 걸음 뒤에서 눈치를 보다 금새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미도리! 저번에 봤던 그 가게 열었던 것 같던데?"

"정말인가요?"


고개를 들었다 반대쪽으로 돌려 다시 책상에 기댄다. 타이밍 좋게 바람이 뒷머리를 살짝 흔들어 놓더니 그대로 멀어졌다. 정말이지 더운 날이다. 창틀 위로 하늘이 보였다. 눈만 깜빡, 깜빡 감았다 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첫 수업이 뭐더라.


"맞아 쿠미코 말이야, 그 뭐더라 꿈? 얘길 하더니 막 갑자기 달리기도 하고."

"꿈이요?"


--곤란해 쿠미코?


"응. 꿈이라고 했어."


부드럽구나, 레이나는--


"아아아! 그만! 그만! 레이나는 이제 됐잖아, 레이나는!"

"내가 왜?"


위에서 레이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으왁!"


정확히는 어느샌가 책상 앞쪽에 서서는 옆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 반응이 그게 뭐야?"

"레, 레레레이나가 여기 왜 있어?"


레이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곤란하게도,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맥락도 없이 꿈 속의 레이나가 지었던 표정이 떠올라버렸다. 여우일까 싶었던 그 미소와 눈 앞의 모습이 겹쳐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쿠미코, 어디 아파?"


아니. 그건 아닌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천장으로, 창 밖으로 시선을 피하려는데 레이나는 용납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양쪽 볼을 붙잡고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눈동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좋아. 그건 됐어. 그보다 쿠미코, 키스를 하자."

"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그러니까... 레이나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뭐라고? 음. 그러니까 일단 뭐라고 한 건지 레이나한테 다시 물어봐야겠지?


"므아므므."


다가온다? 다가옵니다? 다가오는 건가. 다가오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그러니까 뭐가, 무슨, 아니 그니까 레이나가, 다가온다. 아니, 레이나? 눈이, 에. 입술. 에- 아까 레이나가 뭐라고 했지?

--키스를 하자.

키스?


"에? 에에에? 에?!"


흠. 흠흠.

아무래도 수업이 한창이었던 것 같다. 꽤 큰소리를 내버린 모양이다. 선생님은 정확히 내 방향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린 채로 헛기침을 하고 계셨다. 지금 무슨 시간? 그러니까 방금 뭐지? '사실은 꿈이었습니다.'라니. 요즘은 싸구려 소설에서도 안쓸거야, 그런거. 걱정스럽게 돌아보는 미도리와 눈이 마주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줬다. 정말 무슨 일인 걸까 오늘은. 아침부터 말이야. 뒤에서 쿡쿡거리는 하즈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 덥다.



***



수업은 계속 진행됐다. 집중이 될 리가. 책 한 귀퉁이에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동그라미를 한참 그리다 무슨 짓인가 싶어져 지우개를 들었다. 막상 지우자니 거기 들어가는 힘도 아까워 슬쩍 내려놓고 그냥 다시 샤프를 집었다. 시대상과… 작품은… 꿈… 그러네 꿈. 하즈키랑 미도리는 슬슬 잊어버렸겠지. 아니 거기도 꿈이었을까? 레이나는… 응, 그치. 이따 레이나는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한 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트 한쪽 구석에 ‘레이나’가 쓰여 있었다. 곧장 지우개를 들어 최대한 자국이 남지 않도록 지웠다. 덥다. 조금 어지럽고, 졸릴지도. 정확히는 눈이 무거워.


"쿠미코, 일어나."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레이나?"


아. 그런가. 나 자고 있었구나.


"깨워줘서 고마워."

"일어났어? 잠은 깬 거야?"

"응. 덕분에."

"좋아. 그럼."


저기. 레이나씨 조금 가까운 것 같은--

--또, 인가.


"쿠미코, 오늘 피곤했나요? 날이 많이 덥긴 하지만…."

"그렇네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책상에 다시 엎드리려다 하즈키에게 손목이 붙들려 억지로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졌다. 그리곤 뒤에서 등을 미는 통에 그대로 떠밀려 다리가 움직였다.


"자자. 그만 부실에 가자고."



***



“그치? 오늘 이상하지?”

“아무래도 그렇죠?”


다 들리는데요…. 부실로 향하는 길에 날 앞세워 놓고 하즈키와 미도리는 조금 뒤에서 수군거리며 뒤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해주고 배려 해주는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지. -하하하. 별일 없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친구들아! 사실 그냥 오늘 조금 이상한 꿈을 꿔서 잠자리가 안 좋았나봐!-정도로 이야기하고 정리하면 서로 좋을 일일텐데. 전혀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덕분에 그냥 못들은 척 부실을 향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더위 때문일까? 한풀 꺾일 시간이 되었는데도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으엑.”


부실 문을 열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부터 튀어나왔다.


“이거 이거. 여기도 만만치 않은데요.”


뒤이어 들어오며 중얼거리는 미도리의 말마따나 부실도 꽤나 후끈거리는 것이 복도나 교실 이상인 것 같기도 했다. 부실의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 표정들이었다. 그래보아야 금방 부실에 들이닥쳐 언제나와 같은 상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타키 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연습이 시작됐다.


레이나와 눈이 마주칠 뻔 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던 전날의 일은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약속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말할 기분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조금도 들지 않았다. 둘 만 기억하는 조각이라는 건- 아차차차. 방금거 꽤 큰 실수였는데. 슬쩍 보인 아스카 선배의 눈초리가 무서워 황급히 시선을 악보에 좀 더 가까이 모았다. 당황해서 마우스피스에서 입을 떼버릴 뻔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귀 뒤를 타고 목덜미를 따라 땀이 흐르는 자국이 느껴졌다. 어지러워. 귀에 닿는 소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흐리멍덩해 지는 기분. 악보의 음표들이 멋대로 둥둥 떠다닌다. 삐-------------- 긴 이탈음 끝에 저편에서 레이나가 벌떡 일어섰다. 다짜고짜 내 자리 쪽으로 사람들 자리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가까워져서는-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할까. 욕구불만인가 나는? 연습 중에 가볍게 잠깐 의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봐야 30초가 될까 말까 한 남짓이었던 것 같지만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기엔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미코 몸이 안좋으면 무리하지 않는게 좋아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미도리 외에도 다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날 둘러싸고 있느라 연습도 중단하고 웅성거리기를 한참. 결국은 부활동 자체가 중단됐다. 타키 선생님도 이 날씨에 나 같은 사례가 나온 이상 이대로 연습을 계속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고, 그대로 일단은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하즈키와 미도리의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을 힘겹게 만류하고 선약이 있던 두 사람의 등을 떠밀어 보낸 뒤에 느긋하게 하교를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하아.”


교문까지 내려와서야 뭔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가방을 열어 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아무래도 악보를 부실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돌아갈까, 그냥 가버릴까. 혼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차라리 평소 같았다면 눈을 꼭 감고 그냥 교문 밖으로 나가 버릴 텐데 오늘 연습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은 방향을 돌렸다.


“안 되는 날이라는 거 있는 모양이네 아무래도.”


부실에는 레이나가 혼자 있었다. 레이나? 또 그건가?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 정도로 원 패턴이면 질려버린다고.


“쿠미코? 왜 돌아 온거야? 아. 몸은 좀 괜찮아?”


정말 오늘은 무슨 날인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대체, 그러니까 아침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수업 중간에. 또 부실에서. 그리고 또인거야? 아. 그래. 정말 차라리 확 해버리기라도 했으면 몰라. 이거 억울하네.


“쿠미코?”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꿈을 한 낮에 네 번이나 겪지. 생각할수록 화나네. 어차피 꿈이면 그냥 기회 있을 때, 해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러게. 그렇네. 그러면 되는 거겠네.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일단 어깨를 붙잡았다. 도망가면 곤란해. 그럼 또 깨버리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겠지?


“쿠미코? 쿠미코 잠깐만. 너 지금 좀 이상해.”


역시 오늘은 더운 날이다. 누가 학교를 끓이고 있는 게 아닐까? 뇌까지 끓어버릴 것 같아.


“쿠미코!”


머리가 조금 울려. 아무래도 좋다. 어깨를 조금 내렸다. 무릎을 조금 구부렸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깨지 않아?

레이나의 어깨를 놓아주고 두 손을 들었다.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잠깐. 잠깐잠깐잠깐.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이 봤다면 별다를 건 없었겠지만.


정말이지 전부 더위 탓이다. 레이나도, 나도 얼굴이 붉어져 버린 것도 전부 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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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혼우